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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민창홍 (지은이)
창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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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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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1751420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3-11-25

책 소개

제1부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에는 「사과」 외 시 14편, 2부 “새가 모이는 나무”에는 「단감나무 묘목」 외 시 14편, 3부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에는 시 「문-마스크·1」 외 14편, 4부 “코를 시원하게 풀고 싶습니다”에는 시 「포효」 외 14편 등, 총 시 60편과 신상조 문학평론가의 해설 ‘삶의 내력과 맞닿은 시적 성찰’이 실려 있다.

목차

005 시인의 말

제1부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

013 사과
014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
016 해자
017 빈 둥지 증후군
018 윤이월
019 딱, 한 평
020 사막으로 가는 길
022 썩어야 안다
023 열려 있는 방
024 유리의 집
026 거제 외도
027 봄날은 간다
028 늘 그랬으면 좋겠다
029 무덤 속에서
032 가을 들판에 서면

제2부 새가 모이는 나무

037 단감나무 묘목
038 고라니가 뛰어가는 날
040 포인세티아
041 부림시장 지나며
042 꽃은 산에 기대어
043 거울 속 회랑에서
044 대구大口
045 유채의 강
046 홍매화
047 은행
048 두현각
049 유기분遺棄盆
051 새가 모이는 나무
052 갈비탕

제3부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057 문 -마스크·1
058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마스크·2
060 슬픈 봄날 -마스크·3
061 봄날의 일기 -마스크·4
062 비대면 수업 -마스크·5
064 PCR 검사 -마스크·6
065 벌 -마스크·7
066 대면수업 -마스크·8
068 조부 기일에 -마스크·9
070 거미와 낚시 -마스크·10
071 안경과 마스크 -마스크·11
072 풍장 -마스크·12
073 균형감 -마스크·13
074 잔도棧道 -마스크·14
076 설날 아침 -마스크·15

제4부 코를 시원하게 풀고 싶습니다

081 포효
082 텃골 할머니
084 혼자가 되지 못하고
085 흐르는 물에 등을 띄우고 086 겨울비
087 노루잠을 자고 있는데 088 벌목장
089 북천역
090 등대섬 가는 길
092 폭염 경보
094 하늘 오르는 길
095 나를 비우는 법
096 소를 추억하며
097 수국水菊
098 코를 시원하게 풀고 싶습니다

■해설
101 삶의 내력과 맞닿은 시적 성찰
- 신상조 문학평론가

저자소개

민창홍 (지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 공주에서 출생 1998년 계간 『시의나라』와 2012년 『문학청춘』 시부문 신인상 등단 시집으로 『금강을 꿈꾸며』 『닭과 코스모스』 『캥거루 백을 멘 남자』 『고르디우스의 매듭』 제4회 경남 올해의 젊은 작가상, 경남문협 우수작품집상 옥조근정훈장 수상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에 『닭과 코스모스』가 선정 계간 『경남문학』 편집장 및 편집주간, 마산교구가톨릭문인회, 문학청춘작가회, 민들레문학회 회장, 성지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역임 현재 마산문인협회 회장, 경상남도문인협회, 경남시인협회 부회장, (사)시사랑문화인협의회 영남지회, 경남문학관 이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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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삶의 내력과 맞닿은 시적 성찰

