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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08124806
· 쪽수 : 284쪽
· 출판일 : 2022-05-10
책 소개
목차
머리말 : 피천득의 대화적 상상력 · 5
화보 · 21
I. 대담
1. 〈사회에 해는 끼치지 말아야〉 (이성주 대담, 1991) · 27
2. 〈청빈과 무욕의 서정〉 (김재홍 대담, 1993) · 35
3. 〈민족사의 전개와 초기 영문학 : 피천득 선생을 찾아서〉 (석경징 대담, 1997) · 54
4.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박완서 대담, 1998) · 98
5. 〈세기를 넘어, 문학을 넘어〉 (박미경 대담, 1999) · 111
6. 〈그리움을 찾으러 가는 길〉 (박영선 대담, 2002) · 116
7. 〈여덟 권의 책이 맺어준 인연〉 (리영희 대담, 2003) · 123
8. 〈금아 피천득 선생의 생애와 문학〉 (송광성 대담, 2004) · 136
9.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면 침묵하라〉 (임헌영 외 대담, 2006) · 155
II. 좌담
1. 〈도산을 말한다〉 (김병로, 장이욱, 김양수, 피천득, 박현환, 김경식, 지명관
(사회), 1960) · 163
2. 피천득, 김재순, 법정, 최인호의 대화(2004년 12월 18일) · 179
III. 강연
1. 숙명적인 반려자伴侶者 (2002) · 187
2. 질의응답 · 194
IV. 가상 대담
인생은 작은 인연들로 아름답다 (정정호 대담, 2021) · 201
부록
1. 나의 아버지, 금아 피천득 (차남 피수영과 박소현 대담, 2012) · 265
2. 피천득 선생의 삶과 문학에 대한 평가와 회고 (이창국과 정정호 대담, 2015, 2020) · 269
화 보
책속에서
| 머리말 |
피천득 대화적 상상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사람은 말을 하고 산다. ……
런던에서 제일 먼저 개장한 윌리라는 커피 하우스는 에디슨과 스틸이 만나서 말하던 장소였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공자 같은 성인도 말을 잘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상이 전파 계승된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
나는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추운 날 먼길을 간 일이 있고, 밤을 새우는 것도 예사였다. 찻주전자에 물이 끓고 방이 더우면 온 세상이 우리의 것인 것 같았다. ……
눈 오는 날 다리 저는 당나귀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그림이 있다. 만나서 즐거운 것은 청담(淸談)이리라.
― 피천득 수필 〈이야기〉
올해 2022년은 금아 피천득 선생(1910~2007)이 타계한 지 15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에 편자는 피천득 선생이 직접 쓰신 ‘글’들을 모두 모아 《피천득 문학 전집》(전 7권)을 책임 편집하여 출판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집의 별권 형태로 피천득 선생이 생전에 ‘말’로 행하신 강연, 대담, 좌담을 묶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말은 기록된 글과 달라서 보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글과 말은 쓰임새가 서로 다르다. 어떤 경우는 말이 글보다 더 직접적이고 전달력과 생명력이 많을 수 있다. 어떤 경우는 글보다 말에 더 권위와 중요성이 부여되는 경우가 있다. 공자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말씀중심주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작가가 글로 남기지 못한 또는 글로 남기기 어려운 사항들은 말로 남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면에서 말로 수행된 강연, 대담, 좌담은 글 못지않게 중요하다. 한 사람의 말과 글은 결국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이제 문학 전집과 대화집을 모두 모았으니 피천득 선생님의 글과 말이 모두 모이게 된 것이리다.
피천득의 삶과 문학의 인식 구조는 ‘대화적 상상력’이다. 우리는 흔히 피천득의 삶이 단순, 소박하고 문학은 쉽고 짧아서 역사와 사회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금아의 삶과 문학의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보이는 피천득의 문학세계는 압축과 절제 속에 있다. 억압된 것은 언제나 되돌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피천득의 문학의 표면에서 볼 수 없는 심층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새로운 역동적 대화 구조를 볼 수 있다.
피천득은 10세 이전에 양부모를 여의고 어려서 서당에 다니면서 《통감절요》를 3권까지 읽었다. 1926년에 상하이로 가서 영미계 미션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접하며 《성경》도 읽었다. 1930년대 중반 금강산에서 승려가 되기 위해 1년간 《유마경》과 《법화경》을 읽었고 80대가 다 되어서 가톨릭교에서 프란치스코란 세례명을 받았다.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로 부임한 후 서울대 사범대에서 영문학 교수로 조기 퇴임하였다. 혼란의 해방 공간과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겪고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통한 군사 독재를 체험하고 문민정부의 시작을 보았다. 88 서울올림픽과 2002 월드컵 경기까지 몸소 체험하며 98세라는 당대로는 보기 드물게 장수하였던 문인이자 학자였다.
