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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문화예술사
· ISBN : 9791195509188
· 쪽수 : 255쪽
· 출판일 : 2019-10-30
책 소개
목차
∙추천사 | 국민의 마음을 훔치는 창덕궁 (정재숙/문화재청장) … 4
∙추천사 | 왕의 마음을 훔친 창덕궁이 독자의 마음도 사로잡기를 바라며 (배기동/국립중앙박물관장) … 7
∙저자의 글 | 세계유산 창덕궁의 이력서를 들여다보다 … 12
제1부 — 창덕궁, 역사의 중심에 서다
1장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서다 20
2장 금천교, 몸과 마음을 씻고 왕께 나아가다 41
3장 궐내각사, 한마음으로 왕의 곁을 지키다 56
제2부 — 왕실의 공간에서 학문과 문화를 품다
4장 인정전, 조선의 얼굴로 서다 74
5장 선정전, 군신의 공치를 말하다 101
6장 희정당과 대조전, 왕과 왕비의 삶을 담아내다 129
7장 동궁전, 왕실의 미래를 준비하다 146
8장 낙선재, 선비의 본을 보이다 153
제3부 — 왕의 정원에서 태평성대를 꿈꾸다
9장 창덕궁 후원, 지상에서 선계를 설계하다 176
10장 부용지・주합루 일원, 임금과 신하의 운명공동체가 꽃피다 185
11장 애련지와 연경당, 역사가 가장 아름다운 가을을 품다 213
12장 관람지와 존덕정, 정자들이 어우러져 보석처럼 빛나다 224
13장 옥류천 일원, 궁궐 숲과 역사가 어우러지다 235
14장 새 선원전과 순라길, 왕조의 역사와 삶을 기록하다 246
저자소개
책속에서
창덕궁이 원래의 지형을 살려 건축한 데서 비롯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중요 건물의 배열이 동서 방향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지형이 낮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면서 궁궐의 정전·편전·침전이 계단식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궁궐의 정문 역시 창덕궁에서 지형이 가장 낮은 서남쪽 모서리에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되었다. 의도한 면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태생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궁궐 건축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잠시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자. 아무리 건물이 동서로 배열되었다 하더라도 정문만은 남쪽의 한가운데를 고집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응봉의 남북 줄기를 따라 종묘의 정수리 한가운데에 세워야 했을 것이다. 역대 왕들의 신위와 위패를 모신 종묘의 북쪽 구릉지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궁궐의 정문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궁궐의 제일 후미진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 제1부 1장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으로 서다” 에서
〈동궐도〉에 그려진 수많은 전각 가운데 청기와를 사용한 건물은 ‘선정전’과 중궁전의 ‘경훈각’ 단 두 채뿐이니, 청기와 건물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와 같은 궁궐 건축의 청기와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건물 이름이 청기와를 뜻하는 ‘청와대’이다.
선정전은 지붕에 청기와를 덮었던 관계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양성바름이 없고, 그래서인지 추녀마루의 잡상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양성바름이란 문헌상에는 양상도회(梁上塗灰)라 하며 격이 높은 건물의 품위를 높이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한편, 용마루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고 기와 사이에 날짐승이나 구렁이가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백토와 가는 모래, 생석회를 혼합한 삼화토(三和土)를 이용하여 용마루 등을 감싸 바른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 전통 건축 양식의 일종으로 오늘날의 콘크리트 기법에 비견되는 고대의 획기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 제2부 5장 “선정전, 군신의 공치를 말하다” 에서
원래 창덕궁의 동궁은 낙선재 일대의 남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조 연간에 내전 가까운 위치에 중희당(重熙堂)을 세우고 이곳에서 세자의 책봉례를 거행함으로써 중희당이 동궁의 본당이 되었다. 하지만 중희당은 사실상 효명세자 사후에는 그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종대에는 경복궁의 계조당과 자선당 등 새로운 동궁이 조성되면서 창덕궁의 동궁은 그 의미를 잃어 갔고, 그 중심 건물인 중희당도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중희당터는 현재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 한가운데에 남아 있다. 창덕궁 후원 입구 매표소 앞에는 바닥에 장대석이 온전한 형태로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중희당의 기단석 기초이다. 지금은 기단돌의 바닥만 남아 있지만 한때 가장 화려했던 동궁의 중심 건물이었다. <동궐도>에는 중희당 앞마당에 해시계 등이 놓여 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과학을 중시한 정조의 의지가 엿보이지만 이 또한 현재는 그 자취를 알 수 없다.
- 제2부 7장 “7장 동궁전, 왕실의 미래를 준비하다”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