신상조 문학평론가

0.
삶과 시가 함께 간다는 ‘시생일여詩生一如’의 시학은 민창홍 시인의 시집 『고르디우스의 매듭』 해설을 맡은 시인이자 경상국립대학교에 재직 중인 장만호 교수가 한 말입니다. 그는 민창홍 시인이 그동안의 시적 이력을 통해 시와 삶의 일치를 추구해왔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시인의 시가 우연을 필연의 질서로 전유專有하지 않고 삶 그 자체의 경이와 마주하는 아이러니적 태도, 전이의 상상력을 통해 감각을 확대하고 대상과 소통하는 힘, 회상을 통한 존재론적 기원의 탐색과 자기실천의 특질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그 글에도 나와 있다시피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에는 이 매듭을 풀어내는 사람은 온 아시아 땅의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있었다고 하지요.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쪽으로 원정을 가다가 프뤼기아에 들러 장난삼아 자기도 매듭을 풀어 보겠노라고 했다나요. 그러나 아무리 해도 매듭이 풀리지 않자 짜증이 난 그는 칼을 뽑아 그 매듭을 잘라 버렸다고 합니다. 장만호 교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해석하면서 난제는 예상을 벗어난 방법도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운명이란 주어진 것을 푸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신화의 의미를 짚어줍니다.
과연 시인은 “배배 꼬이고 얽힌 것/칼로 과감하게 잘라/흐르는 물이 되어 매듭을 풀리라”라고 선언합니다. ‘-리라’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뜻을 나타내는 종결어미입니다. 이는 운명을 거부하며 매듭을 칼로 자르는 과감함과 어울리는 어조입니다. 반면 흐르는 물이 가진 유연함과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이렇듯 단호함과 유연함의 상반된 태도는 귀가 순해지는 나이에 접어든 시인의 정신적 깊이, 그리고 오랜 사회 경험 속에서 터득한 노련하고 성숙한 처세가 서로 간섭한 결과일 터입니다.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의 해설을 시작하면서 직전 시집의 해설에 기대는 이유란 다음과 같습니다. 흔히 새로이 발표하는 시집은 이전 시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많은 부분을 은폐하는 데 바쳐집니다. 새롭게 출간되는 시집은 그 자신의 글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하려 하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신간의 핵심은 자기를 전복하는 에너지일 경우가 잦습니다. 이전 시집에서 있었던 다짐이나 결의, 교훈이나 주장마저 휘발되어 버린 채 마치 이전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자신을 새롭게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가 기존의 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아무것도 자임하거나 자부하지 않으면서 뭔가를 지속”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저는 이 글을 통해 민창홍 시인의 시에서 일관되게 지속되는 ‘뭔가’가 무언가를 규명할 예정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민창홍 시인의 시에서 일관되게 지속되는 시적 특질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활 실천적 문제로 수렴됩니다.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실천’은 소비자본주의 내에서의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이번 해설을 통해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글을 쓰는” 시인의 실존이 시에서 어떻게 육화하는지를 밝혀 보고자 합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는 대신 존재하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하는 서사와 달리, 시는 근본적으로 존재와 존재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민창홍의 시는 결코 삶과 분리되지 않거니와, 시와 삶이 무관하다면 대체 시인이란 누구를 위해 있고, 그가 쓰는 시를 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를 거듭 질문합니다. 싸움의 대상이 시인 자신이라면, 자신과 싸워나가는 시인의 칼은 그의 작품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는 시로써 인간적인 결함을 가진 복합적 상황에 부닥친 자신을 베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비루함을 넘어 그 너머를 희구하고, 현재적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인의 시는 나날의 현실에 육화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민창홍 시인의 시는 개인적 서정과 사회적 성찰이 맞물린 형태를 보여줍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그의 시가 사유로만 가득하다는 생각입니다.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은 ‘사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유가 ‘정신적 활동’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잘못이다. 우리는 사유가 본질적으로 기호들을 운용運用하는 활동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따라서 민창홍의 시가 사유로 가득하다는 말은 기호들의 적극적 운용이 활발하다는 표현으로 바꿈이 적절하겠습니다. “새와 꽃과 나무와 노루와 꿩/매지구름 오기 전에 바람꽃 보고/이야기의 벼리 살피며/우리말 큰 사전 펼쳐보리라”(「노루잠을 자고 있는데」)라며 시인은 우리말 기호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이제 민창홍 시인의 시를 만나러 본격적으로 떠나보겠습니다.



