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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0487481
· 쪽수 : 176쪽
· 출판일 : 2020-11-27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05
1부 봄 기다림
글이 고픈 밤이었다 1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11
봄. 봄. 봄날의 일기 13
봄 기다림 19
쉰의 나들이 21
봄 선물 24
지리산 26
피아노 치는 소년 29
뒷모습 32
퀵 37
우리들 39
봄 편지 1 44
봄 편지 2 46
윤숙이도 의사 49
나무날의 손님 51
오데 가요? 53
2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60
2017년 8월의 일기 2 62
아침의 시 63
기다림의 연대기 65
냉장고 파먹기 67
햇볕 보약 71
배앓이 73
고양이로부터 76
매화맞이 77
좋은 글 쓰고 78
삼일절 아침 80
가죽고랑회 동무들 81
3부 돌아가기 돌아오기
정월대보름 이야기 90
세상의 모든 선생님 93
오월의 숙제 1 96
오월의 숙제 2 100
도산집 할배 1 102
도산집 할배 2 104
도산집 할배 3 107
아침 인사 109
봄을 배달합니다 111
돌아가기 돌아오기 115
봄맞이를 하느라 116
씨앗이 필요해요 119
함박꽃이 피었습니다 122
경칩 1 126
경칩 2 128
기억하기 130
4부 건강한 똥
양순 어매 134
태완이 136
유월에 138
염소 아가씨 140
풍경 1 41
대촌 부녀회 142
혜령이 145
대촌 노인회에서 1 148
대촌 노인회에서 2 150
건강한 똥 155
달티 어머니 보셔요 156
메리 크리스마스 159
손 165
아침의 사람들 167
저자소개
책속에서
글이 고픈 밤이었다
두 번 세 번 머리맡의 등을 켜고, 이미 빽빽하게 글을 써 둔 백지의 여백에 굳이 선을 긋고, 무언가가 불러주는 글귀를 받아 옮겨 적었다. 닭이 홰치는 소리, 아랫집의 개 짖는 소리로 눈 뜬 아침. 서너 시간 잤을까. 몇 달을 툇마루에 내어둔 채 방치하여 민들레 홀씨며 송홧가루며 별별 먼지를 뒤집어쓴 앉은뱅이책상을 말끔히 닦아서 방으로 들인다.
글이 쓰이고 글을 쓰고 싶은 어디론가부터 글 줄기가 다 죽어가는 가문 샘을 적시듯 마중물이 되어 오고 있는 아침. 내가 행복해지는 몇 가지 ― 혼자 걷는 것, 꽃과 마주하고, 무슨 풀 뽑는 시늉이나마 호미를 들고 텃밭 아닌 꽃밭에 나앉고, 찻잎을 따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밥상을 차리고 차를 나누고, 아프고 외로운 이를 찾아 함께 하고, 그런 그런 사는 일, 내가 늘상 우선순위에 두고 좋아하고 즐기는 여러 일상의 일 중에도 버겁고도 복된 일, 삶과 사람의 진실 진정성을 글로 그려내는 일 ― 그 일이 이 아침에 간밤에 시작되고 있다.
봄 기다림
친구들이 온다. 나보다 겨우 일 년 혹은 몇 달 먼저 태어난 올해로 육십갑자, 회갑연 맞이한 친구들. 몇 해만에 고향으로 봄나들이를 오는 혜영이, 미자, 미선이, 순점이, 정희. 나는 사나흘 뒷산 오르내리며 진달래 하마나 얼마나 피나 피었나 꽃송이 세었다.
양지녘 쑥은, 달래, 냉이는? 그러는 사이 뜨락의 키 큰 금목서 아래 꿈결처럼 원추리 싹도 돋았다. 삼월 열이레 엊그제는 첫 살구꽃 피고, 오늘 삼월 스무날 아침에는 뒤란의 대밭에서 휘파람새 소리도 들리었다. 아, 올해도 봄이 오고 이 봄에 우리가 살아 있는 것. 생각만으로도 눈물 난다. 친구들은 하룻밤 묵는 것만도 민폐라고 밥은 밖에서 사먹자 하였지만
‘야들아, 너거는 모리제? 니들 환갑상 생일상 한 끼 밥상 채리줄라꼬 솥뚜껑 운전 삼십삼 년에도 여직 프로살림꾼이 되지 못한 요량머리 없는 귀자가 열흘 보름내 궁리만으로도 이러저러 너거 맞이할 마음만으로도 이따만큼 설레는 거…. 걱정 붙들어 매거라. 돈 들이지도, 애쓰지도 않는다. 생일상, 환갑상 머 별 것가? 된장찌개에 냉이, 달래, 원추리 무침에 쑥비짐떡에 진달래 꽃부침, 거기다가 광도막걸리 한 사발이모 환상이지.
