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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중국사 > 중국사 일반
· ISBN : 9791190429269
· 쪽수 : 452쪽
책 소개
목차
제1편 고대 중국의 뼈대
이끄는 말 ‘중국’이란 두 글자는 3천 년 전에 출현했다 10
제1장 강역 _ 중국인이 생활하는 땅
제1절 ‘거대한 구주[大九州]’와 ‘한 자 길이 방망이[一尺之棰]’ 18
제2절 고대 중국은 도대체 얼마나 컸나? 26
제3절 고대 중국의 강역은 어떻게 변화했나? 33
제4절 고대 중앙정부는 어떻게 주요 행정 구역을 나눴나? 42
제2장 도시 _ 몇 차례 변화를 겪은 도성
제1절 한나라의 장안과 낙양 50
제2절 북위 효문제의 천도와 한족화 58
제3절 수·당 시대의 양도 66
제4절 명나라의 양경 병행 75
제3장 건설 _ 토지의 연결과 분리
제1절 장성은 군사 방어용으로만 세운 것이 아니다 83
제2절 식량 공급의 생명선, 운하 91
제3절 고대의 교통 시스템, 치도 99
제4절 부패에 의해 ‘잠식된’ 역참 106
제2편 고대 중국의 혈육
이끄는 말 본적과 출생지: 당신은 어디 사람이오? 116
제4장 이주 _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에 머무나?
제1절 고향은 어디인가? 이주의 출발지 125
제2절 이주민의 영향을 깊게 받은 도성 문화 구조 133
제3절 강호의 남쪽 이주와 오호의 중원 교란 141
제4절 유목 부족의 북방 이주와 흉노의 남하 약탈 149
제5절 고대인은 왜 이주해야 했나? 157
제5장 인구 _ 정책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구수
제1절 고대 중국의 인구는 도대체 얼마였나? 166
제2절 정절 관념과 당나라의 과부 개가 174
제3절 송나라 호구 자료에는 왜 호구당 평균 인구가 3명에 미치지 못했을까? 182
제4절 명나라 호적제도와 10년 뒤 호적부를 미리 편집한 일 189
제6장 인물 _ 인간이 ‘주조’한 시대 현상
제1절 공자: 역대 통치자들이 긍정한 ‘춘추필법’ 198
제2절 복생: 문화의 보호자 겸 계승자 206
제3절 해서: 왜 해서 한 사람만 청백리가 되었나? 214
제4절 왕이: 비정규 막료가 정식 관리를 통솔한 특이한 현상 224
제5절 연영: “위에는 정책이 있고,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 234
제7장 외교 _ “외국인 입국은 허용하면서도 중국인 출국은 불허하고, 중국에 온 외국인에게는 중국 문화를 전하면서도 중국인을 외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지 않은” 고대인
제1절 ‘개방’을 했으면서도 눈앞의 좋은 기회를 놓친 한나라 242
제2절 고대 중국의 대외 영향은 어떠했나? 249
제3절 당나라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었나? 258
제3편 고대 중국의 정신 중추
이끄는 말 영명한 개국 황제는 왜 폭군이 되기도 하나? 268
제8장 천하 _ 천하를 얻음과 천하를 다스림
제1절 호복 입고 말 위에서 활쏘기 그리고 기병 시대 276
제2절 중국 고대의 대규모 학살, 장평 전투 285
제3절 진시황과 표준화 정책 293
제4절 항우는 초·한 쟁패의 실패자인가? 300
제5절 유방이 백성에게 반포한 ‘약법삼장’은 믿을 만한가? 314
제6절 ‘추은령’ 배후의 정치적 지혜 321
제7절 최초로 ‘중앙에서 파견한 순시 제도’ 328
제8절 유수는 어떻게 한나라를 연장할 수 있었나? 335
제9절 조광윤의 송나라는 어떻게 오대를 끝냈나? 347
제10절 송나라 때는 왜 군사 정변이 드물었나? 356
제11절 애산 이후에는 중국이 없는가? 364
제9장 제왕 _ 황제의 사생활
제1절 태자: 가장 결정하기 어려운 황실 구성원 374
제2절 황후: 황제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 382
제3절 태상황: 황궁 안의 ‘유명무실한 직위’ 390
제4절 종실: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산 황실 친척 399
제5절 사후의 일: ‘죽음을 삶처럼 여기는’ 관념의 전승 407
제6절 기록: 역사서의 ‘공식 판본’ 415
맺음말 우리는 중국의 역사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426
옮긴이의 말 436
찾아보기 442
리뷰
책속에서
중국 역사에는 오랜 시간 써왔지만 전혀 현실이 되지 않은 몇 가지 개념이 있는데 아주 유명한 ‘구주(九州)’도 그중 하나다. 유가 경전에 근거한 ‘구주’가 현재 통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 우 임금이 치수에 성공한 뒤 천하를 아홉 주로 나누어 통치에 편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 사료와 고고학적 발견에 근거하여 분석해보면 우 임금이나 그 시대에 ‘구주’가 있었다고 실증할 방법이 없다. 설령 확실하게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시대의 통치자는 그렇게 큰 땅을 직접 통치하거나 관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구주’는 어떤 이념이 반영된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이 범위가 최대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렇게 정했는가? 그렇지 않다. 청나라가 최후에 통일한 강역은 중국 역대 왕조에 비해 확실히 컸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나 부분적으로 보나 청나라보다 더 컸던 왕조는 당나라였다. 당나라 서쪽 끝은 아랄해 연안까지 도달했으므로 청나라 서쪽 경계보다 훨씬 멀었다. 또 예를 들어 한나라 강역에는 오늘날 베트남의 대부분, 한반도 북부와 중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청나라 강역을 선정하면서 탄 선생이 다음과 같이 지적 했다. “한편으로 이 강역은 중국 몇천 년 역사 발전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결코 최대는 아니며, 다른 한편으로 역사상 몇몇 왕조는 통제한 범위가 청나라보다 크기는 했지만 자신의 통치 범위 안에서 유효한 행정 관리를 실행한 것은 오직 청나라뿐이었다.”
전한 초기에는 항상 “봉화가 감천궁(甘泉宮, 산시陝西 춘화현淳化縣 간첸산甘泉山)을 비췄”으므로, 바로 감천궁 일대에 늘 봉화가 오르며 경보가 전해졌다. 흉노족 기병이 남하할 때는 장안에서 겨우 800리 정도까지 접근했고, 이는 기병의 속도로 하루 밤낮이면 바로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안은 도성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위 방어 역량을 강화했고 아울러 시종일관 북쪽과 서북쪽 변방을 굳게 지켰다. 국력이 강성할 때는 이곳에서 거병해 바로 반격 할 수 있었다. 한 무제 시대에는 흉노를 한나라 경계 밖으로 축출하고 진나라 장성을 잇는 경계선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중을 기지로 서북을 개척해 하서주랑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사실이 증명한 바와 같이 장안을 수도로 삼은 유방의 선택은 대외적으로 적을 방어하는 측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