피천득의 삶과 문학은 지난 100년 이상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모든 상황들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겉보기에 단아한 세계의 상부 구조는 다양체라는 하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다양체의 씨줄과 날줄로 엉킨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그리고 치밀하게 풀어내야 할 것이다. 그의 사유의 역동적 구조는 다른 말로 하면 ‘대화적 상상력’을 가진다.
앞으로 우리는 피천득의 대화적 상상력의 실체를 그의 문학, 사회, 정치, 철학, 종교적 차원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피천득의 시와 수필은 단순 구조만을 보여주지만 우리는 그 밑에 깔려 있는 복합체를 인식해야 한다. 피천득은 일상 대화에 이러한 역동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그의 대화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부터 피천득의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대화(이야기)를 찾아보자.
대화는 독백과는 달리 두 사람 간의 말의 교환이다. 교환 과정에서 다양한 변수가 작동될 수 있다. 어떤 특정 주제에 대해 의견 차도 있을 수 있고 대담자의 개인적인 목적이나 취향에 따라 피대담자를 유도할 수 있기는 하지만 결국 공감과 차이를 조정하는 과정이 개재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역동적 과정에서 두 사람 간의 진정한 대화적 상상력이 작동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실린 대담, 좌담에서 피천득의 글에서 얻을 수 없는 수많은 느낌과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말’은 혼자 하는 말인 독백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하는 상대자와 함께 ‘대화’하는 것이다. 독백도 사실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기도도 신과의 대화이다. 어떤 ‘이야기’도 말하는 사람이나 작가는 이미 언제나 그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청자나 독자를 상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이나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모두 발신자와 수신자를 토대로 ‘대화’라는 의사소통하는 방식하는 하나이다.
피천득이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중반 이후까지 오랫동안 상하이의 후장 대학에서 유학 중에 가장 기다린 것은 편지였다. 〈기다리는 편지〉란 수필에서 피천득은 고국에서 오는 편지를 애타게 기다렸으나 오지 않는다. 아버지를 7살에 잃고 어머니는 10살에 돌아가시어 천애고아가 되었고, 변변한 친척도 없었던 피천득은 도대체 누구의 편지를 기다렸을까? 친구일까? 또는 어떤 여성일까?
나는 오지 않는 편지 한 장을 기다립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다렸습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는 기다리려고 합니다. 이곳은 상해 시가지서 7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양수포(揚樹浦)인 고로 교내(校內)에 조그마한 우편소가 있습니다. (……)
읽던 책 덮고 강물을 바라볼 때 밤 깊게 캠퍼스를 거닐 때 어디서인지 화륜선이 떠오면 그 배에는 내 편지가 실렸으리라고 아니 못한 나그네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아마 나더러 미쳤다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밤이 되면 내일은 편지가 오리라는 희망으로 자리에 나갑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오늘은 오리라는 기쁨으로 일어납니다. 기다리는 이 편지가 앞날 어느 때에 올는지 영영 아주 오지 않을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를 기다리는 희망이 없이는 하루라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오지 않을 편지를 기다린다는 것은 피천득에게 어떤 의미인가? 편지란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지인과의 대화의 장으로서 가장 확실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 피천득이 유일한 대화 수단인 편지가 올 가능성도 없는데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아마도 1920~30년대 일제강점기의 모국어 말살 정책과 아울러 소통 부재의 비극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대화나 의사소통 부재의 답답한 현실을 표현한 것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어떤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표상일 수도 있다.
편지를 못하던 시대를 그린 피천득의 시가 있다.
떨어져 사는 우리
편지조차 못 하리니
같은 때 별을 보고
서로 생각하자 했네
깊은 밤 흐린 하늘에
샛별 찾는 이 마음 (〈이 마음〉 1연)
편지로 소통이 어려우면 같은 때 ‘별’을 보고 서로 생각하고 마음을 소통시키고 새벽녘의 ‘샛별’ 때까지 잠 못 자고 기다린다. 우주 저편 은하수의 별들은 오래전부터 지구와 가까이에 있는 달과 더불어 태곳적부터 인간들과 대화의 상대였고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대화 매개체였다. 피천득은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수필 〈로버트 프로스트Ⅱ〉)이었고 찰스 램은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수필 〈찰스 램〉)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편지를 써도 보낼 곳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의 시 〈편지〉를 읽어보자.
