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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91195196609
· 쪽수 : 252쪽
· 출판일 : 2014-03-10
책 소개
목차
제1부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1. “줄 설 시간이야.”
- 여행 혹은 탑승을 기다리다
2. “지도가 어디 있지?”
- 어른이 되고 싶었던 엘렌의 꿈
3. 임종자각
- 죽음 앞에서 깨달은 삶의 신비
4. 우리는 어떻게 죽어가는가
- 죽음의 5단계
제2부 세상 떠나는 날의 풍경
5. “오늘밤 조수潮水가 어떻게 되죠?”
- 떠날 준비를 하다
6. “엄마가 여기 와 계셔.”
-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함께 있다
7. “길 저편에 아름다운 빛이 보여.”
- 다음 세상을 보다
8. “사랑해요, 자상한 아빠가 되어주셔서 고마워요.”
- 언제 죽을지 안다
제3부 외롭지 않게, 쓸쓸하지 않게 이별하는 법
9. “우린 공원에 가야 해.”
- 어린 세 아이를 두고 떠나다
10. “고마워요, 미안해요, 용서할게요.”
- 화해가 필요한 사람들
11. “말한테 먹일 여물을 못 찾겠어!”
- 붙잡힌 사람들
12. 내 행동을 눈여겨봐.
- 말 이외의 의사표현
13.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빨간 벽돌집에 갔어요.”
- 꿈이 말해주는 것
14. “오늘은 죽기 좋은 날.”
- 시간의 선택
15. 가족, 친구들을 위한 몇 가지 조언
책속에서
intro >>
괴팍한 할망구
이 시는 스코틀랜드 던디 근처 한 양로원에서 홀로 살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의 것이다.
간호사에 의해 유품 속에서 발견되어 우연히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북아일랜드의 한
정신과학 잡지에 실리게 되고, 마침내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시의 주인공인 ‘괴팍한 할망구’는 바로 멀지않은 미래의 당신과 나이기에...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간호사 아가씨들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나요?
저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머리도 괴팍하고
눈마저 흐리멍덩한 할망구일 테지요
먹을 때 칠칠치 못하게 음식을 흘리기나 하고
당신들이 나한테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소리 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 같고
늘 양말 한 짝,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기만 하는 답답한 노인네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지는 나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제발,
나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줘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 넘기는 내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줄게요
저는 열 살짜리 어린 소녀랍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 언니, 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스무 살의 꽃다운 신부랍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 있는
아름다운 신부랍니다
그러던 제가 어느새 스물다섯이 되어
아이를 품에 안고
포근한 안식처와 보살핌을 주는
엄마가 되어있답니다
어느새 서른이 되고 보니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제 품에만 안겨있지 않답니다
마흔 살이 되니
아이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났죠
하지만 남편이 곁에 있기에
아이들 그리움으로 눈물로만 지새우지는 않는답니다
쉰 살이 되자, 다시
제 무릎 위에 아가들이 앉아있네요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그런대로 행복한 할머니입니다
암울한 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남편이 죽었거든요
홀로 살아갈 미래가,
두려움이 저를 떨게 하네요
자식들은 자기 아이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젊은 시절 내 자식들에 퍼부었던
그 사랑을 또렷이 난 기억하지요
어느새 노파가 되어버렸네요
세월은 참 잔인하네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자꾸만 쇠약해져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내 심장 자리에
이젠 돌덩이가 들어앉았네요
하지만 아세요?
늙어버린 이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소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 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그리고…… 이젠
사랑도 삶도 다시 즐겨보고 싶어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나도 짧았고
너무나도 빨리 가버렸네요
내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요
모두들 눈을 크게 떠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봐줘요
내가 괴팍한 할망구라뇨
제발,
제대로 한번만 바라봐주어요
‘나’의 참모습을 말예요
1장 “줄 설 시간이야.”
