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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 ISBN : 9791195847907
· 쪽수 : 252쪽
· 출판일 : 2016-08-20
책 소개
목차
아버지|개구리|거미줄|원숭이|모리 선생님|지옥변|용|귤|오토미의 정조|버려진 아이|묘한 이야기|신선|흰둥이|모모타로|호랑이 이야기
리뷰
책속에서
나는 이상한 흥분을 느꼈습니다. 온몸의 피가 요동치는 듯한, 뭐라 표현하기 힘든 유쾌한 흥분이었습니다. 손에 총을 들고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는 사냥꾼의 심정이랄까요?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그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사냥개보다 더 빠르게, 그 어깨에 매달려 내리 눌렀습니다.
“나라시마!”
꾸짖는 것인지 욕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나의 목소리는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범인인 나라시마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
나라시마는 내 손을 떨쳐내려 하지도 않고 창고 밖으로 상반신을 내놓은 채 가만히 내 얼굴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가만히’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있는 힘을 다 써버린 후 가만히 있지 않을 수 없는 ‘가만히’입니다. 여유 따위 없고 궁지에 몰린, 이른바 반쯤 부러진 돛의 활대가 바람이 지나간 후,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그 어쩔 수 없는 ‘가만히’입니다.
-<원숭이> 중에서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카페에 손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 쪽에서는 거울 속 손님의 옆모습이 겨우 보일 뿐이었지만, 저 타조알 같은 대머리며 고색창연한 모닝코트, 마지막으로 영원히 보랏빛일 넥타이까지.
나는 그가 모리 선생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선생을 보자마자 선생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7, 8년의 세월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초이스리더를 배우던 중학생 반장과 지금 여기서 잎담배 연기를 조용히 내뱉는 나. 나에게 그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휩쓸고 가는 시간의 흐름도, 진작에 시대를 초월했던 이 모리 선생만은 어쩌지 못한 것일까? 오늘 밤 카페의 점원들과 앉아있는 선생은, 완연히 그 옛날 석양도 들지 않던 교실에서 독본을 가르치던 모습 그대로였다. 대머리도 그대로다. 보라색 넥타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러고 보니 선생은 새된 목소리로 바쁘게 무엇인가를 점원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미소를 띠며 아까의 우울한 기분도 잊은 채 가만히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중략)
모리 선생은 카페 점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움직여 다른 위치에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펼쳐진 독본 같은 책이 보였다. 모리 선생은 열심히 손가락으로 책을 짚어가며 질리지도 않고 끊임없이 설명했다. 그 모습도 여전했다.
다만 그를 둘러싼 점원들은 옛날의 학생들과 반대로 모두 열심히 눈을 반짝이며, 옹기종기 둘러 모여 분주한 선생의 설명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나는 거울 속 이 광경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속에 모리 선생에 대한 온정이 일었다. 아예 저리로 가서 선생과 격조했던 세월이야기를 할까? 하지만 아마도 선생은 겨우 한 학기 동안 교실에서만 마주쳤던 나 따위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 기억한다고 해도…… 그 옛날 우리가 선생에게 경솔히 퍼부었던 악의 담긴 웃음소리를 떠올리자니, 결국 나서지 않는 쪽이 훨씬 선생을 존중하는 방법이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모리 선생님> 중에서
어느새 머리칼이 흐트러진 오토미는 마루에 털썩 앉으며 허리띠에 숨겨두었던 면도칼을 거꾸로 쥐고 있었다. 그것은 살기를 띤 동시에 묘하게 요염한, 말하자면 조왕신의 선반 위에서 긴장하며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닮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빛을 살폈다. 그런데 신공이 갑자기 보란 듯 냉소를 흘리더니 품에서 아까의 권총을 꺼냈다.
“자, 얼마든지 더 바둥거려 보라고.”
권총의 끝은 서서히 오토미의 가슴 쪽을 향했다. 그래도 여자는 분한 듯 신공의 얼굴을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공은 여자가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무언가 생각난 듯 권총 끝을 위로 향했다. 그곳의 어둠 속에는 고양이의 호박색 눈이 희미하게 떠올라 있었다.
“어때, 오토미 씨…….”
신공은 상대방을 애태우려는 듯 웃음을 머금고 불렀다.
“이 권총이 ‘탕’하고 울리면 저 고양이는 거꾸로 떨어지겠지. 너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괜찮겠어?”
까딱하면 방아쇠가 당겨질 것 같았다.
“신공!”
오토미가 갑자기 소리쳤다.
“안 돼, 쏘면 안 돼!”
- <오토미의 정조> 중에서
다시 생각해보아도 분명 눈을 뜨고 있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되는 거지. 게다가 동료들은 모두 빨간 모자 따위 전혀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고. 결국 그 일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일본에 돌아왔는데, 치에코는 두 번이나 수상한 빨간 모자를 보았다는 거야.
그럼 마르세유에서 본 자가 그 자인가 싶기도 했지만 너무 괴담같기도 하고. 또 명예스러운 원정 중에 마누라 생각만 했냐고 놀림 받을 듯해서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네.
그런데 이날 본 빨간 모자의 얼굴이, 마르세유의 카페에서 본 빨간 모자와 눈썹 하나 다르지 않았어. 남편은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윽고 불안한 듯 목소리를 낮추어,
“한데 참 묘하지? 눈썹 하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아무래도 그 빨간 모자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지 않아. 그저 창 너머의 얼굴을 본 순간, 그자라고 알아차렸을 뿐…….”
- <묘한 이야기> 중에서
하지만 그중에서 단연 무시무시하여 눈에 띄는 것은 마치 짐승 이빨 같은 칼날 나무 꼭대기를 반쯤 스치며(칼날 나무 끝에도 무수히 많은 망자가 겹겹이 꽂혀 있습니다.)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는 우차였습니다. 지옥 바람에 뒤집힌 가마의 주렴 안에는 임금의 후궁 못지않게 눈부신 차림의 시녀가 긴 머리칼을 화염에 나부끼며, 하얀 목덜미를 젖히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시녀의 모습이며 불타오르는 우차며, 어느 하나 염열지옥의 고통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커다란 화폭 속의 공포가 이 여인에게 집중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보는 자의 귓가에 아비규환의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입신의 경지에 오른 작품이었지요.
아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그리기 위해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아무리 요시히데라도 어찌 이런 생생한 나락의 고통을 그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자는 이 병풍화의 완성을 위해 목숨을 잃는 처참한 꼴을 당했습니다. 그림 속 지옥은, 나라 제일의 화공 요시히데가 언젠가 떨어지고 말 곳이었습니다…….
- <지옥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