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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0469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2-07-10
목차
작가의 말
수혈
길 위에서 길을 묻다
계단 위의 무덤
사필귀정
자화상
골격
적응
울타리
이식
뒤안길
해바라기의 기도
그루터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수혈
장마 중이라 대지는 더 풋풋했다. 추적추적 이어지던 장마가 소강상태라 무료함을 달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산소로 향하던 복자가 몰던 승용차는 그 옛날 어린 시절을 가족과 함께 살았던 등촌 마을로 진입했다. 4대강 사업으로 사라져버린 마을, 휑하니 빈 마을 일대가 을씨년스럽다. 복자의 기억에는 마을을 중심으로 강 유역 일대가 사시사철 먹거리로 풍성했다. 이미 가을부터 보리와 밀을 파종한 덕에 강 유역도 들판 못잖게 겨울에도 온통 파랬다. 파종한 종자가 발아하여 유묘기에서 성장기를 지날 때 즈음이면 서릿발로 인해 착근이 어려워 생산량이 줄어들 우려로, 대부분 착근을 도와주기 위해 보리밟기를 해 준다. 자칫 농한기에 하릴없이 마을 사랑방에 모여서 화투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들을 유발하는 시기라, 보리밟기는 매우 생산적인 활동이다. 농부들의 옴츠렸던 근육을 풀어줄 겸 봄에 거둬드릴 농사를 더 풍성하게 해 주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복자가 과거와 현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화려했던 복자네의 옛 집터를 지키던 울창한 거목 플라타너스 세 그루가 옛 주인의 방문을 반겨 주는 듯, 마침 지나가던 바람결에 우수수 빗방울을 털어내고 있었다. 둑 높이만큼 흙을 쌓아 올려 평지로 만든 집터 때문에 연례행사처럼 치르던 홍수의 범람에서도 안전했던 그때의 위세당당 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복자는 거목으로 자란 플라타너스를 차례로 둘러보다가 제일 안쪽 나무에 도달하자 짐작되는 곳의 우거진 잡초를 헤치기 시작했다.
4대강 사업장으로 전 마을이 다 수용되었지만 유일하게 둑 높이와 동일했던 복자네 집터만은 그 대상지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오빠까지 없는 외딴곳에서 올케 혼자 살 수 없다며 자투리땅을 수용하라며 건의한 결과에 따라 나온 보상비로 면 소재지에 아파트를 샀다. 올케가 아파트로 이사 갈 때 가족들의 의견일치로 나무 아래 일부러 아궁이를 만들어 걸어두기로 했던, 낡은 가마솥의 근황이 가끔은 궁금했었다. 잡초가 덮고 있어서 얼른 보아서는 솥이 걸려있는지 잘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곧 그 옛날 화려했던 가문의 역사를 간직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녹이 잔뜩 쓴 가마솥이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복자가 세상에 태어나 기억하는 날부터 줄곧 사랑방 부엌에서 쇠죽을 끓였고, 김장철이면 따뜻한 물을 끓여서 언 손을 녹여주기도 했다. 거기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장을 담그는 날이면 메주콩을 삶거나 명절이 돌아오면 가족들의 목욕물을 데워주었던 귀한 가마솥이다. 복자의 시선이 그 가마솥에 닿는 순간 생각지도 않았던 그 날의 일이 되살아 날줄이야. 아버지를 잃었던 그날의 아픈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 왜 이렇게 허전하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만 마을 친구들과 어울려 앞서거니 뒤서거니 왁자지껄했다. 특별히 긴 장마의 끝에 홍수까지 범람한 이유로 학교 수업을 일찍 끝내주었다. 복자와 양숙 그리고 철수는 차만 마을 친구들과 하굣길에 함께 어울려 산으로 올라가 산딸기 따 먹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차만 마을 친구들 네 명을 제각기 차례차례 자기 집으로 배웅을 한 복자와 양숙 그리고 철수는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등촌 마을로 향했다.
복자는 비로소 줄곧 이어지던 흥이 식어졌다는 사실에 아직 적응하지 못해 서먹했다. 철수는 같은 또래의 남자친구와 헤어지자 같은 마을에 살지만 복자와 양숙과 어울리기가 멋쩍은지 잰걸음으로 벌써 한참을 앞서가고 있었다. 복자와 양숙도 무작정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와중에도 철수와의 거리가 더는 멀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걸음을 부지런히 옮기던 복자는 저만치 눈 앞에 펼쳐진 등촌 마을의 동태가 궁금했다. 상상 외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홍수의 범람으로 마을 사람들이 짐을 옮길 경우라면 자신의 집만이 아니라 둑 전체일 것인데, ㅤㅇㅙㄹ까?
복자는 즉시 잰걸음으로 둑 아래로 쪼르르 내려가 홍수의 정도를 살폈다. 등교 때만 해도 계속해서 성큼성큼 홍수가 둑을 향해 올라오는 속도가 보일 정도였다. 지금은 얼른 보아 홍수가 5㎝는 충분히 더 줄어들었다. 하늘을 봐도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짐을 옮길 필요도 없지만, 만약 짐을 옮길 경우라 해도 마을 사람들이 둑 아랫마을로 내려갔다가 올라오기를 계속할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홍수 때문이라면 짐을 나르느라 모여 있지 못할 건데? 왜 하필 복자 너희 집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지?”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어.”
복자는 양숙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거기다가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굿하는 소리가 선명해 지면서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친구들과 정신없이 노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는 죄책감이 들면서 자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집에 무슨 변고가 생긴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복자, 니, 와 이렇케 늦게 오냐! 니 아부지가… 아이다. 어서 가봐라!”
마침 마주 보고 오던 마을 입구에 사는 아주머니가 복자를 보고 질책을 하다 말고 둑 아래 자기 집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복자는 아주머니의 언행으로 보아 아버지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게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복자는 얼른 오늘 등교 전에 아버지가 손수 연필까지 깎아주던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떠올리며 불길함을 지우려 도리질을 했다. 그럼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마을 아주머니의 말을 되씹으면서 생길만한 사건에 대해 아는 대로 떠올려 보았지만 짐작되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봐도 홍수의 범람보다 아버지에게 닥친 재앙이 훨씬 더 크다는 건 확실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민들이 한 집에 다 모여 있겠는가. 거기다가 굿을 할 정도면 보통 심각한 사태가 아닐 것이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굿을 하려면 어머니가 날짜를 잡고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한 연후에 그것도 낮일을 다 마치고 난 저녁에 하는 게 관례였다. 이런 관례를 무시한 채 굿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위급사항을 알리는 신호가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