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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97628245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21-12-25
책 소개
목차
작가 프로필 · 4
서문 ● 세상이 아름다운 건 당신의 눈이 빛나기 때문 · 5
1. 그들의 발자국을 찾아서
알래스카 사진사 12
제대로 가고는 있는 거야 20
그들을 따라나선 길 1 24
그들을 따라나선 길 2 34
소박함에 대한 동경 52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한다 59
시카고 문학기행에 참가하다 67
2. 텃밭지기를 꿈꾸며
나는 잡초가 아니라고요 82
기적의 사과 86
텃밭 일기 1 96
텃밭 일기 2 101
나만 이럴까 107
지리산 산행 112
선암사 가는 길 123
3. 그때 짧은 생각들
인디고서원 146
소소한 일의 기적 151
반칙왕 156
얼굴이 벌게지는 순간 161
어린 왕자를 만나러 간다 169
비극을 보는 시선 174
4. 돌의 시간
시와의 동거 182
어느 별에 관하여 186
삼단(三短)의 시인을 만나다 192
그 섬에는 바람이 있었네 200
통영 동피랑에서 204
혼불의 작가 최명희 208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러 간다
밤에 세설원으로 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구 궤도를 따라 돌던 정말 보잘것없는 위성 하나가 우주의 깊은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수많은 위성들은 모체인 지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기상, 통신, 군사 등 자기 고유의 목적을 가지며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 지구 자전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정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우주의 극히 미세한 공간 하나를 점하며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원심력과 구심력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이 궤도에서 벗어나면 위성으로서 가진 생명을 다하는 것이다. 천천히 지구 중력에 이끌려 떨어질 것이며 언젠가는 지구로 낙하하면서 공기와의 마찰열에 의해 불타버리는 운명을 맞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 쓰레기로 바뀌어 다른 위성을 파괴할 수도 있다.
당초 자기에게 주어진 궤도를 이탈해서 우주의 암흑 공간으로 튀어버린다면 어떨까. 우주는 앞뒤도 없고 위아래도 없다. 발을 지구의 땅 위에 붙이고 사는 동안에는 공간의 전후좌우와 상하를 분별할 수 있지만 막막한 어둠에서는 아예 그런 지각 자체가 없을 것이다. 빨려 들어가듯 어둠 속을 마냥 질주하지 않을까. 그냥 흘러가지 않을까.
그러나 목적을 가진 우주선이라면 깜깜한 속에서도 목적지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우주 속에서는 일직선으로 최단거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선이 떠났던 지점과 도착하는 곳이 서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스라한 목적지를 향해 가는 코스가 일직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기하학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궤적을 그리며 갈 것이다.
지구에서 쏘아 올린 보이저(voyager, 여행자) 1호와 2호는 40년을 넘게 우주를 항해 중이라 한다. 원래 목적이었던 태양계의 행성 탐사를 마치고 이젠 먼 우주의 어둠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보이저의 전력 수명은 거의 다 되었지만 관성에 의해 계속 미지의 세계를 향하고 있다. 지금은 지구에서 무려 200억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정상(正常)’은 사전적인 의미로 ‘변동이나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를 말한다. 정상이라는 말은 어떤 테두리를 한정하고 있다는 어감을 띠고 있다. 지구와 교신하면서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제대로 돌고 있어야 한다.
내겐 세 개의 풍선이 있었다. 풍선에 바람을 넣고 다른 데로 날아가지 않도록 묶어두었다. 어느 날 유독 화려한 색상이 돋보이는 풍선이 말했다.
“가장 돈을 잘 벌어주는 풍선이야. 그러니 먼저 내게 공기를 많이 넣어줘야 돼!”
나는 화려한 색깔을 가진 풍선에 먼저 공기를 넣어주었다. 시도 때도 없이 넣어주었다. 그런 만큼 나머지 두 개의 풍선은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바람이 빠져나가는 풍선은 가끔 불평을 하긴 했지만 잘 참는 편이었다. 반면 화려한 풍선은 내 뜻을 벗어나 계속 제 몸 불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잘못 살고 있지 않는지 덜컥 접이 났다. ‘직장’이라는 풍선은 무한히 커졌다. 반면 ‘가족(가정)’이라는 풍선은 바람이 빠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풍선은 ‘사회생활’이었다. 세 개의 풍선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나는 화려한 풍선에 더 이상 들어가지도 않는 공기를 계속 밀어 넣고 있었다. 안간힘을 쓰면서 온 힘을 다해 밀어 넣었지만, 이미 한계효용의 절벽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마음은 어지럽고 감정의 진폭은 너무 커져서 정신상태가 엉망이 됐다는 걸 느꼈다.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직장 업무에 최우선적으로 전력투구하며 지내온 것이 언젠가부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도 아예 잊어버리고 살았다. 바쁜 게 좋은 것이라는 달콤한 말에 이끌려 정말로 귀한 보석들은 옆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부글부글 끓는 늪처럼 끔찍하게 변해버린 이 속마음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이미 황폐해버린 상황이라도 알아차린 게 다행이었다.
이 시기에 망가져버린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회복하고자 ‘재자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이십 년 전이다. 그 덕에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이라는 책을 공부하면서 무질서한 내면세계를 조금씩 정리해가는 계기가 되었다.
고장 난 상태로 방치되어 언제 지구로 떨어질지 모르던 위성은 지금은 미지의 작은 혹성을 향하고 있다.
그곳엔 어린 왕자와 여우가 산다고 소문난 곳이다. 소년과 여우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곳을 향해 항해하고 있다. 어린 왕자를 만나면 먼저 여우와 대화하는 법을 익히고 싶다. 세상을 달리 보는 지혜를 얻고 싶다.
모래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인간의 시선보다는 ‘별은 보이지 않는 꽃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라는 말에 위안을 삼고 싶다.
‘내 별이 작아 보여줄 수는 없어. 모든 별을 봐. 그중의 어느 하나에서 내가 웃고 있겠지. 그러면 아저씨에게는 모든 별이 웃는 것같이 보이겠지. 결국 아저씨는 웃는 줄 아는 별을 가진 거야.’라고 작은 목소리로 소곤대는 어린 왕자와 마주하고 싶다.
사막의 밤 그늘이 지는 언덕 아래에서 어린 왕자와 둘이 마주앉아 모닥불을 피우고 싶다. 모닥불에 피어오르는 아주 약하고 여위고 하얀 연기 한 줄기가 어느 별에 닿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