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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국방/군사학 > 군인
· ISBN : 9791168151154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25-06-25
책 소개
목차
머리말•4
제1부 개전 발발일~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김태봉 특무상사•10
양태석 일등상사•29
이은찬 이등상사•44
빈정환 하사•53
제2부 38선 돌파, 중공군의 개입
오인구 이등상사•64
제3부 군인, 경찰관, 자유의병들의 공비 토벌 작전
박영화 일등중사•78
윤재곤 순경•87
신윤식 순경•99
임순승 대원•107
서정우 대원•117
제4부 전선의 고착화 이후 전개되었던 고지전
강태흔 일등중사•126
김판기 이등중사•134
박홍례 일등중사•143
정태조 일등중사•152
최창석 이등상사•162
제5부 보병의 화력지원을 담당한 포병
최상락 하사•174
홍영기 이등중사•183
제6부 원활한 전투를 위한 근무지원
김남수 일등중사•190
김노삼 일등중사•197
김방환 일등중사•204
부록•209
참고문헌•252
저자소개
책속에서
제1부 개전 발발일~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김태봉 특무상사
성명 김태봉
계급 특무상사
신분 부사관
근무처 약력 제6사단 19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
제6사단 직할 중박격포중대
인터뷰 날짜 / 장소 2020년 8월 11일 / 자택
소개 내용
‘김태봉 할아버지’께서는 전쟁 전인 1948년 12월 28일에 제19연대로 입대하여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참전하였고, 6·25전쟁 당시에는 6사단 19연대 2대대 소속으로서 ‘춘천-홍천 전투’에 투입된 이래로 수안보 전투, 신녕, 군위지구 전투, 용문산 전투, 금성지구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후 6사단 직할 중박격포중대에서 근무 후 1956년 3월 31일에 특무상사로 전역하신 호국영웅이다. 이 글에서는 김태봉 할아버지께서 겪으신 전투 중 ‘춘천-홍천 전투’부터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상황을 다루고자 한다.
Q1. 군(軍)에는 언제 입대하였으며, 6·25전쟁 전에 투입되었던 공비 토벌 작전에 대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1948년 12월 10일에 육군 제19보병연대 1기생으로 광주에서 입대해 2대대 6중대로 배치되었습니다. 우리 연대는 광주에서 주둔하던 중에 1949년 2월에 대전으로 이동하게 돼요. 그러다가 남원으로 출동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것이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된 거에요. 우리 6중대는 무려 2번이나 출전하였는데, 전북 무주군의 구천동과 경남 산청에서 반란군을 소탕하게 됩니다. 한번은 우리 중대가 산청 소재지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소대별로 흩어져서 수색작전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중대본부와 3소대가 공비들한테 기습을 받아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어요. 이후 중대원들은 공비들을 추격하여 공격한 끝에 6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세우게 됩니다.
육군 제19보병연대는 1948년 11월 20일에 광주(전남)에서 육사 7기생 신임장교 30명과 제20보병연대 소속 사병(士兵) 500명을 기간으로 창설되었으며, 초대 연대장에는 ‘민병권 중령’이 부임하였다. 이후 19연대는 1948년 12월 5일에 제5여단에 예속된 것을 시작으로 1949년 2월에는 대전(충남)으로 부대 이동, 2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 무렵 여수·순천 사건’ 이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숨어든 14연대 반란군들을 비롯한 지역 빨치산 잔존세력들이 백운산, 회문산, 덕유산 등지에서 근거지를 형성한 뒤 군경 진압부대를 상대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육군본부는 1949년 9월 28일에 전북 남원에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를 편성하였으며, 여기에 19연대 2대대가 진압부대로 차출됨에 따라 1950년 3월 15일에 이르기까지 약 6개월 동안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19연대는 15연대와 같이 계속해서 지리산에 숨어든 잔적들을 소탕한 뒤 1950년 5월 1일에는 6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어 강원도 원주로 부대이동을 전개하여 사단의 예비부대로 주둔하게 된다.
Q2.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부대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6·25전쟁이 났을 무렵 우리 연대는 특별휴가를 나간 상태 였어요. 1차와 2차로 구분해서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저는 계급이 하사였고, 보직은 부분대장이라 이미 1차로 휴가를 다녀왔어요. 그런데 그날 갑자기 비상나팔이 울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6중대는 완전군장을 꾸린 뒤 수류탄 2발과 실탄 160발을 수령하고 군장검사까지 받았어요. 그러고는 원주역까지 행군하는데, 이때 우리 중대장(한정일 중위)이 초등군사반에 교육 파견 나가 있던 상태라 조태제 중위가 중대 인솔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원주역에 도착해서 기차 편으로 출동해 다음 날 26일에 춘천으로 도착한 뒤 소양강을 건너 우두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돼요.
