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실 흉배 연구
송수진 | 역락
21,600원 | 20230227 | 9791167424051
흉배(胸背)는 상복(常服)의 가슴[胸]과 등[背]에 부착하여 계급을 나타내었던 표식이다. 백관(百官)의 흉배 제도를 처음 정한 것은 단종 2년(1454)으로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대군(大君) 및 왕자군(王子君)의 흉배 문양을 정하였다. 그리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포함시켜 제도를 명문화하였다. 반면, 왕은 법 위에 있는 존재로 왕과 왕세자에 대한 내용은 법전, 즉 「경국대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왕실의 흉배 제도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왕과 왕세자의 흉배 제도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확립되어 대한제국 시기까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문양으로 왕을 상징하는 용(龍)을 사용하였으며, 발톱의 수를 달리하여 신분에 따른 차등을 두었다. 반면, 왕비와 왕세자빈의 흉배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영조 때 편찬된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서 제도화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전까지는 명(明)에서 사여받은 적계(翟雞) 문양을 사용하였으며, 이후 봉황(鳳凰) 문양을 사용하다 「국조속오례의보서례」에서 비로소 용으로 확정되었다.
왕은 시사복(視事服)인 상복(常服)과 군사복식인 융복(戎服) 및 군복(軍服)에 흉배를 달아 왕의 존엄과 권위를 나타냈다. 왕비는 최고의 예복인 법복(法服)에 흉배를 부착하였으며, 그 밖에 시기에 따라 노의(露衣)와 장삼(長衫), 원삼(圓衫)과 당의(唐衣) 등에도 흉배를 달아 왕실의 권위를 드러냈다.
흉배에 관한 연구는 1960년대부터 지속해서 이루어져 다양한 연구가 축적되었다. 품계에 따른 문양의 종류와 조형성을 분석한 연구와 시대에 따른 제도의 변화를 고찰한 연구가 가장 많으며, 조선의 흉배 제도를 명(明)ㆍ청(淸)의 제도와 비교한 연구도 있다. 또한, 흉배에 사용된 자수 기법을 분석한 연구와 출토 흉배의 보존처리에 관한 연구도 있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의 황족용 용보에 대한 연구와 왕실에서 사용한 군복용 용보에 관한 연구도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들을 통해 오백년 넘게 이어온 조선시대 흉배 제도의 변화 과정을 확인하고, 유물을 감정하는 기준이 세워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구가 문무관의 흉배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왕실 흉배를 포괄하는 연구는 아직까지 미흡한 실정이다. 이는 왕실 흉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시대를 아우르는 연구가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국립고궁박물관은 다양한 소장품을 분야별로 정리한 소장품도록을 연속해서 발간하고 있다. 그중 왕실에서 문양을 직조하거나 수를 놓는 데 사용한 복식본과 금박을 찍는 데 사용한 문양판을 모아 두 권의 책으로 정리하였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창덕궁 소장 수본(繡本)으로 일부 공개되었던 흉배본을 포함하여 100점에 가까운 왕실 흉배본이 총망라되어 있다. 공개된 흉배본은 대부분 19세기 말에 제작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다수의 흉배본에는 육십갑자로 표기한 제작 연대와 용도, 사용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정확한 사용자 추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는 왕실 흉배의 변화 과정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먼저 문헌을 통해 신분에 따른 제도의 변화를 정리하였다. 또한, 최근 공개된 흉배본의 조형성을 분석하여 육십갑자로 표기된 제작 연대를 추적하고 정확한 사용자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어진(御眞)과 진위(眞僞) 여부가 확실한 흉배를 함께 분석하여 시대와 용도에 따른 왕실 흉배의 특징을 정리하고, 이를 종합하여 유물을 감정하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연구 대상은 왕실 구성원이 사용한 흉배로 왕과 왕세자, 왕세손과 그들의 배우자인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이 사용한 흉배를 대상으로 하였다. 이와 더불어 왕의 자녀인 대군과 왕자군, 공주와 옹주가 사용한 흉배와 내명부(內命婦)에 속한 왕의 후궁이 사용한 흉배까지 함께 살펴보았다.
먼저 조선 왕실의 흉배 제도를 성별과 신분에 따라 나누어 제도의 제정과 시행, 변화 과정을 문헌 자료로 살펴보았다. 조선 전기 왕실 흉배 제도는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왕과 왕세자의 흉배는 세종 때 제도를 확립하고 이후 큰 변화 없이 국말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명에서 사여받았던 왕비의 흉배는 임진왜란 이후 직접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과도기를 거쳐 영조 때 제도화되었다. 과도기에 사용한 봉황 흉배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영조 때 편찬한 「국조속오례의보서례」와 「국혼정례(國婚定例)」, 「상방정례(尙方定例)」를 통해 조선 후기 완성된 왕실 흉배 제도를 고찰하였다.
