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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86561195
· 쪽수 : 152쪽
· 출판일 : 2016-04-25
책 소개
목차
13 forest 01 숲을 여행하는 다섯 가지 방법
14 삼성혈 - 모든 제주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24 비자림 - 비자림, 그 숨소리와 숲소리
34 사려니숲 - 사려니숲길, 물길을 걷다
42 절물자연휴양림 - 엄마, 우리 삼나무 숲길로 가자
50 화순곶자왈 생태탐방숲길 - 나는 숲에서 처음 네 뒷모습을 보았다
60 forest 02 우리 함께 걷다, 곶자왈 산책 | 김민채
68 forest 03 숲을 안다는 것에 대하여 | 숲 해설가 이지영
74 forest 04 사려니숲 식물 일지
86 forest 05 숲 트래킹 준비하기
88 forest 06 숲을 걷는 마음가짐
90 forest 07 당신을 잊지 않기 위해 거꾸로 걷는다 - 나희덕 읽기 | 김민채
94 forest 08 숲길 | 이수영
100 forest 09 바다에서 숲까지 - 평대리
116 forest 10 모래와 게와 밤이 있는 풍경 | 박연준
124 forest 11 제주에서 대문이 없다는 것 | 강병한
128 forest 12 나의 첫번째 숲 | 김호도
134 forest 13 제주, 여름 | 예다은
저자소개
책속에서
동쪽 해안에서 700번 동일주 노선을 타고 삼성혈을 향해 가는 길. 일단 동문시장에서 내려 시장을 구경하고 삼성혈로 갈 작정이다. 여러 번 와봤던 동쪽 해안이지만, 나는 여행자라는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이따금 창밖을 살피고, 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정류장 이름을 확인한다. 길을 잃기 쉽고 당황하기도 쉬운 나는, 여행자니까. 그러나 애써 그 긴장감을 들키지 않으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창밖을 내다보는 나는, 여행자다.
겨울에도 잎을 쏟아내지 않는다는 비자나무에게 계절이란 무엇일까. 그들이 견뎌온 시간을 생각한다. 계절의 흐름에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 그들도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여름이 가을이 되고 또 봄이 되어 싱그럽게 푸른 날들이 몇 번이고 돌아오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비가 떨어지는 날에도, 햇살이 찌르는 날에도 늘 그 푸름을 지켜내는 비자림에서 나는 신기하게도 계절을 읽는다. 계절의 바람을 느낀다. 나무들은 그런 나를 보며 시간을 엿보리라. 세월을 가늠해보리라. 여름의 나와 겨울의 나를 보며 비자나무는 그렇게 계절을 읽어낼 것이다.
적당한 습기와 나무 사이를 흐르는 차분한 바람. 더운 여름이다. 갑갑한 도시의 여름에 숨이 턱 차오를 때 즈음 훌쩍 도망오기 좋은 곳. 그곳이 제주이고, 제주의 숲이다. 사람의 발걸음을 반기는 푹신한 흙길과 새소리가 숲길을 따라 바람이 되어 흐르는 곳. 빗물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숲은 습기를 충분히 먹고 있다. 그것은 도시의 답답한 습기와는 달랐다. 그 습기는 아주 낯선, 숲만의 것이었지만 결코 살갗을 괴롭히는 그런 종류의 습함이 아니었다. 그렇게 붉은 길을 따라, 습기를 머금은 숲길을 걸었다.
숲은 이 시간을 기억해줄 것인가. 나와 그 사람이 함께 걷는 이 시간을. 내 몸을 감싸던 숲의 편안한 습기를 우리는 온몸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의 숨과 숲의 공기가 어우러지던 그 시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꿉꿉하게 습한 게 아니라 맑은 공기로 습해서 좋은 거 같아.” 옆에 있던 그 사람이 내게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다. 열병. 한 사람이 내 몸 안에 들어왔다 나가는 것. 나는 그것을 열병이라 생각해왔다. 손톱, 피부 결, 머리칼. 온통 그 사람이 배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온몸이 타오르는 것이다. 내 몸 안에 살았으니까. 구석구석 스친 자리뿐이니까. 숲을 기억하는 내 몸의 방식도 아마 그럴 것이다. 온몸으로 느낀 숲의 습기가 내 몸에서 배어날 것이며, 그로써 기억될 것이다. 몸으로 기억될 장소를 누군가와 걷는 일. 그것은 아스라한 일이고 아픈 일이다.
바람 소리, 바람 소리에도 물기가 차 있다. 저 새들의 소리에도 물이 배어난다. 신기한 일이다. 더운 여름날 이렇게 눅눅하지 않은 물기를 숲 속에서 만나다니. 안개비가 어슴푸레하게 낀 사려니숲길. 이곳에 오기 전 정방폭포의 물을 흠뻑 묻히고 달려왔거늘, 숲으로까지 그 물빛이 이어진다. 숲길, 아니 물길을 걷는 듯하다. 물기가 드리워진 숲의 그늘이 여름을 달랜다. 내 몸은 그렇게 이곳의 습기를 기억할 것이다. 완만한 흙길을 걷고 또 걸어 온몸으로 기억될 장소, 제주의 사려니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