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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91190427876
· 쪽수 : 104쪽
책 소개
목차
조용한 비
옮긴이의 말
책속에서
눈은 그쳤지만 바람이 차가워서 귀와 코가 아팠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고개를 움츠려 바람을 견뎠다. 붕어빵이 구워지기를 기다리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두서없이 생각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얇은 종이로 싼 붕어빵을 받고 동전을 세어 건넸다. 막 구워져 나온 붕어빵은 얇은 종이 너머로도 뜨거웠다. 얼어붙은 양손으로 감쌌다. 집에 가면서 먹기로 하고 가게 앞을 떠났다. 한 입 먹고 나는 어라, 하고 멈춰 섰다. 맛있다. 다시 한 입 먹었다. 뭐야, 이거 맛있잖아, 그것도 엄청. 나는 가게로 돌아가 닫힌 창문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유리 너머에서 철판을 닦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맛있어요.”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이래서야 유아 수준이다. 두 살배기의 어휘다. 그래도 여자는 검은자위가 큼지막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을 발갛게 붉히더니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고요미 씨의 기억이 전혀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평범하게 대화하고 평범하게 밥을 먹고 평범하게 잔다, 그 정도라면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잠이 들면 그날의 기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고를 당하기 전날로 기억이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서 본 푸른 하늘도, 낮에 친구와 만나 왁자지껄하게 웃은 일도 밤에 내게 말해주었지만,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고요미 씨에게서 술술 흘러가는 나날이 내게만 쌓여갔다. 고요미 씨는 다른 사람들이 올라가는 계단을 한 계단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혼자 둘 수는 없었다. 누가 조금만 배려해서 도와주면 될 텐데, 그걸 대체 누가 하지? 내가 그 역할을 맡아도 될까?
누나의 팔 안에서 잠든 어린 인간의 가슴이 미미하게 들썩이는 것을 보고 나는 덧없다고 생각했다. 덧없고 어설프지만 그래도 또렷하게 숨을 쉬며 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고요미 씨도 이 작은 인간처럼 안심하고 하루하루 새롭게 살면 된다. 고요미 씨 안에 남지 않아도 내 안에 남겨두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내가 잠자코 있자 누나가 말했다.
“망설여진다면 더 나아가지 않는 게 좋아.”
아아, 오늘 누나는 이 말 한 마디를 하려고 우리 집에 온 것이었다.
나는 두 잔째 커피를 누나의 컵에 따르며 누나답지 않다고 말하며 웃었다. 망설여진다면 일단 나아가는 거 아니었어?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다. 우리 남매뿐만이 아니다. 우리 세대는 모두 ‘안 하고 후회하기보다 하고서 후회하는 편이 낫다’, ‘원하는 것은 전부 가져라’, 그리고 ‘망설일 여유가 있으면 나아가라’라고 주입식 교육을 받았다.
그런 건 건강할 때나 유효한 말이지. 정말 망설여질 때는 나아가고 싶어도 어디가 앞인지 뒤인지도 구분하지 못하잖아. 그러니까 유키, 망설일 정도라면 그만두는 게 나아.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있는 거야.
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확신했다. 내게 망설임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미처 몰랐다. 누나는 대체 언제, 되돌릴 수 없는 후회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