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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71717354
· 쪽수 : 104쪽
· 출판일 : 2025-03-19
책 소개
목차
아빠 소설
작가의 말
이연숙 작가 인터뷰
저자소개
책속에서
'왠지 지금이라면 쓸 수 있을 것 같아. 완전 가능. 지금까지 쓴 건 다 엎자.'
엘릭은 마감일이 이미 훌쩍 지났지만 절반 이상 쓰지 못한 원고를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망할 놈의 원고 때문에 지난 일주일간 집 반경 2킬로미터 이상을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고 집 근처 카페에서 미팅을 하고 최소한의 걷기를 위해 산책을 하는 것 빼고는 전부 다 사치였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태 마감이 아무리 늦어도 진심으로 화낸 적 없던 사람 좋은 편집자는 며칠 전 결국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바쁘신 건 알지만 저희 쪽에서도 이 이상 일정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문장은 온점이 찍히지도 않은 채 왔다. 알다시피 온점은 인내심의 반영이다. 온점을 찍지 않았다는 건 너 같은 새끼를 참아줄 여유가 점점 바닥나고 있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여자가 아닌 다른 성별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푸고를 만나는 '사건'이 생겼고 엘릭은 30대가 되어서야 성정체성에 뒤늦은 혼란을 겪었다. 레즈비언 정체성은 엘릭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해서 당장 살림살이를 모두 싸 들고 나와 이성애자 동네로 이사 갈 수는 없었다. 갑자기 이성애자 동네에서 이성애자 섹스를 하고 이성애자 식사를 하고 이성애자 언어로 말할 수는 없었다. 엘릭은 그제야 정체성이라는 건 연애 상대의 성별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걸-그렇게 '퀴어 이론'을 읽었는데도-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릭은 말이 나온 김에 약간 식은 홍차를 홀짝이며 막 떠오른 소설의 줄거리를
푸고에게 써서 보내기로 했다.
엘릭: 무슨 내용으로 쓸지는 일단 다 정했음
엘릭: 그니까 내가 아빠에 대한 소설을 쓰기 전에 렌이랑 너랑 엄마하고 대화를 하는 내용인 거야
엘릭: 근데 이제 아빠가 갑자기 귀신이 돼서 등장함
엘릭: 아빠랑 무규칙 격투기 함
엘릭: 내가 아빠 이김
엘릭: 아빠 죽음
엘릭: 어때
엘릭: ?
엘릭은 연쇄적으로 메시지를 보내면서 혼자 피식거렸다. '아니 이런 거, 진짜 전혀
안 읽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