로라는 평생 교사로 살았다. 은퇴할 무렵 첫 남편이 죽자, 그녀는 다시 새로운 인생을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열렬히 독서를 하며 지식의 갈증을 풀었고, 새로운 사람과 낯선 곳을 찾아 여행하며 삶의 다른 면을 만들어갔다.
그녀가 조를 만난 건 인도여행에서였다. 나이 지긋한 그는 은퇴한 홀아비였지만, 왠지 모르게 끌리는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행 스타일도 로라와 같았다. 여행 중에 마주쳤던, 그들보다 훨씬 젊은 배낭여행족들처럼 그들도 각자의 배낭을 짊어지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첫눈에 끌려 사랑에 빠진 그들은 집에 돌아와 약혼을 발표했다. 양가의 장성한 자녀들 모두가 부모들의 새로운 결단에 놀라워했다.
결혼식은 양가 자녀들과 손주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치러졌다. 로라는 인도에서 산 사리를 입고, 손자 로비의 손을 잡고 입장했다. 그녀가 자기를 인도해줄 주인공으로 로비를 선택한 것은 그 애의 엄마, 몇 년 전 마흔다섯에 유방암으로 죽은 딸 수잔과 혈육의 정을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예식이 끝나고 나서는 로라가 애지중지하는 러시아 앤틱 도자기에 인도음식을 담아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일단 거처를 정하고 나자, 조와 로라는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이제는 2인조로. 한때는 여행에서 지겹기 그지없던, 수화물을 기다리고 입장권을 사느라 줄을 서는 일, 세관, 비행기, 버스, 기차 타는 줄서기가 이제는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조는 건망증이 심해서 로라의 계획성과 관리력에 크게 의지했는데, 그녀는 이런 역할을 좋아했다.
몇 달 전 로라의 생일 기념으로 떠난 멕시코 여행에서였다. 로라가 이질에 걸리는 바람에, 급작스럽게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와야 했다. 로라는 탈수증세로 입원하게 되었는데, X-레이 촬영 결과 결장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절제가 불가능한 악성이었다. 게다가 암이 벌써 간까지 전이된 상태라 그녀의 나이를 감안할 때, 적극적인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 의사는 여섯 달 남짓 더 살 수 있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에게는 뼈아픈 소식이었다. 로라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조와 함께 집에서 보내겠다고 했다. 조는 기꺼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녀를 돕겠다는 결심을 했다. 호스피스 센터에도 전화를 걸었다.
그 뒤 넉 달간이 봄날처럼 지나갔다. 로라의 통증은 그리 심하지 않아 약물로 쉽게 조절되었다. 가족들은 음식을 만들어오거나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 자주 다녀갔다. 그녀와 조는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나 젊은 시절의 앨범을 훑어보면서 몇 시간씩 훌쩍 보내는 일이 많았다. 물론 그 시간들이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젊고 건강했던 딸 수잔의 사진을 보면 로라는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부모가 되어 자식보다 오래 사는 건 못할 짓이에요. 딸애가 너무 보고 싶어요. 그 애가 아니라 내가 갔어야 하는데…….”라며 울먹였다.
하지만 로라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담담하게 대처했고, 사람들에게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대로 하루하루를 잘 견뎌가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로라의 행동에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늘 즐기던 목욕을 마다했다. 왠지 멍하니 딴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조는 아내의 이런 상태에 놀라 호스피스 센터로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도착하니, 조는 문밖에서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 오늘 좀 달라졌소. 나를 보기는 하는데 내가 거기 없는 것처럼, 어디 먼 곳을 보는 것 같소.”
침대커버를 움켜쥐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로라는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무척 초조해 보였다. 급히 상태를 체크해봤지만 이런 행동변화를 가져올 만한 뚜렷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로라 할머니, 무슨 일이에요? 지금 어디 계시죠?” 하고 물었다.
“줄 설 시간이야.”
“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보세요. 거기 누구, 할머니 아시는 분이라도 있나요?”
그녀는 순간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여전히 허공을 응시한 채 “수잔이 줄에 있어.” 하고 대답했다.
