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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책] 칠레에서 일주일을](/img_thumb2/9791191192674.jpg)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1192674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2-08-17
목차
프롤로그 10 칠레에는 왜 가려고 하는데?
첫 번째 행운 21 기억을 다루는 법
두 번째 행운 67 아프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일들
세 번째 행운 93 타인의 가난을 감상하는 불편함
네 번째 행운 147 괜찮아, 잘 될 거야
다섯 번째 행운 171 길 위에서 만난 인연
여섯 번째 행운 197 파타고니아, 아름다움이라는 마약
일곱 번째 행운 235 다시 산티아고
에필로그 270 여행을 다녀와서
저자소개
책속에서
사람들이 물었다. 왜 하필 칠레인데? 그러게. 세상에 나라가 얼마나 많은데. 남미가 가기 쉬운 여행지도 아니고 한국에서 가려면 이동하는 데만 최소한 30시간 이상이 걸리는데 말이다. 이왕 간 김에 페루의 마추픽추며 브라질의 이구아수 폭포며 아르헨티나의 모레노 빙하며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까지 볼 게 얼마나 많은데 콕 집어서 칠레만 돌겠다는 이유가 뭐야? 그런 질문들이 나왔다. 그런데 여행에 남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꼭 찾아야만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냥 가고 싶어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인생에서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꼭 남들이 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해야만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별다른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끌리기도 하듯 그냥 우연히 칠레라는 나라에 끌릴 수도 있는 거다.
그 이상한 생김새에 대해서 칠레의 위대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이렇게 노래한다.
‘아메리카 황무지에서
칠레를 보아라.
파괴된 생물학, 뽑힌 가지,
팔에 달린 손가락뼈가
오가는 폭풍을
분산시키는 것처럼 생긴 칠레’1)
표현 참 시각적이다. ‘파괴된 생물학, 뽑힌 가지, 팔에 달린 손가락뼈가 오가는 폭풍을 분산시키는 것처럼’ 생겼다니. 세계지도에서 깜짝 놀랄 만큼 길쭉하게 생긴 칠레의 모양과 얼마나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묘사인가. 나라의 생김새 말고 그밖에 아는 것도 있을까?
도착한 첫날, 공항에 내려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난감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남들 다 읽는 기본적인 여행 책자를 하나도 읽지 않았다. 그건 사실 의도적인 것이었다. 나는 낯선 환경 속에 갑자기 뚝 떨어져 황당하고 신기한 감정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온몸의 세포가 살아나는 감각 살아남기 위해 머리털까지 팽팽해진다.
사진 속 수많은 눈동자가 앞을 바라보고 있다. 공간을 울리는 조용한 노랫소리, 흐느낌, 과거를 회상하는 떨리는 목소리, 그리움과 기다림과 분노와 기대와 침묵이 뒤섞인 공간을 응시하는 수많은 눈동자들. 나는 의자가 있지만 앉지 못하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사진 속 시선과 눈을 맞춰보려고 애써본다.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일이고 어쩌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가슴이 떨린다. 나는 그들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는 일이 힘들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고, 오래도록 침묵을 강요당하며 살았던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때 그대들은 지금의 현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 나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사는 모습을 보고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소유하지 않지만 친구로. 어쩌면 개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나라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견종 간의 계급도 차별도 없고 호화롭게 살거나 먹지는 않지만 누구도 굶어 죽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길을 공유하고 그들의 친구로 살면서도 소유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개들이라니…… 배고픔이 해결된 자유로운 삶. 누군들 그런 삶을 꿈꾸지 않겠는가.
돌아보니 꽤나 힘든 여행이었다. 당분간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칠레 여행이 나빴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최고의 여행으로 꼽았던 스페인의 순례길보다 더 순례길 같은 여정이었다. 비록 부상으로 가고 싶었던 도시를 다 돌아다니지도 못했고 도전보다는 포기를 배워야 했던 아쉬운 여행이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우리의 역사와 현재를 생각했으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칠레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보였던 ‘깊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