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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 ISBN : 9791160870817
· 쪽수 : 426쪽
· 출판일 : 2021-07-15
책 소개
목차
옮긴이의 글
머리말: 주디스 버틀러
1. 에세이의 형식과 본질에 대하여: 레오 포퍼에게 보내는 편지
2. 플라톤주의, 시 그리고 형식: 루돌프 카스너
3. 삶에 부딪혀 발생한 형식의 파열: 쇠렌 키르케고르와 올센
4. 낭만적인 삶의 철학에 대하여: 노발리스
5. 부르주아의 삶의 방식과 예술을 위한 예술: 테오도르 슈토름
6. 새로운 고독과 그 고독의 서정시: 슈테판 게오르게
7. 동경과 형식: 샤를-루이 필리프
8. 순간과 형식: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9. 풍부함, 혼란 그리고 형식: 로렌스 스턴에 관한 대담
10. 비극의 형이상학: 파울 에른스트
마음의 가난에 대하여: 대화와 편지
해설: 루카치의 실천적 삶과 초기 주요 저작 『영혼과 형식』에 대하여
리뷰
책속에서
나의 친구에게!
이 책에 실을 에세이들이 내 앞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에세이들을 출판해도 될지, 그것들이 새로운 통일을 이루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지 자문해본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에세이들이 ‘문학사’ 연구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것들을 그 자신의 새로운 문학적 형식으로 만들 수 있는 무엇이 그 에세이들 속에 있는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만약 통일이 존재한다면 그 통일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나와 내 책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는 좀 더 중요하고 좀 더 보편적인 문제인 것이다. 즉 그러한 통일이 가능한지의 문제이다.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참으로 훌륭한 글들은 어느 정도 문학적 형식을 지니고 있는가, 그 글들의 이러한 형식은 어느 정도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가? 그 글에 담긴 관점과 그 관점의 형태는 작품을 학문의 영역으로부터 어느 정도 들어 올려, 그러나 아직 양쪽의 경계는 흐릿하게 하지 않고 그것을 예술의 반열에 위치시킬까? 그 관점과 그 관점의 형태는 삶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데 필요한 힘을 작품에 어느 정도 부여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그 작품을 철학의 차디찬 최종적인 완벽성과 어느 정도 구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에세이라는 그러한 글에 대한 유일하게 깊이 있는 변호인 동시에, 물론 그 글에 대한 깊디깊은 비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제시하는 질문의 기준에 의해 그 글이 맨 먼저 평가될 것이고, 그러한 목표가 정해지면 그 글이 이러한 목표에 얼마나 미흡한지 맨 먼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글쓰기는 세계를 운명적 관계의 상징 속에서 서술한다. 운명의 문제는 어디서나 형식의 문제를 규정한다. 이러한 통일, 이러한 공존이 너무 강력하기에 하나의 요소는 다른 요소 없이는 결코 등장하지 않고, 여기서도 양자의 분리는 추상의 방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여기서 실행하려는 분리는 실제로는 강조의 차이에 불과한 것 같다. 즉 문학은 운명으로부터 자신의 프로필과 형식을 얻고, 형식은 거기서 언제나 운명으로서만 나타난다. 에세이스트의 글에서 형식은 운명이 되고, 운명을 창출하는 원칙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운명은 사물들을 그것들의 세계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본질적인 것을 강조하고 비본질적인 것은 제거해버린다. 그러나 형식은 그렇지 않으면 우주 속에서 공기처럼 사라져버릴 재료에 한계를 정한다. 달리 말해 운명은 모든 다른 사물과 같은 원천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사물들 중의 사물이다. 반면에 외부에서 볼 때 무언가 완결된 것으로 간주되는 형식은 본질이 다른 것의 한계를 정한다. 사물들을 정리하는 운명이 사물들의 살 중의 살이고, 사물들의 피 속의 피기 때문에 에세이스트의 글에서 운명은 발견되지 않는다. 일회성과 우연성을 빼앗긴 운명은 이러한 글들의 형체 없는 다른 모든 재료가 그렇듯이 공기처럼 비물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이러한 글들에 형식을 부여할 수 없을뿐더러, 이러한 글들 자신은 형식을 농축시킬 어떠한 자연스런 경향과 가능성도 갖지 못하게 된다.
카스너는 세계문학에서 가장 플라톤주의자적인 문필가 중 한 명이다. 그의 내면에서는 확실성에 대한 동경, 기준과 도그마에 대한 동경이 믿을 수 없을 만치 강하게, 그러나 믿을 수 없을 만치 은폐되어, 격렬한 아이러니에 감싸인 채 엄격한 이론의 탈을 쓰고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로 하여금 모든 기준을 버리게 하고, 인간을 위대한 종합이라는 장식적 조화 속에서가 아니라 고립이라는 강렬한 빛에서 바라보게 하는 그의 의심과 망설임은 숭고하다. 카스너는 마치 두 눈을 감고 종합을 보는 것 같다. 그는 사물을 바라볼 때 너무 많은 시시콜콜한 세부, 즉 결코 되풀이해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만치 많은 것을 보기 때문에 모든 요약은 거짓으로, 의식적인 왜곡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동경을 따르며, 사물을 전체로서?가치로서?파악하기 위해 눈을 감는다. 하지만 그의 정직성은 즉각 사물들을 다시 바라보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사물들은 다시 한 번 분리되고 고립되며 공중에서 떠도는 상태가 된다. 카스너는 이 두 가지 양극 사이의 동요를 양식(Stil)이라 규정한다. 그가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의 순간, 다시 말해 파악된 종합이 실재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사실들이 한순간이나마 여전히 가치 속에 싸여 있어서, 사물들 사이의 꿈 꾸어온 연관 관계를 깨트려버릴 정도로는 아직 강하지 않을 때의 순간은 아름답다. 그리고 눈을 감을 때의 순간, 그래서 놀랄 정도로 자세히 보이는 사물들이 동화에 나오는 성의 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끝없는 기다란 대열에 끼어드는 순간 역시 아름답다. 그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단지 상징이나 장식으로서만 살아있을 뿐이다. 카스너는 선이 굵은 열정적인 몽상가다. 하지만 그의 양심 때문에 분명 인상주의자기도 하다. 이러한 이원성은 문체를 강렬히 불타오르게 만드는 동시에 꿰뚫을 수 없이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