1.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생활 실천적 문제로 수렴되는 민창홍 시의 특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은 시집의 서시를 감당하는 「사과」입니다. 시의 제목은 장미과에 속하는 과실수인 사과나무의 열매를 가리키는 동시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거나(‘謝過’) 어떤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 그 까닭을 말하는 ‘변명’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렇듯 중의적인 제목을 가진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내의 성화에 분리수거를 하려고 종이 상자를 들었는데 사과 하나가 툭 떨어진다 내 발등을 찍고 구르는 사과, 반쯤 썩어서 시커멓다 도려내고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얼른 집어 들었는데 물이 흐른다 종이 상자에 갇혀 목을 조여 오는 답답한 시간들이 흘러내린다 어찌 견디었을까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어둠의 공포 혼자 이겨낸 장렬한 죽음이다 검게 그을린 농부의 잔주름 메워 주던 붉은 미소는 우리 집에 와서 일그러졌구나 웃음기 없이 생을 마감하고 있는 사과 하나, 그것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또다시 긴 어둠에 갇히고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몸부림칠 것 아닌가 달콤함 오래 간직하기 위한 욕심이었다 너의 잘못은 결코 없다 한순간의 망각을 탓해다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기에도 벅차다 모든 피조물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너를 기억하마 사과 상자에 번진 너의 흔적
- 「사과」 전문

시인은 아내의 성화로 분리수거를 하려다 종이 상자 안에서 시커멓게 썩어서 진물이 흐르는 사과를 발견합니다.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 둔다는 게 그만 깜빡하고 때를 놓친 거지요. 사과를 맛있게 먹으려던 시인도 낭패지만 사과 역시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과의 생은 결실에 만족해하는 “검게 그을린 농부의”의 손을 떠나 사람들에게 맛있게 먹힌 후 다시 땅으로 돌아가 다른 생물의 양분이 되는 순환의 과정을 겪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사과는 쓸모없이 다만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가 땅에 매장도 되지 못하고 소각될 운명입니다. 시인은 오래 두었다 먹으려던 자신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사과가 생태계 내의 물질적 순환을 거치지 못한 채 잘못된 처지가 되고 말았음을 마치 지옥도를 펼치듯 펼쳐 보입니다.
인격화된 채 반쯤 썩어서 시커멓게 된 사과의 감각은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보는 사고思考로 이어지고, 이 감각적 사고는 “어둠의 공포 혼자 이겨낸 장렬한 죽음”이라는 사과에 대한 시인의 관점을 실어 나릅니다. 이러한 시인의 관점에는 사과의 장렬한 죽음이 자신들의 욕심 탓이라는 윤리적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사과 한 알이 매개하는 공감과 연민, 성찰과 반성은 썩은 사과를 향한 시인의 정중한 사과謝過로 끝을 맺습니다. 썩어 진물이 흐르는 사물에 시인의 사고와 관점과 태도가 얽혀 민창홍 시의 정체성이 감각적으로 훌륭하게 드러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를 심어야 한단다
통증이 심했을 텐데 어찌 참았느냐고
의사는 위로를 하고
이를 뺀다
이가 썩어가는 동안 이만 썩었을까
욕망으로 가득 찬 다른 곳은 괜찮을까
먹는 즐거움에 빠져서
이가 썩어가는 것도 모른 것이다
심어본들 그 이는 내 것인가
실에 매어 이마를 치며 뽑아내던 이
지붕에 던지며 새 이 달라던 소망
어디로 갔는가
썩은 것은 썩은 것이고
썩은 것은 버리는 것이고
이는 심어야 한단다
남의 것이지만 내 안에 있으니
내 것이라는,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
비단 이뿐이겠는가
- 「썩어야 안다」 전문

