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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63891741
· 쪽수 : 528쪽
책 소개
목차
추천의 글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말
제1장 눈동자의 법칙
제2장 월광과 암운
제3장 파란 폭풍
제4장 별들이 지는 시간
제5장 쓰다누마 전쟁
제6장 마지막 꿈
제7장 아카사카의 핏줄을 잇는 여자들
제8장 신월
작가의 말
리뷰
책속에서
“오시마 씨, 전 초등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요.”
여자는 고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쇼와 9년(1934)생의 비극이죠. 저희 학년이 입학한 해에 이 나라 초등학교는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졸업한 해 다시 초등학교가 된 거죠. 오시마 씨는 국민학교를 아시나요?”
또다시 질문을 받은 고로가 이번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한 것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쇼와 9년생이라면 여자는 현재 스물일곱 살. 고로보다 다섯 살 연상이다.
“아, 네, 국민학교 말씀이죠. 1년 다녔습니다. 아직 어렸을 때라 기억은 잘 안 납니다만.”
“다행이에요. 6년 다니면 평생 잊을 수 없어요.”
소국민(小國民)으로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당한 6년간. 토씨 하나 틀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던 교육칙어 외우기.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악화된 교사들의 폭력. 신풍(神風)은 과학적으로 어떤 원리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냐고 담임에게 물었다가 ‘불경한 소리’라고 맞았던 과거 등을 여자는 띄엄띄엄 이야기했다.
“하지만 뭣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그 정도로 군사 교육에 철저했던 선생님들이 종전을 경계로 태도가 돌변한 거였어요. 악마 같은 영미를 타도하자고 부르짖던 선생님이 바로 그 입으로 평화를 외치기 시작하더군요. 정의의 잣대를 너무나도 쉽사리 바꿔친 겁니다. 학교는 무섭다, 교육은 믿을 수 없다. 당시 전 그걸 뼈저리게 실감했어요.”
담담한 어조 속에 노여움이 담긴 여자 앞에서 고로는 슬그머니 발을 반대 방향으로 꼬았다.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이런 종류의 원한은 전에도 연장자에게서 자주 들었다. 하지만 종전 당시 아직 어렸던 고로는 공감이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의 모순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아카사카 씨는 학교를 두려워하면서도 교사의 길을 가려고 하셨죠.”
“그래요. 일본은 신의 나라가 아니게 됐고 군사 교육도 민주주의 교육으로 대체됐으니까, 저 같은 희생자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교육을 짊어지는 일꾼이 되자고 생각한 거예요.”
그렇지만, 하고 여자는 냉소했다.
“제가 너무 뭘 몰랐던 거예요. 이 나라가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죠.”
고로는 두렁길 한복판에 멈춰 섰다. 전후 농지 개혁이 낳은 널따란 논은 차갑고 축축한 어스름 빛 속에 잠들고, 유일한 광원인 초승달도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었다. 달의 둥근 곡선을 바라보는 고로의 뇌리에 지아키가 그날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 되살아났다.
“오시마 씨, 전 학교 교육이 태양이라면 학원은 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태양의 빛을 충분히 흡수할 수 없는 아이들을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비추는 달. 지금은 아직 여릿한 초승달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둥글게 차오를 거예요.”
태양과 달. 교육이라는 우주에 두 개의 광원이 과연 필요할까.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고로는 여자의 자신에 찬 목소리를 떨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