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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9095962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2-04-01
책 소개
목차
네 딸을 데리고 있어
조립형 인간
웬즈데이 유스리치 클럽
밸런타인 시그널
너에게
심사평
리뷰
책속에서
수린이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집 주소를 노출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인스타그램 해시태그와 팬들의 댓글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실에 있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 동호수까지야 알 수 없었지만 그걸로 족했다. 대단지가 아니라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마음속 한편에는 정말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 차라리 못 만나면 좋겠다. 집 앞까지 찾아가는 주제에 무슨 말이냐 싶지만, 진짜로 수린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민영은 동네 구경 온 사람처럼 아파트 단지 안을 어슬렁거렸다. 새로 지은 아파트라서일까. 단지 안이 마치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걷다 보니 산책을 나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남자의 비밀에 대해 함구하게 되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말한다고 해서 믿어줄 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자가 같은 인턴인 남자의 평판에 흠집을 내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정신과를 찾아가보라고 등을 떠밀지도 모른다. 여자의 생각은 더욱 확장되어, 어쩌면 이 회사 내부에 남자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해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여자에게는 그들의 비밀을 폭로할 용기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자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갔다. 다만 그런 인간들이 여자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에서는 부디 소수이기를, 여자는 순수하게 바랐다.
남자는 비밀을 지킨 대가를 여자에게 주었다. 시작은 남자가 마련한 인턴들의 저녁 모임에서였다.
1년 전, 작은 기업이지만 취업에 성공했을 때 취준생 딱지를 뗐다는 기쁨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는데 다시 돌아올 줄 몰랐다. 애꿎은 문자 기록을 뒤적거리며 사장이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를 몇 번이고 읽는다. 살면서 가장 많이 읽은 단문이 아닐까. ‘상황이 좋지 않은 탓에 불가피하게 결정된 사항이고 우리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나쁜 마음은 먹지 말길, 건승하고 다음에 밥이라도 먹자.’ 해고를 명확히 알리는 이 문자는 해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 위해 참 많이도 빙빙 돌려졌다. 또한 어디에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 사장이 문자를 타이핑할 때 속내를 빙빙 돌리기 위해 투자했던 노력을 상상해본다. 그 과정으로 사과를 대신한다. 한 번도 받은 적 없는 사과지만, 그가 이 정도로 노력했다는 사실만으로 사과를 받은 셈 치는 거다. 이 배려는 수요 없는 공급이다. 그의 마음을 필사적으로 대변하면 할수록 어째서인지 가슴이 시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