이번에는 사과가 아니라 시인의 신체 일부인 이가 썩었습니다. 시인은 치과에서 이를 빼며 “이가 썩어가는 동안 이만 썩었을까”라고 자문합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시작으로 ‘썩었을까’ ‘괜찮을까’ ‘내 것인가’ ‘어디로 갔는가’ ‘이뿐이겠는가’로 이어지며 반복되는 자문자답이 이 시의 주된 시상 전개 방식입니다.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질문은 실상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을 설문說問 형식을 빌어 독자에게 결론을 내리도록 만드는 방식이지요. 이에 독자는 다음 세 가지 해답을 내리게 됩니다. 첫째, “먹는 즐거움”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욕망은 우리의 삶을 썩게 만듭니다. 주목할 건 이러한 욕망은 어린 시절의 순수한 “소망”과 대비된다는 점입니다.
둘째, 욕망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이가 썩고, 썩은 이를 새로운 이로 대체하는 일이야말로 소비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가 상하면 인공 이로 대체해야 하는 치과 치료의 과정은 새로운 상품 구입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폭력적 시스템을 닮은 면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돈’으로 굴러가는 세상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내의 ‘정상적 삶’이란 소비하는 삶이고, 소비의 중점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 주어짐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재빨리 그리고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널리 전파됩니다. 욕망의 대상은 소유하는 즉시 유혹적이던 아우라를 잃어버리고, 소유하기 위해 애가 탔던 만큼이나 더 빠르게, 지금 막 소비한 상품에 미처 지루함이 깃들 새도 없이 또 다른 상품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결핍을 강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으로 새로운 상품이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시인의 질문에 답하노라면 탐식이 ‘내 것’이던 건강한 이를 썩게 만들듯, 내 삶을 병들게 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깨달아집니다. 두려운 건 ‘먹는 즐거움’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우기도록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자크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흉내 내느라 우리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중에서 자본의 속삭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요? 마지막으로 이 시는 “썩은 것은 버리는” 소비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합니다. 지금도 ‘낭비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아마존 물류창고에서는 창고 비용 절감을 위해 매주 수백만 개의 신상품이 폐기되고 있습니다. 소비 사회의 뒷골목에 거대한 쓰레기통이 버티고 있는 현상은 우리의 이를 썩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동력 삼아 실현되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자 사회란 욕망을 달래는 데 드는 시간보다 빠르게 욕망이 솟구친다고 지적합니다. 민창홍의 「썩어야 안다」는 이러한 소비문화의 본질을 시인의 경험에 빗대어 비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2.
한편으로 민창홍의 시에서 욕망으로 인한 ‘썩음’은 소비문화에 충실한 자본주의적 삶을 넘어 정치・사상・의식 따위가 타락하는 ‘부패’와 등가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사적 삶을 매개로 인간 일반에 대한 도저한 성찰과 반성을 담은 민창홍의 시는 소리만 요란한 구호로 그치기를 거부합니다. 삶이 손에 잡힐듯한 시적 진정성과 시와 삶이 따로 가지 않는 시인의 윤리적 태도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늘 그랬으면 좋겠다」를 통해 시인이 희구하는 삶의 형태를 살펴보겠습니다.

툇마루에
슬그머니 다녀가는 햇살처럼
늘 그랬으면 좋겠다

비가 와서
하루쯤 오지 못했다고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안을
소리 없이 둘러보고 가는 바람처럼
늘 새로웠으면 좋겠다

새벽에 내린 이슬
동행의 시간 길지 않아도
아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대가
있는 둥 마는 둥
- 「늘 그랬으면 좋겠다」 전문

이 시는 자연 사물에 빗대어 시인이 바라고 소망하는 삶의 자세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비유적 사물들은 ‘~처럼 ~으면 좋겠다’는 통사적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데요, ‘햇살’, ‘비’, ‘바람’, ‘이슬’은 비유에 종속된 시적 대상들이라기보다 독자가 화자의 내면 의식을 다양하게 경험하게 만드는 사물들로 기능합니다.
자연 사물들은 화자가 추구하는 세계관의 표상들이자, 시인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자족적 세상이기도 합니다. 한결같음(‘햇살’)과 새로움(‘바람’), 보채지 않는 여유(‘비’)와 만남과 이별을 긍정(‘이슬’)하는 마음은 생명력과 생기를 동반한 자연의 모습을 닮고자 합니다. 이 시의 매력은 매번 미래의 추측(-겠-)을 나타내며 서술적 형태로 끝나던 행이 5연에서는 종결되지 않는 변주의 형태로 처리됨으로써 여운을 남기는 겁니다. 이때 호명되는 ‘그대’는 삼인칭의 시적 대상으로 정확하게 분리되지 않고 시적 주체와 겹쳐 보입니다. 이는 “가을 들판에 서”있는 화자가 “세상의 순리는 언제나/뿌린 만큼 거두는 것”(「가을 들판에 서면」)임을 되새기거나, “성당 마당”을 장식하는 “초록의 트리”를 바라보며 그동안 “무엇인지도 모르고 받았던 선물”들을 헤아려보는 자세, 혹은 사랑은 모든 걸 나누어줌으로써 언제나 “빈 주머니 둘러매고” 떠나는 “눈썰매”(「포인세티아」)와 같음을 깨닫는 성찰적 일상성에서 비롯합니다. 다음 작품은 현실에 철저히 밀착된 민창홍의 시가 포착한 ‘시적 일상성’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는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한 대로 글을 쓰는”, 그야말로 시가 육화된 시인의 일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사지가 마비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반려견 몰티즈의 안락사를 생각한다

