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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2265469
· 쪽수 : 180쪽
목차
서문•정호승 묵향 가득한 자연의 글씨
서문•강병인 붓이 울고 글씨가 운다 한들
꽃 지는 저녁 /상처는 스승이다 /수선화에게 /별들은 따뜻하다 /봄길 / 결빙 /새벽편지
/풍경 달다 /하늘의 그물 /술 한잔 /내가 사랑하는 사람 /선암사 /여행 /이슬의 꿈 /봄비
/어느 소나무의 말씀 /벗에게 부탁함 /설해목 /허허바다 /어린 낙타 /폐지廢紙
/부치지 않은 편지 /굴비에게 /겨울강에서 /햇살에게 /강물 /첫눈 /달팽이 /라면 한 그릇
/별 /또 기다리는 편지 /가을폭포 /삶 /못 /밥 먹는 법
정호승 산문 ―시와 시인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책속에서
나는 분노보다 상처 때문에 시를 쓴다. 상처보다 그 상처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시를 쓴다. 기쁨보다 슬픔 때문에, 햇빛보다는 그늘 때문에 시를 쓴다. 상처 없는 사람은 결코 먼 길을 떠날 수 없고, 이미 먼 길을 떠난 사람에겐 그 상처가 오히려 힘이 된다. 나는 지금껏 그 상처와 고통의 힘으로 시의 길을 걸어왔다. 세상에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할 길이 있다. 나에게 그것은 시의 길이다.
13. 나는 아직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 한때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시가 무엇인지 좀 알고 쓰면 좋겠다는 열망감에 사로잡힌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른다는 것은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지금 모르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다. 만일 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영원히 알 수 없지만) 지금쯤 나는 시를 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 앎을 실천해야 한다면, 내가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 누구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인가.
19. 시의 배경은 침묵이다. 시는 침묵으로 이루어진다. 시에 있어서는 침묵의 가치가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내 시가 짧아진다. 인생이 짧은데 어떻게 시가 길어질 수 있으랴. 말 없는 말이 더 중요하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시는 말 없는 말이다. 언어 없는 언어다.
―정호승 산문 〈시와 시인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