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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찬가

카탈루냐 찬가

조지 오웰 (지은이), 김옥수 (옮긴이)
  |  
비꽃
2017-03-15
  |  
9,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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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찬가

책 정보

· 제목 : 카탈루냐 찬가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91185393308
· 쪽수 : 288쪽

책 소개

비꽃 세계 고전문학 10권. <1984>가 ‘디스토피아 3대 걸작’ 가운데 하나라면, <카탈루냐 찬가>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 <중국의 붉은 별>과 더불어 ‘르포문학 3대 걸작’ 가운데 하나다.

목차

본문
작품해설
조지 오웰 연보

저자소개

조지 오웰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정치적 글쓰기로 20세기 문학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작가이자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작가. 조지 오웰은 간명한 문체로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으며 사회주의자이자 반파시스트주의자로서 치열하게 글을 쓴 소설가이자 언론인, 비평가다.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로 1903년 6월 25일 영국령 인도의 벵골주 모티하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영국으로 돌아와 명문 기숙학교 세인트 시프리언스를 거쳐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이튼 스쿨에 장학생으로 진학한다.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버마에서 5년간 제국 경찰로 근무했으나 영국 제국주의의 실체에 환멸을 느끼고 사직한다. 이 시절의 경험이 『버마의 나날』(1934)에 잘 녹아 있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파리와 런던에서 빈민과 노숙자들의 생활을 몸소 체험하며 첫 작품 『파리와 런던의 부랑자』(1933)를 쓰고,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다. 이후 『신부의 딸』(1935)과 『엽란을 날려라』(1936) 등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원하여 스페인 통합노동당 의용군으로 싸웠다. 이때의 경험을 『카탈루냐 찬가(Homage to Catalonia)』(1938)에 담았고, 이때부터 조지 오웰은 정치적인 성향이 짙은 작가로 알려지게 된다. 1938년 폐결핵을 진단받고 모로코에서 요양을 했으며, 건강을 회복한 후 『숨 쉴 곳을 찾아서』(1939)를 출간한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1941년 영국 BBC에 입사하여 2년 동안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다. 1945년 러시아 혁명 과정을 풍자한 정치 우화 『동물농장』을 출간했으며, 이 책으로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다. 1946년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주라 섬에 머물며 집필에만 전념하였고 인간의 본성을 위협하는 전체주의를 비판한 또 다른 걸작인 『1984』(1949)를 완성했다.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1950년 1월 21일 4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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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수 (옮긴이)    정보 더보기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임프리마 코리아’ 영미권 부장과 도서출판 ‘사람과 책’에서 편집부장을 지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파운데이 션』,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마음이 머무는 곳』, 『내가 처음 만난 셰익스피어』, 『천상의 예언』,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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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현상은 파시스트 탈주병이 전선을 넘어와, 감시병이 알쿠비에레로 데려오는 것이다. 이쪽 전선 맞은편 병사는 파시스트라기보다 전쟁이 발발한 시점에 병역의무 기간이 겹치는 불행에 시달리다가 탈영할 기회만 엿보는 징집병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몇 명이 모여서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위험을 감수할 때가 잦았다. 파시스트 지역에 사는 가족만 없다면 더 많은 병사가 우리 쪽으로 넘어왔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탈영한 병사가 내가 목격한 첫 번째 ‘진짜’ 파시스트였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바지가 카키색이라는 게 유일한 차이였다. 우리 쪽으로 데려올 때마다 그들은 하나같이 굶어 죽기 직전이었다. 사람이 하나도 없는 중립지대를 하루 이틀씩 피해 다녔으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데,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쪽에서는 파시스트 군대가 굶주린다는 증거라고 의기양양하게 떠벌렸다.
나는 탈주병 가운데 하나가 농가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 안타까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커다란 청년이 살갗은 바람에 상할 대로 상하고 군복은 넝마에 가까운 행색으로 불가에 쭈그려 앉아서 절박한 표정으로 스튜를 접시째 들이마시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두 눈은 주위를 동그랗게 에워싼 채 가만히 지켜보는 민병대를 초조하게 흘끔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우리가 피에 굶주린 <빨갱이>라서 자신이 식사만 마치면 곧바로 총살할 거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를 데려온 감시병은 그 어깨를 계속 도닥이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탈영병 열다섯 명이 한꺼번에 몰려온 기념비적인 날도 있었다. 그들은 백마에 올라탄 감시병이 인솔하는 가운데 마을 전체를 의기양양하게 돌았다. 나는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초점이 안 맞아서 희미하게 나온 사진인데, 나중에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민병대 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장교와 사병이 동등하다는 사상이다. 장군에서 사병까지 모두 똑같은 보수를 받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완전히 평등한 상태로 함께 뒤섞이며 생활했다. 사단을 지휘하는 장군에게 등을 톡 치면서 담배 한 대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되는데, 그걸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론적으로 민병대원 각자는 계급 체계가 아니라 민주주의 원칙에 따랐다. 명령에 복종한다는 공감대는 있지만, 명령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동지가 동지에게 하는 거였다. 장교도 있고 부사관도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군대 계급은 아니었다. 계급 명칭도, 계급장도, 뒤꿈치를 찰싹 붙이는 경례도 없었다. 민병대에서 계급 없는 사회 모델을 일시나마 만들려고 했던 거다. 물론 완벽하게 평등한 건 아니지만, 내가 그때까지 목격하거나 전시에 생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가까이 접근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전선에서 너무 무질서한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끔찍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군대를 가지고 전쟁에서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당시에는 모두가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은 맞는 말이면서 동시에 부당한 말이기도 했다. 다양한 여건상 민병대는 어차피 그 수준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식 기계화 부대는 땅에서 갑자기 솟아나는 게 아니다. 인민전선 정부가 제대로 훈련된 군대를 준비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프랑코에게 아무런 저항도 못 한 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민병대를 비난하는 게 유행으로 변하고, 훈련도 부족하고 무기도 부족한 건 평등한 군 체계 때문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도 나왔다. 하지만 새로 모병한 민병대가 오합지졸인 건 장교가 사병을 “동지”라고 불러서가 아니라, 신병 부대는 어디나 오합지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규율은 흔히 예상하는 이상으로 믿음직하다. 노동자 군대에서 규율은 원칙적으로 자발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혁명 정신에 근거해서 움직이지만, 부르주아 징집병은 궁극적으로 공포에 근거해서 움직인다. (민병대를 대체한 인민군은 두 가지 유형에서 중간이다.) 민병대는 일반 군대에서 일상 일어나는 기합이나 학대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군법회의나 징계는 있지만, 극히 심각한 범죄에 한정했다. 병사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처벌하는 대신, 동지애로 호소했다. 사람을 다룬 경험이 없고 냉소주의만 가득한 사람이라면 이런 방식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단번에 말하겠지만, 실제로 그런 방법은 장기적으로 볼 때 “효과”가 확실하다. 아무리 엉망진창이던 민병대 신병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규율은 눈에 띄게 나아졌으니 말이다.