술자리에서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
시인이 맞느냐고

뇌에 물이 차서 다리로 가는 신경을 누르니
걸을 수도 없고 수술도 안된단다
고통 속에 사느니 안식을 생각한 것이다

신부님이 다시 물었다
시인이 맞느냐고

꼬리를 흔들고 눈을 맞추고 매달릴 때면
멀뚱멀뚱한 아들보다 낫다는 생각
아빠를 부르던 딸의 모습까지도
몰티즈 검은 눈동자에 투영된다

그렇다 나는 시인이다

제자리에서 먹고 배설을 해도
다리가 불편해도 가족이다
눈곱 범벅이 된 얼굴 바라보면 나오는 한숨
연어가 들어간 비싼 사료를 산다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연어가 물살을 가르는 연습은 계속되고
등창의 농이 눈물로 쏟아진다

기적이란 있는 것인가

거실이 조금씩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이른 봄
꼬리가 빠질 정도로 힘주어 제집 밖에 나 뒹굴고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더니 비실비실 걸음을 떼고 있다

드디어
나도 시인이 되었다
-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 전문

안락사를 고민하게 만들던 몰티즈가 병이 나아 힘겹게 걸음을 떼는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인은 환호합니다. 부사 ‘드디어’를 한 행으로 처리할 만큼 시인은 자신의 ‘시인 됨’을 감격해하는 눈치입니다. 시에서의 이 몰티즈는 「포효」에 등장하는 몰티즈와 같은 반려견이 아닐까 싶습니다. “꼬리도 흔들지 않는 몰티즈”가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내는 장면은 “사지가 마비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시의 몰티즈와 자연스레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포효」에서 몰티즈가 짖는 소리를 “흙으로 돌아가는 선언”으로 듣고 있습니다. 시인은 아마도 이때부터 몰티즈의 안락사를 고민했던 듯싶습니다.
시적 성취란 다양합니다. 독자에게 주는 울림, 말이 만들어 내는 예술적 감흥, 인식의 충격, 삶에 대한 환기 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는 일상사에서 삶의 비밀을 날카롭게 포착하지요. 시인의 일상과 밀착된 「어느 신부님이 물었다」는 단 하나의 비유나 상징도 없이 우리에게 인식의 충격을 안겨줍니다. 뇌에 물이 차서 “걸을 수도 없고 수술도 안 된”다는 반려견의 안락사를 고민하는 일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몰티즈를 가족으로 여겨왔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의식 없이 누워있다고 해서, 더 이상의 치료가 불가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고 해서 그 생명을 연장하는 산소호흡기를 떼라기가 그리 쉬울 리 만무하니까요.
반려견 몰티즈의 안락사를 고민하는 시인에게 ‘당신이 시인이 맞느냐?’던 신부님의 질문은 ‘당신의 문학적 진실은 어디에 있느냐?’는 날 선 비판입니다. 가슴이 뜨끔했던 시인은 곧 진정성 어린 ‘삶의 문법’으로 신부님께 답하는 것을 대신합니다. “제자리에서 먹고 배설을 해도”, 걷지도 못하고 눈곱이 범벅이 되어도 가족은 가족이라고 시인은 마음을 다잡습니다. 무려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몰티즈에게 지극정성이었던 시인을 두고 유별스럽다며 눈살을 찌푸리시겠습니까?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너의 입장이 무어냐? 공허한 것을 찾지 말고 철저하게 현실에서 고뇌하라.”라던 노쉰의 조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인은 몰티즈의 안락사를 고민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함으로써 시적 정체성을 찾아가고, 결국 시인으로서 존재론적 자각에 눈을 뜹니다. 철저하게 현실에 육화된 시로써 이뤄가는 자기 성찰의 과정입니다.