6·25전쟁이 발발 되었던 그날 6사단 19연대는 비상소집을 내려 오전 7시를 기해 경계태세를 갖추었으나, 문제는 춘천으로 이동할 차량의 부족으로 인해 영월광업소에서 차량 5대를 징발하여 1대대와 2대대는 기차 편으로 이동하고 3대대가 차량 편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무렵 19연대장 민병권 중령은 이미 그 전에 장교 보수교육을 받으러 육군보병학교로 파견 중이었기에 부연대장이었던 박광혁 중령이 부대 지휘를 하고 있었다.
이 당시 19연대는 2,160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전차포중대가 편제되어 있지 않았으며,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이후 원주로 부대이동을 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교육훈련에 있어도 이제 막 중대전술훈련을 진행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때 김태봉 할아버지께서 소속되었던 2대대의 경우에는 중대 전술훈련 진행도가 25%에 불과했다.
이러한 전반적인 상태에서 19연대는 사단의 예비부대로서 7연대의 증원을 위해 춘천으로 부대 이동을 완료하여 7연대 관측소가 있는 봉의산에 관측소를 설치하게 된다. 19연대 2대대는 1950년 6월 26일 5시에 춘천에 도착한 이후로 민병권 중령(19연대장)을 통해 우두산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아 소양강을 건너 우두산 기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Q3. 당시 우두산에서 겪었던 전투상황에 대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두산을 점령했던 우리 대대는 화천 방면에서 내려오는 북한군의 공격을 받게 돼요. 그때 우르르 탕탕하는 큰 굉음이 들려오길래 뭔가 싶어서 호 속에 있던 우리 중대원들은 살그머니 머리를 들고 전방을 보았더니 집채만 한 무쇠덩어리가 굴러오더군요. 그게 북한군 탱크였습니다. 그런데 그 탱크 뒤에는 북한군 보병들이 행군하며 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린 대대장(최성락 소령)의 사격명령에 따라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아주 총성과 포성이 오갈 만큼 치열하게 싸웠어요. 특히 탱크를 잡으려고 중대의 60mm 박격포, 대대의 81mm 박격포까지 동원해서 사격을 하였지만 탱크는 끄떡없었어요. 우리의 화력은 모두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었던 거죠. 결국 우리 2대대는 전멸 위기까지 처하게 되니깐 대대장으로부터 후퇴 명령이 내려지게 됩니다.
1950년 6월 26일, 우두산에 배치되었던 19연대 2대대는 19연대장(민병권 중령)으로부터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하는 제7연대 제1대대를 엄호하고, 이 임무의 종료와 동시에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받게 된다. 이는 북한군 2사단의 강한 공격력, 양구로부터 증원되는 적 병력 등을 고려해 소양강을 방어선으로 형성함으로써 사단의 주력부대들을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시킨 뒤 집중운용을 하고자 했던 6사단장(김종오 대령)의 판단에 있었다. 1950년 6월26일 15시, 7연대 1대대는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먼저 철수작전을 개시하였으며, 19연대 2대대는 이들의 철수 엄호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2사단은 아방(我方)의 철수를 간파하여 우두산에 대한 집중포격을 가한 뒤 SU-76자주포를 앞세워 2대대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였다. 이에 2대대는 북한군의 공세 맞서 계속하여 7연대 1대대의 철수를 엄호 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2대대장(최성락 소령)은 더 이상 전선을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 17시부터 소양강 이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이후 2대대는 19연대 1대대와 함께 소양강 남안의 근화동~소양교 일대에서 진지를 구축하였다. 다음 날 27일 새벽 5시에 북한군은 소양강 남안을 비롯한 춘천 시내에 대해 집중포격을 가한 뒤 19연대 예하 1,2대대가 있는 방어구역에 조공을 투입해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2대대는 이들의 공세에 맞서 약 3시간 동안 저지하며 방어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상황은 안 좋아지고 있었으며, 북한군들은 이미 춘천시의 일부를 점령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단에서는 홍천의 제2선으로 철수한 뒤 방어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하달, 19연대는 철수계획을 수립한 뒤 오전 10시부로 1대대가 먼저 철수를 시작하였으며, 2대대는 3대대의 엄호하에 철수를 실시하였다. 이후 춘천사범학교에서 집결한 뒤 홍천으로 후퇴하게 된다.