“좋겠네요. 할머니도 그 줄에 서고 싶으세요? 더 자세히 말씀하실 수 있어요?”
그러자 갑자기 로라는 생각에 잠기며 슬픈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조가 나하고 같이 갈 수 없잖아.”
순간, 나는 그녀가 그렇게 끔찍이 그리워하던 딸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과 자신을 그토록 필요로 하는 남편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할머니, 그건 참 어려운 선택일 것 같네요. 할머니가 줄을 서실 수 있게 제가 할아버지를 좀 도와드릴까요?”
이 말에 로라는 눈에 띄게 편안해지며 “그래.” 하고 대답했다.
조는 여행지에서 수집한 각종 고가구와 이국적인 기념품들로 둘러싸인 거실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힘드실 거라는 건 알아요. 그런데 할머니가 우리에게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되세요?”
“저 사람이 수잔을 만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소만, 어쩌면 그 둘이 다시 만날 거라는 말 같기도 하고.”
“무슨 다른 뜻이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내가 저 사람한테 많이 의지하고 있으니까…… 내 생각에는 자기 없이 나 혼자 어떻게 살아갈지를 걱정하는 것 같소.”
“그럼 혹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지 계획해놓은 게 있으세요?”
“있소. 나도 이제 총기가 예전 같지 않고, 그래서 아들네로 이사갈 생각이지.”
조는 계속해서 생각해둔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이 얘기가 떠나는 할머니의 괴로움을 덜어줄 테니, 알려주는 게 어떻겠냐고 넌지시 떠보았다. 조는 슬픔 가득한 얼굴로 구부정하게 앉아 팔을 무릎에 괸 채 곰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오.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이야.”
로라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그가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거라고 거듭 이야기했다. 마침내 조가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로라 옆에 앉아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조는 자기 계획을 들려주고 그녀의 죽음을 허락했다.
“나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게 정말 싫지만, 당신이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소. 당신은 내 걱정 말아요. 내 장담하건대 잘 지내리다. 약속하오. 내 계획을 들어보겠소?”
조는 그녀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이 어떻게 할지를 설명했다.
조의 이야기를 들은 후 초조한 듯 뭔가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녀의 상태가 진정되었다. 로라는 평온해졌고, 며칠 뒤 숨을 거둘 때까지 동요되지 않았다. 그녀가 평화로이 죽음을 맞이할 때 조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로라가 말한 “줄 설 시간이야.” 같은 것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누구나 흔히 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에 대해 우리는 정신이 ‘혼미해서’라고 생각하면서 흘려듣기 쉽다. 로라의 경우에도 그런 식으로 대처했다면, 다음과 같은 그녀의 중요한 메시지를 놓쳤을지 모른다.
- 나는 곧 죽게 된다.
- 난 수잔을 다시 만날 것이다.
-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조가 받아들이고 있는지, 또 내가 죽은 이후를 대비하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사람이 잘 지낼 거란 보장이 필요하다.
육신의 고통이 아닌 감정적이고 영적인 그녀의 고통을 덜어준 것은, 조의 솔직한 대응이었다. 조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작별인사를 한 후에야 그녀는 괴로움 없이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평온하게 죽기 위해 필요했던 정보를 다 얻은 것처럼.
임종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흔히 살면서 경험했던 일과 관련된 상징어를 사용한다. 로라와 조는 여행에서 만났고, 그들의 일상은 입장권 사는 줄부터 수하물, 여권검색 줄에 이르기까지 온통 줄서기였다. 그녀는 ‘수잔이 있는 줄에 서겠다’는 말로 이제 자기는 조와 동행할 수 없는 다음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8장. “그쯤이 될 거야.”
- 언제 죽을지 안다 -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쯤 죽을지 안다. 때로는 날짜와 시간까지도. 놀라운 사실은 그걸 알아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사망시각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려는 이들의 시도는 분명하고 직접적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막연하고 알아듣기 힘든 탓에 놓치거나 무시되기도 한다.