3.
시에서의 고백이 의미를 갖는 것은 화자와 시인이 일치하는 데 있습니다. 시인의 삶이 시적 의미를 구축하고, 시의 언어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민창홍의 시는 고백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시인의 자기 성찰에는 억지스러움이나 작위가 없습니다. 꾸밈과 수식을 모르는 그의 시는 담백하고 간결해서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하지만 평이함 속의 깊이, 평이함 속에 깃든 감동은 일상적 맥락 속에서의 삶에 충실하고 사회와 관련한 현실 속의 자신을 부단히 돌아보는 시인의 정신적 경지가 불러일으키는 감동입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서른여섯 해 동안 집착해 온 교직의 정산서 앞에서 감성보다는 이성이 허무와 절제를 삭혀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시는 일차적으로 정서적 표현을 목적으로 하기에 시인이 감성보다 이성을 앞세움은 의외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서정의 본질을 외면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컨대 민창홍 시인은 개인적 서정과 사회적 성찰이 맞물릴 때 진정한 의미를 획득한다는 창작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코비드-19가 제재인 시로만 꾸려진 3부는 개인적 서정과 사회적 성찰이 맞물리는 민창홍 시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마스크·2」을 읽어보겠습니다.

도도새는 어디로 갔을까요?

불안과 공포를 꼭 껴안은 어둠 속 의문과 질문을 반복하다가
몽유병 환자처럼 거리로 나섭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끝 모를 사막의 아스팔트를 밟으며
미친 듯이 손을 씻고 소독을 하고
약국이 문을 열기 전에 줄을 서서
세상의 입에 마스크를 씌웠습니다

새를 찾을 방법은 없는 것인가요?

인도양의 무인도 모리셔스에 갑니다
나와 상관없는 환상의 섬
그곳은 정말 새들의 지상낙원이었을까
지구본을 돌리며 돌아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발자국이 섬에 찍히고
지구 어디쯤에는 생채기가 생겨났겠지

지나던 길에 우연히 만난 파라다이스
그 스스로의 운명은 방향 없이 날리고
새의 흔적을 찾다가
별이 초롱초롱한 불면의 하늘에
어둠을 박차고 비상하는 새를 봅니다

도도새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 「도도새를 생각하는 밤 - 마스크·2」 전문

도도새는 비둘기목 도도과로, 멸종되었습니다. 인도양의 모리셔스에 서식했던 이 새는 칠면조보다 큰 덩치에 큰 머리를 했으며, 깃털은 청회색이었다고 합니다. 시에서의 상황은 코비드-19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점령한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손을 씻고 소독을 하고 약국이 문을 열기 전에 줄을 서서 마스크를 사서 쓰지만, 현대인들은 “끝 모를 사막의 아스팔트를 밟”고 선 불모의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이 삭막한 문명 속에서 화자가 “인도양의 무인도 모리셔스”를 꿈꾸는 이유란, 한때 그곳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라서 입니다. 그곳에서 도도새는 오랫동안 아무 방해 없이 살았기 때문에 하늘을 날아다닐 필요가 없어 비행능력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역사는 도도새의 운명이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최초로 도착한 이후로 멸종을 향해 진행되었음을 기록합니다. 모리셔스에 인간이 발을 들여 놓은 지 약 100년 만에 도도새는 희귀종이 되었고, 1681년 마지막 새가 죽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발길이 결국 지구에 생채기를 남기는 일임을 의미합니다. “도도새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를 묻고 있는 화자의 목소리는 개인적 서정과 사회적 성찰이 맞물려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같이 자신의 체험을 사실적이고 정직하게 기록하는 민창홍 시의 언어와 문학적 장치들은 다양합니다. 앞서 저는 민창홍의 시가 사유로 가득하다는 말은 기호들의 적극적 운용이 활발하다는 표현으로 바꿈이 적절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고라니가 뛰어가는 날」을 읽어보신다면 그의 시가 기호들의 적극적 운용뿐 아니라 상상력 또한 얼마나 활달하고 매력적인지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밭 가운데로 널 뛰듯 달려온 널 보았지
도로에는 차들이 달리고 있었어
어슴푸레 해가 지고 있었거든
도랑을 뒷발로 힘차게 차는 것으로 보아
넌 분명히 길을 잃었던 거야