Q4. 홍천으로 철수했던 과정이 어떠했습니까?
27일에 소양강에서 도하 하는 북한군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중대장으로부터 홍천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거에요. 그래서 저는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중대원들과 함께 후퇴하려던 찰나 갑자기 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어렴풋이 의식을 되찾고서 정신을 차리니깐 아군은 보이지 않았고, 저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었어요. 거기다가 철모는 없어지고 에무완(M1) 소총은 개머리판이 부러졌습니다. 다행히 제 몸을 살펴보니 부상은 안 입었더군요. 그래서 전사한 전우의 에무완(M1) 소총을 집어 들고는 북한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산고개를 넘어가던 중 아군의 트럭을 만나 홍천국민학교로 도착했습니다. 정말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거죠. 그래서 저는 우리 중대에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후퇴할 당시 내 뒤에 있었던 위생병이 제가 적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보고해서 전사자가 되어 있었죠.
춘천에서 철수를 전개했던 6사단 19연대는 예하의 1대대와 2대대는 19시에 도착하였고, 3대대는 19시 30분에 도착하였다. 이후 홍천 방면으로 진격해 오는 북한군 12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홍천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였으며, 예하의 3대대는 홍천 소재의 말고개를 비롯한 그 일대의 능선에 배치되어 다음 방어작전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에게는 SU-76자주포가 있었기에 대전차공격은 불가피하여 19연대장(민병권 중령)은 ‘육탄특공대’의 편성을 명령함으로써 그 당시 연대 정보장교였던 박준수 중위는 특공대 편성에 착수하게 된다. 이때 대대별로 지원자 22명을 차출하였으며, 특공대원들을 선발하는 과정에서는 집안에 독자, 기혼자, 노(老)부모를 부양하는 자를 추려내 각 조당 11명씩 이루어 1조, 2조로 나누었다.
Q5. 육탄특공대에 차출 되셨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대전차공격에 대해 따로 교육을 받았었나요?
그 당시 연대장께서 우리들을 집결 시켜놓더니 훈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탱크를 파괴할 특공 자원자를 받더군요. 그때 순간 저는 가슴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바로 연대장 앞으로 달려 나갔죠. 그렇게해서 선출된 20여 명은 교실 안으로 들어가 박준수 중위한테 탱크를 파괴하는 교육을 받게 되는데, 칠판에 탱크를 그려놓고는 약점과 단점에 대해 가르쳐 주었지요. 그리고 유언장을 쓰고, 손톱, 머리카락을 잘라 봉투 속에 넣은 뒤 우리들은 고향 쪽을 바라보며 하직인사를 했는데… 그때 흘렸던 눈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저는 2조로 선출되었는데, 2조는 말고개 부근의 도로에서 잠복해 있다가 만약 1조가 탱크 파괴에 실패할 경우 그 즉시 우리 2조가 투입되어 파괴하는 것이었어요. 1조의 경우에는 조달진이가 제일 선임이라 지휘를 했죠.
대전차 공격조로 선출되었던 특공대 22명은 일 인당 81mm 박격포탄 1발과 수류탄 2발을 지급 받은 뒤 홍천국민학교를 출발하여 이날 22시에 홍천말고개로 도착하였다. 이후 특공대원들은 2인 1조가 되어 말고개의 굴곡지점마다 10~20m 간격으로 나누어 배치되었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9시, 북한군 12사단은 10대의 SU-76자주포로서 말고개를 돌파하려고 했다. 이때 북한군들은 자주포와 보병 간에 분리된 채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 무렵 6사단 2연대 대전차포중대 소속이었던 김학두 일등중사가 57mm 대전차포로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1번 자주포와 2번 자주포를 향해 3발의 철갑탄 사격을 가하자 선두 자주포가 잠시 멈춰 섰다. 그러자 특공 1조의 지휘를 맡았던 조달진 일병이 이틈을 이용해 자주포를 향해 과감히 돌격하여 선두에 있던 자주포를 파괴하자 후미에 있던 자주포 대열들이 말고개에서 오가지도 못한 채 묶이게 되었으며, 이에 또 다른 특공대원이 세 번째 자주포를 향해 돌격함으로써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말고개 부근에서 매복한 2연대 병력들과 19연대 병력들이 합동으로 공격을 전개해 자주포 승무원들을 사살하였다. 이 결과 자주포 10대를 노획 및 파괴하고, 승무원 4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