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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질긴 매듭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9813907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5-09-03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9813907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5-09-03
책 소개
다섯 명의 여성 소설가가 ‘모계 전승’을 화두로 쓴 단편집이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무엇’은 아득히 먼 과거부터 불안한 오늘, 끝 모를 미래에까지 여성들을 속박하기도, 연결하기도 하는 치열한 화두다. 그리고 이번 작품집에서 ‘모계 전승’은 다섯 명의 여성 소설가들을 통해 시공간을 종횡하는 다채로운 서사로 확장되었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
여성 소설가 5인이 파고든 ‘모계 전승’의 굴레 혹은 연대
『질긴 매듭』은 ‘모계 전승’을 화두로 삼은 단편집이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무엇’은 아득히 먼 과거부터 불안한 오늘, 끝 모를 미래에까지 여성들을 속박하기도, 연결하기도 하는 치열한 화두다. 그리고 이번 작품집에서 ‘모계 전승’은 다섯 명의 여성 소설가들을 통해 시공간을 종횡하는 다채로운 서사로 확장되었다.
『질긴 매듭』 속 인물들은 어머니에서 딸로 전해진 고통을 직시하고, 차별의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뿐 아니라 ‘진화’에 떠밀려 스러지는 생명과 ‘정상성’에서 벗어난 소수자, ‘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노동자, 너무나 빈번해 ‘흔한 뉴스’로 여겨지는 폭력의 희생자에게 주목한다. 아마도 다수와 권력을 우선하는 ‘세상’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도, 기록하지도 않을 인물들이 저마다 강렬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독자를 만난다.
배미주, 정보라, 길상효, 구한나리, 오정연. 현실과 비현실의 틈새를 파고들며 가장 근원적인 질문과 날 선 분노, 미래적인 상상을 발화해온 다섯 명의 소설가들은 이야기의 창조자이자 전승자로서의 역할을 이번에도 훌륭히 해냈다. 이 책과의 만남은 당신이 이제껏 당연하다고 여겨온 많은 질서와 가치관을 무너뜨리겠으나, 분명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배경도, 인물의 상황도, 모계의 형태도, 전승되는 유무형의 유산도 제각각인 다섯 편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아름답기도, 아프기도,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는 이 유산을 기꺼이 물려받고, 거부하고, 새롭게 전승하는 저마다의 결말이 마치 넓게 펼쳐 던진 투망처럼 독자 여러분을 사로잡기를 바라면서. -길상효(「기획의 말」에서)
이야기에 담긴 한 또는 힘
이야기란 으레 ‘옛날옛적’부터 ‘할머니’가 들려준 것이다. 비단 한국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 비록 직접 들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옛이야기란 오래전 어느 할머니가 들려준 것이려니 여긴다. 그런데 ‘기록된 역사’의 세계로 진입하면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여성이 아주 오랫동안 권력과 자본, 교육의 기회에서 밀려나 피지배자이자 약자, 희생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여성이 후대에게 목소리를 전해온 방법은 문자가 아니라 음성과 기억이었음을 상기하고 보면,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라는 말은 무척 의미심장해진다. 약자의 위치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이야기의 주체였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고 전한 이야기에는 여성 자신은 물론 소외된 존재들의 눈물과 웃음,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의문,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에 대한 꿈,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는 힘이 필연적으로 담겨 있었다. 그 이야기는 비단 여성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전해져, 세상의 큰 축을 이루었다.
『질긴 매듭』은 그러한 ‘이야기의 원형’에 무척 가깝다. 오늘의 여성 소설가들이 어떤 존재와 장면들을 눈여겨보는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를 담았다. 이 작품들은 여성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이나 여성 독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무척 흥미롭다.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인간이 어째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토록 즐겨왔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모계 전승’된 것들에 대한 대담하고 다채로운 사유
『질긴 매듭』은 길상효 작가의 기획으로 배미주, 정보라, 길상효, 구한나리, 오정연 작가가 ‘모계 전승’이라는 화두를 깊이 파고든 결과물이다. 할머니로부터 전해진 절박한 전승의 기원을 더듬는 것은 물론, ‘모성’에 겹겹이 덧씌워진 강요에 대한 반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과 ‘나는 너다’라는 목소리까지. 다섯 명의 작가는 긴 세월에 걸쳐 여성들을 억압하기도, 속박하기도, 연결하기도 한 무형의 것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모성’ 혹은 ‘모녀’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는 태도다.
