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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심리학/정신분석학 > 정신분석학
· ISBN : 9791189327385
· 쪽수 : 528쪽
· 출판일 : 2024-11-15
책 소개
목차
추천의 말
작가의 말
프롤로그
1부 남은 건 지지직거리는 소음뿐
2부 고통. 엄청나게 많은, 빌어먹을 고통
3부 과거는 밤이면 우리를 굽어본다
4부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어요
5부 괴물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춤을 춘다
감사의 말
미주
리뷰
책속에서
“하늘이 무너지거든 이불 삼아 덮어라.” 앤티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큰일은 쪼개 작은 일로 만들고, 작은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거라. 누가 너한테 잘못을 하거든 절대 가슴에 묻어두지 말고 잊어버리려무나.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으려무나. 고통은 삼켜야 한다.”
나는 건성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낮잠에서 깬 사촌들과 함께 놀려고 달려갈 때 잠옷을 입은 늙은 조상들의 흑백사진 같은 기억이며 그분들의 우스꽝스러운 말씀은 기억 속 저편으로 흐릿해지고 말았다. 그 시절 나는 앤티가 나에게 내 근원이 어디인지 알려주려 하는 거라 여겼다. 맥도날드 음식을 먹는 미국인 자아가 조금이라도 더 중국인으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시절 나는 앤티의 말씀 속에 숨겨진 동기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지혜들을 전해주려는 동기 말이다.
나와 대화를 나눈 모두가 자신의 부모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강조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었고, 크나큰 난관을 극복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그저, 금욕적인 사람들일 뿐이었다. 불안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말 없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래요.” 나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것들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러면 상대는 나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에요? 아시아인이잖아요. 당연하죠.
“그렇죠, 당연히 그래요. 제 말은, 혹시 부모님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경험했는지 알고 계신가요?”
처음에 그들은 그렇게 심각한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트라우마란 거창한 단어다. 그들은 내 질문을 웃어넘겼다. 나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은 음, 하면서 방 한구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생각나는 게 있기는 해요. 부모님이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는 일이었죠.
그렇게 고백의 시간이 다가왔다. 수많은 고백.
맞은편에 있던 양복 입은 남자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는 듯 말없이 노트북 컴퓨터를 챙겨서 게이트 반대편 끝으로 자리를 옮긴다. 상관없다. 온 세상이 다 보라지. 다 들으라지. 말해. 큰 소리로 말하란 말이야. 아무리 아픈 말이더라도 진실을 말해.
하지만 아버지는 늘 하던 불평을 털어놓을 뿐이다. “넌 늘 옛날 일에만 매달려. 그래서 얻는 게 뭐냐? 시간을 돌려서 널 행복하게 해주고, 네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길 바라냐? 넌 지난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어서 미래는 못 보는구나.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물론, 그렇지 않다. 과거는 늘 이 자리, 우리 집을 떠돌며, 밤이면 우리를 굽어본다. 유령은 우리가 못 본 척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유령과 직접 맞서야 한다는 소리다. 여기는 우리 집이라고, 너는 이곳에서 더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들 그 무엇도 잘못되지 않은 척 시선만 피하는 거실에서 온 힘을 다해 고래고래 소리치는 건 나 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