부대가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하사로 ? ‘카보’로 ? 승진해, 보초 열두 명을 지휘했다. 쉬운 업무가 아닌데, 처음에는 특히 심했다. <센투리아>는 훈련을 조금도 못 받은 오합지졸로 대부분 십 대 청소년이었다. 민병대 여기저기에서 열한 살이나 열두 살짜리 어린애도 툭하면 마주치는데, 파시스트 지역에서 피신해 가장 손쉽게 먹고사는 방법으로 민병대에 입대한 아이들이다. 후방에서 쉬운 일을 맡는 게 보통이지만 교묘하게 빌붙어서 전선까지 오는 사례도 가끔 있으니, 이들은 전선에서 정말 커다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조그만 녀석이 “장난삼아서” 참호 모닥불에 수류탄을 던진 기억도 난다.
포세로 산에는 열다섯 살 이하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평균 연령은 스무 살을 한참 밑도는 게 분명하다. 이런 어린애는 전선에 보내면 절대 안 된다. 참호전에서는 잠이 항상 모자랄 수밖에 없는데, 어린애는 그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밤에 진지에서 보초를 제대로 세울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분대에 속한 아이들은 가련하게도 발을 잡고 참호 밖으로 질질 끌어내야 잠에서 겨우 깨어나다, 지휘관이 등을 돌리는 순간에 위치에서 벗어나 잠잘 곳으로 찾아들거나, 끔찍하게 추운 날씨에도 참호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잠들기 일쑤였다. 적군에게 모험심이 많지 않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보이스카우트 스무 명이 공기총으로 무장하고 달려들어도, 아니, 걸스카우트 스무 명이 빨랫방망이만 들고 달려들어도 우리 진지를 단숨에 휩쓸어버릴 거란 생각이 밤마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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