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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9171292
· 쪽수 : 464쪽
· 출판일 : 2020-07-23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제1부 장편소설
불울음
제2부 중.단편소설
어느 똥개의 여름
邂逅(해후)
첫눈
겨울일기
실종
난파선
개 짖는 소리
서울, 2000년 가을
선택
젠틀맨
작품 해설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저자소개
책속에서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아니에요, 아직은…… 단지…… 내 마음이 옹졸한 탓이에요.”
나의 추궁하는 눈길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그녀는 돌아서버렸다.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다가가 그녀의 떨고 있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 내 흥분도 아직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어. 명희 아버님의 말씀처럼 이곳 방문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는 건데…….”
그녀의 떨림과 그만큼의 체온이 내 가슴으로 전해져 왔다.
그렇다. 피해자의 가해자에 대한 관용은 선악의 분별에 의한 것이기 보다 단순한 심정적 여유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쉽다. 그러므로 그런 관용이 가해자의 죄에 대한 용서가 될 수는 없다. 용서란 어쩌면 가해자가 떠맡긴 피해자의 거북살스런 짐일 수도 있다. 용서한다고 말한다는 것이, 용서한다고 마음먹는 것이, 어찌 저질러진 죄를 말소시킬 수 있단 말인가. 흘러간 시간을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화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 불화에 대한 망각의 다짐에 불과하며 새로운 불화를 잉태시킬지라도 어쨌든 하나의 시작을 약속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화해의 선언으로 곧장 이전의 믿음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 깨어진 것은 깨어진 대로 버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진정한 용서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영역이다. 지상에 있다면 오직 용서받으려는 자만이 있을 수 있다. 실로 신만이 완전한 용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화해, 곧 망각의 다짐과 새 출발의 약속뿐이다.
“진정해 내가 괜히 고집을 부렸어. 하지만 책임 질 당사자들은 다 떠나 버리고 이렇게 떠맡아야 할 책임만이 남아 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겠어? 이럴 때 용서라든가 화해라든가 그런 낱말의 뜻이나 따지고 있어야 하겠어?"
“아버지.”
참으로 오랜만에 내 입으로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그 소리는 분명 내 음성이었지만 벽 속에서라도 울려나오는 것처럼 생소했다. 아직 코흘리개였을 때 그렇게 불렀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아버지 역시 손님과 마주앉은 것처럼 나와의 이런 대면을 꽤 어색해 하는 눈치였다.
“꼭 해주셔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
“꼭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니까?”
“홍판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순간, 아버지는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이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자리를 고쳐 앉으며 한숨에 실어 이렇게 말했다.
“아다마다, 이 땅의 전 주인이었지.”
“그럼 홍판재라는 사람도 아시겠군요?”
“그 사람은 홍판술이 동생이다.”
“홍윤우씨는요?”
“홍판재 아들이다. 대체, 무얼 알고 싶은 게냐?”
아버지는 나의 당돌한 질문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고 있었지만 이 뜻밖의 사태에 매우 당황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무겁게 늘어진 눈꺼풀에 경련이 일고 있는 게 보였다.
이런 사연을 듣고 있자니 강하게 짚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전하려고 들고 온 그의 유품 봉투에서 안마시술소 영수증을 빼내 안주머니에 넣었다. 왠지 이것만은 그가 양부모에게 전해지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김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소주 한 병 살 테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긋한 겉과 달리 속은 험악하기 짝이 없을 터라, 안마 받을 손님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캐묻다가 소득 없이 쫓겨나든지 더 나쁘면 빈 방으로 끌려가 봉변당하기 십상일 것 같아서였다.
역삼동 술집 골목 뒤편에 들어앉은 파라다이스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허름했다. 저녁 7시라 아직 한산한 편이었다. 김 형사에게 이번 프로젝트 성공하면 진짜 안마 한번 쏘겠다며 옆구리를 찔렀다. 중년 사내 둘이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았던 여자가 반색했다. 김 형사가 카운터에 팔꿈치를 걸치고 기대서며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니고 뭣 좀 물어보려고 왔는데.”
여자는 금세 얼굴색을 바꾸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디서, 오셨어요?”
김 형사가 지갑을 꺼내 슬쩍 펴보였다. 여자가 잠깐만요 하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아아, 단속 나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그냥 몇 가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주면 돼요.”
여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영수증을 꺼내 펼쳐놓자 여자는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이게 왜요?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발행 날짜들을 짚으며 혹시 이 영수증을 끊어 준 손님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키 크고 얼굴 검은 아저씨 말이죠. 여자는 기억했다. 기억할 뿐만 아니라 자세한 얘기는 그 손님을 모셨던 하 양에게 들으라면서 휴대폰으로 불러냈다. 하 양이 곧 카운터로 나왔다. 여자가 우리를 카운터 뒤편의 내실로 안내하고 차를 가져왔다. 하 양은 눈치를 살피면서 좀체 입을 열지 않았다. 손님에 대한 비밀은 무덤까지 가슴에 담고 가겠다는 것이 자신의 신조라며 버텼다. 할 수 없이 김 형사가 그의 죽음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