명동의 지하차도에서도 그랬지
맞은편에 있는 건물에 닿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나온 거야
다시 지하도 여러 갈래의 길에서
손바닥에 침을 뱉고 후려치며 점을 치기도 했지

허들을 넘는 육상선수처럼 다리를 힘차게 뻗었잖아
잠시 멈춰 서서 멀뚱멀뚱 주위를 살피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나
다정한 눈길을 보냈는데도 하이에나로 보였니?
넌 갑자기 뽑지 않은 고춧대를 뛰어넘었잖아

찬찬히 지하도에 안내된 글자를 읽어 갔어
촌놈처럼 사방을 둘러볼 수밖에
순간 거친 호흡으로 다가오는
덩치 큰 반가운 친구 때문에
놀란 사슴처럼 눈동자만 굴렸으니까

지하도를 오르내리는 악몽을 꾸고 있었지
자동차 경적에 놀라 뛰던 날일 거야
달빛이 환한 곳을 같이 걸어가고 있었어
별이 쏟아지는데 그럴 수 있다고 서로를 토닥였지
텅 빈 들판 한가운데
-「고라니가 뛰어가는 날」 전문

시의 1연은 밭 가운데로 널 뛰듯 달려온 고라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시는 2연에서 갑자기 명동 지하도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화자의 기억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시인의 메시지를 원관념에 비유한다면 이 시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은 매연마다 주체를 달리하거나 혼재되는 양상이군요. 그러다 차도와 가까운 밭에서 길을 잃은 고라니와 명동 지하도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는 화자는 3연에서 시선을 마주칩니다. 묘한 건 1연에서 2연으로, 2연에서 3년으로 화면이 점프 컷(jump cut)함으로써 오는 효과입니다. 시는 각각의 시간과 공간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고라니와 화자가 제3의 공간에서 급작스레 마주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급격한 장면 전환으로 연속성이 갖는 흐름이 깨지는 데서 오는 착시 현상이지요. 4연은 다시 화자의 과거입니다. 지하도를 헤매던 그는 다행히 친구를 만날 수 있었지만, “놀란 사슴처럼 눈동자만 굴렸”다는 대목에서 어느새 고라니를 닮은 사슴이 되어버렸네요. 고라니에서 화자로, 고라니와 화자로, 다시 고리니를 닮은 화자로 편집되며 빠른 속도감으로 전개되던 시상의 마지막이 “달빛이 환한 곳을 같이 걸어가”는 둘의 뒷모습을 클로즈업하며 마무리됨은 필연적입니다. 시인은 “별이 쏟아지는데 그럴 수 있다고 서로를” 위로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민창홍 시인만큼 자신의 시와 삶의 거리가 가까운 시인도 드뭅니다. 감성보다는 이성을 선택한 시인이지만, 사실 그의 시는 고라니와 화자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별빛처럼 밝고 따뜻한 감성으로 충만합니다. “삶은 쉬엄쉬엄 욕심 없이 가는 거”(「대구大口」)라며 등을 토닥여줄 줄 아는 시인이니까요. 일상적 체험과 시적 성찰이 명징하게 맞닿은 민창홍 시의 가없는 걸음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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