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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기호학/언어학 > 한국어/한문
· ISBN : 9791198057815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22-11-30
책 소개
목차
여는 글
맛있는 부사가 왔어요
1장 단맛의 부사
간절한 바람을 담은 다디단 부사
기꺼이 – 마음이 내키니 달가이
비로소 – 간절히 닿고 싶은 그 어딘가所
바야흐로 – 도도한 시간이 흘러 흘러
마냥 – 마지막까지 그냥
부디 – 오, 신이시여
2장 짠맛의 부사
삶의 비애가 배어 눈물어린 부사
어이 – 응어리진 눈물이
이토록 – 이슬을 토하도록
오롯이 – 온전하여 고독하니
애달피 – 애처로이 매달린 피
아스라이 – 별처럼 아득히
3장 신맛의 부사
일상의 흐름을 바꾸는 청량한 부사
자칫 – 평균대에서 삐끗한 순간
새삼 – 잠잠한 마음을 새로이
이따금 – 반박음질한 새삼
불현 듯 – 번쩍 하고 빛나는 순간
사뭇 – 아주 달라 너무 좋아
4장 쓴맛의 부사
고난에 맞서는 쓰디쓴 부사
차마 – 마음과 달리 발길이
굳이 – 꼭 그래야만 했니
겨우 – 그것밖에? 그거라도!
도무지 – 숨 쉴 수 없어
차라리 – 어쩌란 말이냐
5장 물맛의 부사
만물을 보듬은 물같은 부사
모름지기 – 모르면 아니 되기
웅숭깊이 – 큰물의 테두리
고즈넉이 – 넋을 놓고
두루 – 온 땅에 평화를
고이 – 꽃이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1장 단맛의 부사 / 기꺼이 ‘마음이 내키니 달가이’
두 팔 벌려 기꺼이
'기어이'가 주먹이라면 기꺼이는 보자기다. '흔쾌히'가 기운찬 폭소라면 기꺼이는 잔잔한 미소다. '꺼이꺼이'가 슬픔에 겨운 통곡이라면 기꺼이는 그 슬픔을 나누는 흐느낌이다. 기꺼이는 함께 웃고 같이 울자며 두 팔 벌려 다가가는 말이다.
'깃들다'라는 뜻의 옛말 '깃겁다'는 흘러 흘러 기쁨이 깃든 '기껍다'가 되었는데, 이때의 기쁨은 모란 폭죽처럼 찬란한 환희보다는 화로 불돌처럼 은근한 달가움에 가깝다. 기꺼이를 뜻하는 영어의 관용어 'With Pleasure'에도 기쁨이 깃든 점은 공교롭고 흥미롭다.
기꺼이는 스스로 기쁠 때도 쓰지만 특히 외부의 요청에 응할 때 자주 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응답할 때의 기꺼이를 다루기로 한다. 가령 너무 멀어 손이 닿지 않으니 식탁 끝에 놓인 깍두기 그릇을 좀 밀어달라는 동생의 눈짓이나 지나는 길이면 경복궁역 앞에 내려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기꺼이는 그러한 청을 기다렸다는 듯 순순하다.
나아가 제주행 비행기에서 창가 좌석을 양보해 달라거나 선물 받은 자전거를 주말에 빌려달라는 부탁에는 잠시 멈칫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바다야 비행기에서 내려 실컷 보면 되고 매양 묶어만 두는 자전거 콧바람 쐬어주면 오히려 고맙지, 하는 마음에 기꺼이 응한다.
이처럼 기꺼이는 칼칼한 하루에 꿀물 한 잔처럼 다디단 말이다. 이왕이면 경쾌한 목소리로 발음해야 그 맛이 살아나고, 거기에 몸짓까지 더하면 비단에 꽃수를 더하는 격이다. 투명 쟁반을 받 쳐든듯두손바닥을하늘향해펼치고,어깨는들썩,두눈은 찡긋, 입꼬리는 한껏 올리며 '기꺼이!'라고 외치면 너나없이 기쁨에 겨워 기꺼워진다.
기어이 품은 기꺼이
영영 달 줄만 알았던 기꺼이인데 어떤 안간힘, '기어이'가 스미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때로 기꺼이는 크고 작은 희생을 동반한다. 밥 한 번 거하게 살 테니 자서전을 대신 써달라거나 수일 내로 돌려줄 테니 기천 만원만 빌려달라는 무리한 부탁에 응하는 기꺼이는 뒷발을 끌 수밖에 없다. 그 부탁이 청을 넘어 간청에 이르고, 그 간청이 진정이라 여겨지면 쇠공달린 사슬을 발목에 묶은 채 기어이 응하고 만다.
'기어기'가 스민 기꺼이의 흔적은 일상의 곳곳에 자욱하다.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 공연을 강행하기로 한 해외 피아니스트의 소식을 전하는 '크리스티안 짐머만, 7일 자가 격리 기꺼이 감수'나 우크라이나 전쟁의 처참한 단면을 비추는 '팔순 할머니도 기꺼이 총 들다' 등의 기사 제목에 등장하는 기꺼이에도 희생이 깃들어 있다.
은둔형 외톨이가 아닌 이상 어느 누가 자가 격리를 기쁘게 여기며, 저격수나 사격 선수도 아닐진대 노령의 민간인이 그저 기쁜 마음으로 기초 군사 훈련에 참여했으랴. 다만 이때의 기꺼이에는 이레의 고난을 달가이 받아들일 정도로 무대에 오르는 환희, 민방위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나라를 지키려 이 한 몸 바치리라는 사명감이 크다는 의미일 테다.
이처럼 기꺼이와 비슷한 뜻의 '즐거이'나 '흐뭇이'를 대입하면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을 마주할 때가 많다. 애초에 그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이윽고 맞이할 더 큰 기쁨을 위해 어떠한 고난이나 수고를 마뜩히 받아들이는 기꺼이에는 그리하여 숭고한 기운이 감돈다.
다만 기꺼이 감수하는 희생은 누군가의 강요나 외부의 압박에 떠밀린 마지못한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내켜서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달갑고 힘차다. 본디 검은 몸이었으나 붉은 온기를 전하 고 하얗게 사그라드는 참숯인 양 진정 원하는 바를 위해 제 한몸 불사르는 기꺼이는 쓴맛이 깃든 단맛, 달콤쌉싸름한 인생의 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