덕
덕은 20대 후반이다. 스포츠광 집안의 타고난 운동선수였던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풋볼선수로 활약하다가, 나중에는 모교의 풋볼팀 코치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코치로 2년 남짓 근무했을 때, 목에 넓게 퍼져 있던 림프선 혹이 림프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6개월에 걸친 화학 치료를 거의 빼먹지 않고 잘 견뎌냈다. 그러나 암은 재발했고, 이번에는 몸 여러 군데로 번졌다. 치료는 실패했다.
혼자 힘으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그는 부모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호스피스 프로그램에 등록했고, 몹시 쇠약해져 있었지만 그런 대로 잘 버텼다. 한 동네에 사는 그의 형제들이 자주 집에 들렀지만, 간병은 주로 그의 부모가 맡았다. 그런 와중에 막내 여동생 제인마저 암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치유 가능성이 높은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덕이 동요할까 봐 가족들은 그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어느 토요일 저녁이었다. 덕의 아버지가 호스피스 센터로 전화를 걸어왔다. “뭔가 좀 이상해요.” 그가 말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나로서는 그런 말을 들으면 바짝 긴장해야 한다. 환자나 그 가족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보면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중대한 변화가 있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숨을 거두기 직전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덕도 그의 부모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 외에 뭐가 ‘잘못된 것’인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덕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몇 가지 간단한 진단을 해본 결과, 그리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덕은 곧 잠이 들었고, 부모는 나한테 차를 한 잔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차를 마시며 형과 여동생들은 언제 또 올 거냐고 물었다.
“애들은 저녁도 먹고 풋볼경기도 볼 겸 내일 오후에 집으로 올 겁니다. 이 집 식구들은 하나같이 풋볼에 미쳐 있다니까요! 오늘 덕이 한 것 좀 보세요.”
그녀는 덕이 그린 풋볼경기 배치도 한 장을 내게 건넸다. 거기에는 두 팀의 각 선수들의 움직임이 원과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었다. 한 팀의 선수들을 나타내는 여섯 개의 원에는 덕과 부모, 나머지 3남매의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막내 제인의 원이 긴 화살표로 경기장 바깥쪽을 향해 그어져 있었지만 장외로 나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덕의 원은 화살표가 경기장을 가로질러 장외로 나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거기에 “일요일 정오 무렵 게임 종료.”라고 휘갈겨 써 놓았다. 나는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걸 무심히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덕은 내일 정오 전에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나리란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뭔가 중대한 일’이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의 건강 상태에 변화가 있거나 어쩌면 사망할 수도 있어요.”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던 부모의 얼굴에 갈수록 걱정스런 빛이 짙어졌다.
“덕한테 그림 설명을 부탁해보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본인의 말을 듣는 게 젤 낫겠죠.” 내가 말했다.
“그 애를 깨우고 싶지 않아요. 덕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 뜻이라면 우리도 준비가 되어 있어요. 또 뭔가 달라지거나 하면 선생님께 언제든지 전화 드릴 수 있고요. 아무튼 내일 애들한테는 좀 더 일찍 오라고 해야겠네요.”
아침이 되었다. 덕은 평소보다 조용해진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오전에 도착한 가족들 모두가 그의 곁에서 시간을 보냈다. 정오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덕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고 불편해하더니 어머니에게 베개를 고쳐 베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숨쉬기가 힘든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더니 그대로 숨을 거뒀다.
덕의 그림에 어떤 의미가 있기는 했을까? 그는 정말 자신의 사망시각을 알았고, 가족들에게 친숙한 풋볼경기라는 상징을 써서 그것을 전달하려 했던 걸까? 가족들이 제인의 병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동생이 암에 걸린 걸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죽어가는 이의 모든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죽음으로 다가가는 사람의 말과 몸짓, 심지어는 휘갈겨놓은 낙서까지도. 덕이 전하려던 메시지를 미리 알게 된 가족들은 그의 죽음을 좀 더 잘 준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