배미주 작가의 「이삭은 바람을 안고 걷는다」는 이상 기후와 전쟁으로 전 세계에 죽음이 팽배한 근미래, 모래 폭풍으로 척박해진 땅 ‘연해주’를 배경으로 삼는다. 태아 알코올 스펙트럼 장애와 불안 장애를 가진 주인공 ‘이삭’은 엄마가 떠나버린 뒤 ‘도도 씨’의 도움으로 대형마트 ‘퀸즈패밀리’에 정착했다. 조금 느리고 남다른 이삭은 그를 기다려주는 도도 씨 옆에서 일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도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하며 그와 세상을 잇던 유일한 끈이 사라진다. 이삭은 과연 정착할 땅을 찾을 수 있을까? 분쟁 지역을 전전하던 이주 노동자이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고용주에게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고객들에게는 투명인간으로 취급받는 이삭. 배미주 작가는 그를 통해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회가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장애인 노동자의 존엄과 연대의 가치를 전한다.
「엄마의 마음」에서 주인공 ‘완’은 초경을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친모로부터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저주’를 듣는다. 바로 첫딸이 딸을 낳지 않으면 어머니가 죽는다는 것. 친모는 완에게 어서 딸을 낳아 자신을 살리라고 당당히 요구하고, 이제껏 엄마로 알고 있던 사람이 이모라는 사실도 당황스럽다. 더구나 친모가 등장한 이후부터 완은 정체불명의 검은 형체와 비명소리를 보고 듣는다. 누구도 자신을 돕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우친 완은 직접 저주의 사슬을 끊기로 결심한다. 완에게 내린 저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는 일’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도록 가르쳐온 사회에 대한 비명이자 ‘여성이 여성을 낳는 일’을 저주처럼 여겨온 가부장제를 향한 신랄한 비판이다. 환상이라는 장치를 통해 ‘호러보다 더한 현실’을 독자의 코앞에 들이미는 정보라 작가 특유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이다.
장르도 주제도 다른 두 작품에서 독자는 근대적 가치관이 신성한 것으로 삼은 ‘모성’에 대한 단호한 시각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나에게 이어진 속박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심이며, ‘친족’ 관계를 미화하며 사회가, 때로는 여성이 스스로에게 강요해온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이삭에게 도도 씨가 있듯, 현대 여성들은 서로에게서 전통적인 ‘가족’보다 훨씬 깊은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해왔지 않은가.
현재와 과거, 미래를 종횡하는 연대
「거짓말쟁이의 새벽」은 ‘원인 불명의 통증’을 겪는 지효를 주인공으로 쌍둥이 자매인 지인, 그리고 어머니인 은수와 이모 은조까지 두 세대에 걸친 자매 서사다. 의학적으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통증으로 학교는 물론 주변에까지 ‘거짓말쟁이’로 불리는 지효는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지인과 어머니마저 부담스러워한다. 어느 날 가족과 연을 끊고 미국으로 떠났던 이모 은조를 만나면서, 지효는 자신의 고통에 어떤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구한나리 작가는 책에 실린 짧은 인터뷰를 통해 “자매”란 “고통을 이해하는 사이”라고 정의했다. 이 단편은 친자매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신체적으로 감응하는 지효의 능력은 우리 사회에서 연대하는 여성들이 서로를 부르는 이름인 ‘자매’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너다’라는 외침 앞에 망설임이 없었던 자매 연대에 대한 믿음이 담긴 단편이다.