대군과 왕자군의 제도는 「경국대전」 및 이후 증보된 법전을 통해 확인하고, 실제 사용된 흉배는 「가례등록(嘉禮謄錄)」과 비교하여 정리하였다. 한편, 왕의 후궁과 공주ㆍ옹주의 흉배는 제도로 규정된 바가 없다. 그러나 간택 후궁의 가례 절차를 기록한 「뎡미가례시일긔」와 공주의 상장례 절차를 기록한 「명온공주방상장례등록(明溫公主房喪葬禮謄錄)」에 가례 때 마련한 흉배에 대한 내용이 나타난다. 또한, 궁중 행사에 소요된 물목을 정리한 「궁중긔」에서도 흉배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문헌 자료를 통해 제도를 확인한 다음 남아 있는 흉배 유물을 분석하였다. 왕과 왕세자, 그리고 그 배우자가 사용한 용보는 어진과 흉배본, 자수 용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형성 분석을 통해 제작 연대에 대한 묵서가 남아 있는 흉배본의 정확한 제작 시기를 확인하고 용도별 특징과 시대에 따른 변화 과정을 확인하였다. 용보에 비해 남아 있는 유물의 수량이 적은 봉황 흉배는 정확한 사용자가 확인된 유물을 중심으로 도안의 조형성을 분석하여 제작 시기에 대한 단서가 없는 흉배본의 제작 시기를 유추하였다. 대군과 왕자군이 사용한 기린과 백택 흉배는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어 흉배본과 초상화, 국말 사진을 비교하여 변화 과정을 확인하였다. 또한, 왕실 여성이 사용한 ‘壽’자 흉배의 사용례를 살펴보고, 유물과 흉배본을 비교하여 사용 시기를 추정하였다.
흉배와 관련된 용어에는 보(補), 견화(肩花ㆍ肩畵)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면 둥근 흉배를 ‘團胸背’, ‘圓胸背’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문양을 강조하여 ‘龍補’, ‘圓龍補’, ‘圓龍胸背’라 쓰기도 하였다. 둥근 흉배와 구분하기 위해 네모난 흉배는 ‘方胸褙’라고 불렀으며, 왕세손과 왕세손빈이 사용한 것은 ‘方龍補’라 칭하기도 하였다. 또한, 「발긔」에서는 한글로 ‘흉’, ‘룡흉’ 등으로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어깨에 사용한 것을 별도로 지칭한 경우도 있어 한자로는 ‘肩花’, ‘肩畵’라 썼으며, 한글로는 ‘견화’라 하였다. 왕실 흉배를 제작하기 위해 그린 흉배본에는 ‘흉’와 ‘견화’로 구분하여 사용 위치를 묵서로 명시하였다.
현재 용을 장식한 흉배는 관리들의 것과 구분하여 ‘용보(龍補)’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며, 보(補)는 둥근 흉배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용흉배(龍胸背)’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방룡보(方龍補)’라 칭한 경우도 있어 ‘보’가 반드시 둥근 흉배만을 지칭한 용어는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흉배’는 가슴과 등에 부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때로는 ‘견화’를 포함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흉배본의 묵서에 따라 흉배와 견화를 구분하여 분석하였기 때문에‘흉배’를 가슴과 등에 부착한 것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용을 장식한 흉배에 한해 부착 위치에 상관없이 지칭하는 경우 좁은 의미의 ‘흉배’와 구분하기 위해 ‘용보’로 표현하였다.
용보에 시문한 용은 얼굴이 정면을 향하고 있는 것과 측면을 향한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확인해본 결과, 용의 형상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반룡(盤龍ㆍ蟠龍)으로 지칭하고 있다. ‘반룡’은 아직 승천하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을 말한다. ‘盤龍’과 ‘蟠龍’의 차이는 확인할 수 없으나, 모두 둥근 형태로 서려 있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반룡은 주로 정면을 바라보는 용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하지만 영락제(永樂帝)의 초상화를 보면 측면을 향한 용을 가슴과 양어깨에 그려 ‘반룡’이 정면을 향한 용을 뜻하는 것이 아닌, 둥글게 서려 있는 용을 모두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두 종류의 용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용어가 없었던 까닭에 연구자마다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체로 정면을 바라보는 용은 ‘반룡’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앞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정룡(正龍)’으로 지칭한 경우도 있다. 측면을 바라보는 용은 연구자에 따라 ‘승룡(昇龍)’과 ‘행룡(行龍)’, ‘화염룡(火焰龍)’, ‘반룡’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승룡’은 ‘강룡(降龍)’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승천하는 모습을 나타내며, ‘행룡’은 걸어가는 형상에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다. ‘화염룡’은 불을 뿜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사용되는 용어들은 한 가지 기준에 맞춰 용을 표현한 것이 아닌 각기 다른 특성을 부각시켜 명명한 것으로 두 종류의 용을 같은 기준에 맞춰 표현한 용어를 찾기는 어렵다. 본 연구에서는 정면을 바라보는 용은 선행연구에서 많이 사용한 ‘반룡’으로, 측면을 향한 용은 ‘승룡’으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