친구들아 고맙다. 마음 가는 데 시간이 가고 돈도 가는 것인데 이 바쁜 세상에 너거들이 돈보다 귀한 시간을 내고 마음을 내어서 고향으로 나에게로 와 준다니, 나도 기꺼이 즐겁게 마음을 내고 시간을 내어서 토방에 군불 지피고 한 끼 봄 밥상을 차리마. 그렇게 우리 만나자. 놀자.’
아, 내일이면 내 친구들이 온다!
오데 가요?
돌이 아저씨. 내 산책길, 아침마다 비 오시나 바람 부나 시오년 세월, 그 산책길. 집에 있는 날은 거의 거르지 않고 하는, 갈 때나 올 때나 그 집 지나칠라치면 한 달 치고 스무 번은 요강 비우러 나올 때나, 기침하자마자 집 앞 개울가 남새밭 둘러보러 나올 때, 쪼그려 앉아 담배 필 때 마주치면 천날 만날 똑같은 인사를 던졌다.
“오데 가요?”
“산책가지요.”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오데 가는 줄 뻔히 알면서 물었다. 큰소리로
“오데 가요?”
드물게 그 말끝에 너댓 번 붙인 말은
“산돼지 나오요, 업히 가모 우짤라꼬.”
하며 웃은 것이 전부였다. 가래 낀, 그러면서 우렁우렁한 돌이 아저씨 목소리, 그 인사법, 돌이 아저씨만의 아침 인사.
“오데 가요?”
아저씨가 오줌이 누고 싶다며 일어나려 한다. 스스로는 일어나지도 대소변 가리지도 못하면서 본능적으로 똥오줌은 뒷간 가서 당신이 직접 보아야하는 거라고 무의식중에도 의식을 한다.
자그마하고 날랜, 사탕 좋아하는, 꽤 쌀쌀하고 추운 날에도 빨랫감 한 다라이 이고 집 앞 고랑 내려앉아 맨손으로 빨래하는 거 아무렇지도 않은, 틈만 나면 자발자발 무엇이든 하고 남새 캐고 골라서는, 단 묶어서는 장으로 가 돈도 사고, 농사도 적잖은데 일 년에 반은 굴 까러 가 목돈 뭉치는 일에도 빠지지 않는 재빠르고 야무딱진 아내가 다시 한번 낡고 얇은 이불 두 장을 남편 어깻죽지까지 여며 올리며, 방 안에 보따리 보따리 싸놓은 옷을 가리키며 ‘한 번도 안 입은 옷도 있다’며 죽기 전에 좋은 옷 입어 보라꼬, 생뚱맞게 환자한테 입혀둔 마고자를 설명한다.
내가 한동안 돌이아저씨 손등을 손바닥을, 잘려나간 뭉툭하고 짧은 손마디를 만지작거리고 쓰다듬다가, 속엣말로 편히 가셔요 인사하고 일어서 나오자 아들 외진이 다시 말한다. ‘아부지하고 소하고 같이 일치것다’고.
사립문 나서기 전에 괜시리 그 집의 우물을 들여다보고 검정 고무로 만든 두레박으로 물 한 두레박을 퍼 올린다. 그 물로 손을 귀를 씻고 산책길 이어 걷는다.
비 갠 뒤, 사월 아침. 그 사이 일곱 시 되었을라나? 산도 들도 하늘도 싱그럽기가 청명하기가 그지없다. 개울물 세차게 흐르고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시 ?박꽃?에서처럼 ? 그 물소리 뒤로 내 등 뒤로 돌이 아저씨 목소리 따라온다. 아저씨가 내게 묻는다.
“오데 가요?”
오늘사 말고 그 아침 인사를 내가 해야 한다는, 그 질문을 아저씨가 아니라 내가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소리 없이 ‘어디 가요? 아저씨!’ 한 마디 묻는데 불쑥 눈앞이 흐려진다.
사월 아침 . 비 갠 아침. 너무 환하여 눈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