태고의 여신부터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 조선 궁녀와 드라마 작가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들의 사연을 수집하고 꿈을 통해 전달하는 숙명을 타고난 여성들이 있다면 어떨까? 연인인 ‘미지’가 너무나 흔해서 단신감도 못 되는 귀갓길 여성 대상 폭력 사건의 희생자가 되자, 신문기자인 주인공 ‘영설’의 귓가에 ‘오랜 일’을 거래하자는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언어와 문자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탐구해온 오정연 작가는 신작 「오랜 일」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의 의미에 천착한다. 오늘날 여성 대상 범죄와 그 범죄가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 역시 이 작품을 이끄는 커다란 힘이다.
이 두 단편이 동시대 한국 여성들이 맞닥뜨린 폭력과 위험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여성들을 구원할 실마리를 연대에서 찾는다면 길상효 작가의 SF 단편 「행성의 한때」는 지정 성별로서의 여성을 뛰어넘어 인류 전체에 보내는 경고다.
“종이 아니라 개체를 볼 것.” 「행성의 한때」는 그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치열하게 뒤쫓는다. 그 말은 진화생물학자인 ‘은서’의 연인 ‘해린’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다. 또한 사고로 모든 신체 기능을 잃은 해린의 할머니 ‘김우경’ 박사가 병원에 갇혀서 지금까지 되뇌는 유일한 문장이다. 해린이 사라진 후 자책과 분노와 원망을 거쳐 체념에 이른 은서는 어느 날 화성에서 보내온 한 장의 사진에서 해린을 발견한다. 해린은 어떤 비밀을 풀기 위해 그곳으로 갔을까? 이 작품은 과거에서 현재로 갈수록 생명은 발전한다는 가정을 당연하게 여겨온 독자에게 ‘그 일방적인 진화는 온당한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진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소수’라는 이유로 잊히는 생명, 혹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가차없이 지운 생명들을 기억하게 하는 시도가 흥미롭다.
『질긴 매듭』에 수록된 다섯 단편소설은 앉은 자리에서 독자를 아득한 과거와 깊은 바다 밑, 아주 먼 미래로 데려가며 나와 같기도 다르기도 한 수많은 ‘종’을 만나도록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한다. 그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고통을 아는 자들이 나누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성 소설가 5인이 파고든 ‘모계 전승’의 굴레 혹은 연대
『질긴 매듭』은 ‘모계 전승’을 화두로 삼은 단편집이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무엇’은 아득히 먼 과거부터 불안한 오늘, 끝 모를 미래에까지 여성들을 속박하기도, 연결하기도 하는 치열한 화두다. 그리고 이번 작품집에서 ‘모계 전승’은 다섯 명의 여성 소설가들을 통해 시공간을 종횡하는 다채로운 서사로 확장되었다.
『질긴 매듭』 속 인물들은 어머니에서 딸로 전해진 고통을 직시하고, 차별의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뿐 아니라 ‘진화’에 떠밀려 스러지는 생명과 ‘정상성’에서 벗어난 소수자, ‘없는 존재’로 치부되는 노동자, 너무나 빈번해 ‘흔한 뉴스’로 여겨지는 폭력의 희생자에게 주목한다. 아마도 다수와 권력을 우선하는 ‘세상’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도, 기록하지도 않을 인물들이 저마다 강렬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독자를 만난다.
