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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61951393
· 쪽수 : 272쪽
· 출판일 : 2021-07-25
책 소개
목차
오래된 약속
천사의 미소
비의 동화
달의 이면
선라이즈 선셋
어떤 인형 이야기
에필로그 : 십자가 목걸이
작가의 말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빨간 머리 소녀는 얼굴 표정이 변화무쌍한데다 눈동자가 여기저기로 빠르게 옮겨 다녔다. 언뜻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간혹 신중하고 침착한 표정을 지을 때면 적어도 10대 철부지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이 지긋한 역무원이 방금 전 가벼운 발걸음으로 눈앞을 지나간 소녀의 뒷모습을 따라잡다가 이상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아이가 살아 있는 고양이를 데리고 있었나?’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소녀를 뒤따라 걷고 있었다. 소녀가 가끔 뒤를 돌아보며 고양이에게 말을 건네는 걸 보아하니 동행이 분명했다.
‘이상하네. 아까는 분명 고양이 인형이었는데?’
역무원은 계속 믿기 힘든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방금 전까지 빨간 머리 소녀가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살아있는 고양이였다.
‘아까는 내가 잘못 봤나? 아니야, 아직 내 눈은 정확해. 분명 살아있는 고양이가 아니라 인형이었어.’
검은 고양이가 역무원이 있는 쪽으로 힐끔 고개를 돌리더니 금빛 눈을 빛내며 방긋 미소를 지었다.
‘고양이가 웃다니? 내가 헛것을 본 건가? 나도 이제 늙었나봐. 고양이가 웃을 리 없잖아.’
빨간 머리 소녀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개찰구를 향해 걸어갔다.
니콜라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오늘 따라 왠지 쓸쓸한 느낌이 묻어났다.
나나세는 니콜라를 따라 주방의 식탁으로 갔다.
“로즈마리 치킨 크림 스튜인데 맛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예전에는 자주 만들어먹던 음식인데 한동안 만들지 않았어요. 모처럼 만들어봤는데 양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양이 너무 많아요.”
스튜를 담은 접시에서 식욕을 당기는 냄새가 스멀스멀 피어올라왔다.
구수한 치킨 냄새와 허브 향, 불그스레한 당근과 푸르스름한 파슬리, 적당히 뿌려놓은 후춧가루의 조합이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둥글둥글하게 다듬은 감자와 반투명 샬롯을 넣은 스튜를 입 안에 넣는 순간 저절로 황홀감이 느껴졌다.
“맛이 어때요?”
“한 마디로 기가 막히네요. 제가 이제껏 먹어본 스튜 중에서 단연 최고입니다.”
찬사를 들은 니콜라가 손으로 턱을 괴며 밝은 미소를 짓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나나세를 바라보았다.
“오래 전에 친한 친구가 있었어요. 나이는 내가 훨씬 더 많았는데 친자매처럼 지냈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이 척척 맞았죠. 회색 머리카락이 등에 닿을 정도로 긴 친구였는데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되었어요.”
니콜라는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마녀들은 친구를 만들지 않아요. 그 친구와 나는 드물게도 정말 친한 사이였죠. 물론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마녀들끼리 깊은 속내를 다 털어놓지는 않아요.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인데 나는 그 친구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도 몰랐어요. 그저 이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였죠. 그 친구가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경험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대화가 끊기면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할머니에게 안겨 우는 아이, 벌써 5학년이고 나이가 열한 살이나 되었는데 위로를 바라며 응석을 부리는 아이를 보자니 너무나 한심해보였다.
바로 그때 거울을 통해 손자에게 확신을 주지 못해 슬퍼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그토록 슬픈 표정을 본 건 난생처음이었다.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손자의 등을 토닥거리고 있었다. 늘 활달하고 밝았던 할머니의 얼굴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내가 나약한 아이로 머문다면 할머니가 계속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겠지?’
소라야는 바로 그 순간 결심했다. 이제 더는 나약한 아이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다시는 할머니가 나 때문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런 결심을 하자 놀랍게도 정말 용기가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