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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3034248
· 쪽수 : 356쪽
· 출판일 : 2025-04-21
책 소개
목차
오후에게 묻다
헤어지는 중
어떤 외출
거슬림
같은 일요일
그들의 고전주의
늙은 밤
방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해설_이해할 수 없는 힘에 대하여 | 허희(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오른쪽 손목을 움켜쥔 수갑은 어느 단독주택 차고 앞에 채워져 있었다. 스테인리스로 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자바라 문이었다.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내 허리 높이의 자바라 문은 현재 쫙 펴진 상태로 닫혀 있었다. 문 너머 차고 안에 주차된 차는 없었다. 온 가족이 자가용을 타고 여름휴가를 떠난 듯, 빨간 벽돌집은 드나드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팔월 초입이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그 태양을 피해 모두들 휴가를 떠나버렸는지 거리도 동네도 온통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동네는 마치 멸망 직후에 찾아오는 폐허의 고독처럼 쓸쓸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했다. 그 냉정한 분위기에 동조라도 하듯 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누구라도 붙잡고 도움을 좀 청해볼까 했지만 그마저도 기회가 생기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었다. 도와달라고 소리쳐봐도 휴가를 떠난 집들은 모두 다 묵묵부답이었다. 남의 집 자바라 문에 묶인 지 벌써 반의 반나절.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오후에게 묻다」
그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는 방 안에서 은둔하던 동안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한집에 살면서도 거의 얼굴 한번 마주친 적이 없었기에 어머니는 오직 그에게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이불 빨 때 되지 않았냐? 내놔라.” “쌀쌀해져서 그런지 오늘은 제법 만두가 팔렸지 뭐냐. 매일 오늘만 같으면 좀 좋아…….” “니 동생, 결혼한댄다. 상견례 하자는데 같이는 못 나가겠지?” “트렁크 팬티 몇 장 사다 놨다. 색깔 맘에 안 들면 말해. 다른 거로 바꿔다 줄 테니까.” “옆집 할머니, 돌아가셨다. 평생 외롭게 사시더니 갈 때도 외롭게 간 모양이더라…….” 어머니는 매일 그의 방문 앞에서 무슨 얘긴가를 건넸고, 물었고, 던졌다. 그는 전직 대통령과 유명한 여자 배우의 자살 소식을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었다. 주소 체계가 지번에서 도로명으로 바뀌었고, 지폐 크기도 아담하게 바뀌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신사임당의 초상화가 들어간 오만 원권 지폐의 등장을 알려온 것도, 독재자의 딸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고,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와 그 사고로 생겨난 수백 명의 바다 밑 차가운 죽음에 관해 알려온 것도 어머니의 그 목소리였다. “글쎄, 대통령 뒤에 숨어 있던 늙은 여자 하나가 온 국민을 우롱했다지 뭐냐. 화가 난 사람들이 전국에서 촛불을 들고 일어났어.” “…….” “전직 대통령 두 명이 탄핵과 비리로 감옥에 들어갔단다.” “…….” 하지만 어머니의 부지런한 입놀림 뒤에는 어머니의 목소리만이 허허롭게 남아 조용히 흩어졌다. 그가 방의 인력을 운운하고, 사람이 어떻게 만두를 빚다 죽을 수 있느냐고 되물었을 때 말고는 어머니의 대화는 연극 독백처럼 쓸쓸했다. 물론 방 안의 그의 침묵도 고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떤 외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