배미주, 정보라, 길상효, 구한나리, 오정연. 현실과 비현실의 틈새를 파고들며 가장 근원적인 질문과 날 선 분노, 미래적인 상상을 발화해온 다섯 명의 소설가들은 이야기의 창조자이자 전승자로서의 역할을 이번에도 훌륭히 해냈다. 이 책과의 만남은 당신이 이제껏 당연하다고 여겨온 많은 질서와 가치관을 무너뜨리겠으나, 분명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배경도, 인물의 상황도, 모계의 형태도, 전승되는 유무형의 유산도 제각각인 다섯 편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아름답기도, 아프기도, 진절머리가 나기도 하는 이 유산을 기꺼이 물려받고, 거부하고, 새롭게 전승하는 저마다의 결말이 마치 넓게 펼쳐 던진 투망처럼 독자 여러분을 사로잡기를 바라면서. -길상효(「기획의 말」에서)
이야기에 담긴 한 또는 힘
이야기란 으레 ‘옛날옛적’부터 ‘할머니’가 들려준 것이다. 비단 한국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렇다. 비록 직접 들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옛이야기란 오래전 어느 할머니가 들려준 것이려니 여긴다. 그런데 ‘기록된 역사’의 세계로 진입하면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여성이 아주 오랫동안 권력과 자본, 교육의 기회에서 밀려나 피지배자이자 약자, 희생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여성이 후대에게 목소리를 전해온 방법은 문자가 아니라 음성과 기억이었음을 상기하고 보면,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라는 말은 무척 의미심장해진다. 약자의 위치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이야기의 주체였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들고 전한 이야기에는 여성 자신은 물론 소외된 존재들의 눈물과 웃음,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의문,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에 대한 꿈,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는 힘이 필연적으로 담겨 있었다. 그 이야기는 비단 여성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전해져, 세상의 큰 축을 이루었다.
『질긴 매듭』은 그러한 ‘이야기의 원형’에 무척 가깝다. 오늘의 여성 소설가들이 어떤 존재와 장면들을 눈여겨보는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를 담았다. 이 작품들은 여성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이나 여성 독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무척 흥미롭다.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인간이 어째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토록 즐겨왔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모계 전승’된 것들에 대한 대담하고 다채로운 사유
『질긴 매듭』은 길상효 작가의 기획으로 배미주, 정보라, 길상효, 구한나리, 오정연 작가가 ‘모계 전승’이라는 화두를 깊이 파고든 결과물이다. 할머니로부터 전해진 절박한 전승의 기원을 더듬는 것은 물론, ‘모성’에 겹겹이 덧씌워진 강요에 대한 반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과 ‘나는 너다’라는 목소리까지. 다섯 명의 작가는 긴 세월에 걸쳐 여성들을 억압하기도, 속박하기도, 연결하기도 한 무형의 것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모성’ 혹은 ‘모녀’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는 태도다.
배미주 작가의 「이삭은 바람을 안고 걷는다」는 이상 기후와 전쟁으로 전 세계에 죽음이 팽배한 근미래, 모래 폭풍으로 척박해진 땅 ‘연해주’를 배경으로 삼는다. 태아 알코올 스펙트럼 장애와 불안 장애를 가진 주인공 ‘이삭’은 엄마가 떠나버린 뒤 ‘도도 씨’의 도움으로 대형마트 ‘퀸즈패밀리’에 정착했다. 조금 느리고 남다른 이삭은 그를 기다려주는 도도 씨 옆에서 일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도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하며 그와 세상을 잇던 유일한 끈이 사라진다. 이삭은 과연 정착할 땅을 찾을 수 있을까? 분쟁 지역을 전전하던 이주 노동자이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고용주에게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고객들에게는 투명인간으로 취급받는 이삭. 배미주 작가는 그를 통해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회가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장애인 노동자의 존엄과 연대의 가치를 전한다.
「엄마의 마음」에서 주인공 ‘완’은 초경을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친모로부터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저주’를 듣는다. 바로 첫딸이 딸을 낳지 않으면 어머니가 죽는다는 것. 친모는 완에게 어서 딸을 낳아 자신을 살리라고 당당히 요구하고, 이제껏 엄마로 알고 있던 사람이 이모라는 사실도 당황스럽다. 더구나 친모가 등장한 이후부터 완은 정체불명의 검은 형체와 비명소리를 보고 듣는다. 누구도 자신을 돕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우친 완은 직접 저주의 사슬을 끊기로 결심한다. 완에게 내린 저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는 일’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도록 가르쳐온 사회에 대한 비명이자 ‘여성이 여성을 낳는 일’을 저주처럼 여겨온 가부장제를 향한 신랄한 비판이다. 환상이라는 장치를 통해 ‘호러보다 더한 현실’을 독자의 코앞에 들이미는 정보라 작가 특유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이다.
장르도 주제도 다른 두 작품에서 독자는 근대적 가치관이 신성한 것으로 삼은 ‘모성’에 대한 단호한 시각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나에게 이어진 속박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심이며, ‘친족’ 관계를 미화하며 사회가, 때로는 여성이 스스로에게 강요해온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이삭에게 도도 씨가 있듯, 현대 여성들은 서로에게서 전통적인 ‘가족’보다 훨씬 깊은 연대의 가능성을 발견해왔지 않은가.
현재와 과거, 미래를 종횡하는 연대
「거짓말쟁이의 새벽」은 ‘원인 불명의 통증’을 겪는 지효를 주인공으로 쌍둥이 자매인 지인, 그리고 어머니인 은수와 이모 은조까지 두 세대에 걸친 자매 서사다. 의학적으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통증으로 학교는 물론 주변에까지 ‘거짓말쟁이’로 불리는 지효는 언제나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지인과 어머니마저 부담스러워한다. 어느 날 가족과 연을 끊고 미국으로 떠났던 이모 은조를 만나면서, 지효는 자신의 고통에 어떤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구한나리 작가는 책에 실린 짧은 인터뷰를 통해 “자매”란 “고통을 이해하는 사이”라고 정의했다. 이 단편은 친자매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신체적으로 감응하는 지효의 능력은 우리 사회에서 연대하는 여성들이 서로를 부르는 이름인 ‘자매’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너다’라는 외침 앞에 망설임이 없었던 자매 연대에 대한 믿음이 담긴 단편이다.
태고의 여신부터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 조선 궁녀와 드라마 작가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들의 사연을 수집하고 꿈을 통해 전달하는 숙명을 타고난 여성들이 있다면 어떨까? 연인인 ‘미지’가 너무나 흔해서 단신감도 못 되는 귀갓길 여성 대상 폭력 사건의 희생자가 되자, 신문기자인 주인공 ‘영설’의 귓가에 ‘오랜 일’을 거래하자는 신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언어와 문자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탐구해온 오정연 작가는 신작 「오랜 일」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의 의미에 천착한다. 오늘날 여성 대상 범죄와 그 범죄가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 역시 이 작품을 이끄는 커다란 힘이다.
이 두 단편이 동시대 한국 여성들이 맞닥뜨린 폭력과 위험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여성들을 구원할 실마리를 연대에서 찾는다면 길상효 작가의 SF 단편 「행성의 한때」는 지정 성별로서의 여성을 뛰어넘어 인류 전체에 보내는 경고다.
“종이 아니라 개체를 볼 것.” 「행성의 한때」는 그 수수께끼 같은 문장을 치열하게 뒤쫓는다. 그 말은 진화생물학자인 ‘은서’의 연인 ‘해린’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다. 또한 사고로 모든 신체 기능을 잃은 해린의 할머니 ‘김우경’ 박사가 병원에 갇혀서 지금까지 되뇌는 유일한 문장이다. 해린이 사라진 후 자책과 분노와 원망을 거쳐 체념에 이른 은서는 어느 날 화성에서 보내온 한 장의 사진에서 해린을 발견한다. 해린은 어떤 비밀을 풀기 위해 그곳으로 갔을까? 이 작품은 과거에서 현재로 갈수록 생명은 발전한다는 가정을 당연하게 여겨온 독자에게 ‘그 일방적인 진화는 온당한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진화의 흐름에서 벗어난 ‘소수’라는 이유로 잊히는 생명, 혹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가차없이 지운 생명들을 기억하게 하는 시도가 흥미롭다.
『질긴 매듭』에 수록된 다섯 단편소설은 앉은 자리에서 독자를 아득한 과거와 깊은 바다 밑, 아주 먼 미래로 데려가며 나와 같기도 다르기도 한 수많은 ‘종’을 만나도록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한다. 그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고통을 아는 자들이 나누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목차
이삭은 바람을 안고 걷는다 _배미주
엄마의 마음 _정보라
행성의 한때 _길상효
거짓말쟁이의 새벽 _구한나리
오랜 일 _오정연
기획의 말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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