오늘도 강물에
띄웠어요
쓰기는 했건만
부칠 곳 없어
흐르는 물 위에
던졌어요. (전문)
편지를 부칠 곳이 없는 경우는 상황상 편지 교환이 안 되는 경우보다 나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는 달이나 별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대화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이 봉쇄된 경우이다. 어떤 경우일까?
피천득은 말하기 또는 대화하기를 즐겼다. 그는 누구를 만나도 점잖은 척하며 일부러 침묵을 지키지 않고 그렇다고 대화를 주도하기 위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항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침묵은 말의 준비 기간이요, 쉬는 기간이요, 바보들이 체면을 유지하는 기간이다. 좋은 말을 하기에는 침묵을 필요로 한다. 때로는 긴 침묵을 필요로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요, 농도 진한 맛을 아껴서 한다는 말이다. 말은 은같이 명료할 수 있고 알루미늄같이 가벼울 수도 있다. 침묵은 금같이 참을성 있을 수도 있고 납같이 무겁고 구리같이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금강석같은 말은 있어도 그렇게 찬란한 침묵은 있을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은 말로 이루어지고 말로 깨졌다. (수필 〈이야기〉)
피천득은 침묵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웅변이 필요하며 침묵과 말의 조화를 믿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말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언어)이 없다면 문학도 없고 나아가 인간 문화와 문명 자체가 불가능하다.
허튼소리나 쓸데없는 말이 아닌 “농도 진한 말을 아껴서 한다”는 것이 피천득의 방침이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빨리 하여 위엄이 없다고 일러주는 친구가 있다. 그래 나는 명성이 높은 어떤 분이 회석(會席)에서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눈만 꿈벅꿈벅 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 흉내를 내보려 하였다. 그랬더니 이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하여 나는 그 노릇을 다시 안 하기로 하였다. (수필 〈낙서〉)
피천득은 만년에도 대화할 때 활기차고 명랑한 어조로 말하기를 즐겨했다.
그의 시 〈장수〉에서 그의 목소리가 잘 드러난다.
회갑 지난 제자들이 찾아와
나와 같이 대학생 웃음을 웃는다
내 목소리가 예전같이 낭랑하다고 (1~3행)
제자들과 대화하는 80세가 넘은 노 교수의 목소리는 대학생처럼 낭랑하기만 했다.
결국 언어 예술인 문학은 작가와 독자 또는 세상 사이의 대화이다. 나아가 문학은 자연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諷諭)하게 하여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耘谷)의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나무를 눈여겨보게 된 것은 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이다. (수필 〈순례〉)
편자는 피천득의 이러한 인간, 사회, 자연과의 대화 의식을 ‘대화적 상상력’이라 부르고 싶다. 이러한 대화적 상상력은 결국 주체와 대상 간의 공감으로 이어지므로 자연과의 대화인 정경교융(情景交融)은 문학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이 되는 것이다.
의사소통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물이 과거의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경우도 있다. 피천득의 시 〈파이프〉를 보자.
지름길에서 한들거리던 코스모스
건널목에서 웃고 있던 아이의 더러운 얼굴
“잊지는 마세요” 하던 어떤 여인의 말
파이프는 오래전 이야기들을 한다. (2연)
밖은 유리창을 흔들 정도로 눈보라 치는 밤에 벽난로에서 장작이 활활 타오른다. 시의 화자는 쌈지와 파이프를 꺼낸다. 갑자기 파이프는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거의 어떤 시각적 광경, 청각적 기억, 후각적 냄새 등이 과거의 장면을 생생하게 부활하고 재연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다. 시의 2연에서 시인은 파이프를 통해 ‘코스모스’, ‘아이의 더러운 얼굴’, ‘어떤 여인의 말’과 관련된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벽난로 앞의 파이프는 과거와의 대화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이끌어 내고 있다.
피천득이 영문학자로서 한국 문학에 크게 기여한 것은 영시의 한국어 번역이다. 그는 셰익스피어, 블레이크, 위즈워스, 로제티, 프로스트 등 여러 시인들의 주옥 같은 명편들을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옮겼다. 번역이란 것도 기본적으로 외국어(출발어)와 모국어(도착어) 사이의 대화이다. 외국 문학 번역은 외국 시인, 작가와 한국 독자들과의 대화의 통로를 여는 작업이다. 피천득은 번역시집 《내가 사랑하는 시》(2008)에 붙인 〈서문〉에서 자신이 외국의 시를 번역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외국의 시를 보다 많은 우리나라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시를 번역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시인이 시에 담아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마치 우리나라 시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번역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나라 말로 쓰인 시를 완전하게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에는 그 나라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감성과 정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에 능통해서 외국의 시를 원문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독자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쉽고 재미있게 번역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번역문학가 피천득의 번역은 작가의 의도보다는 독자 중심 번역이다. 과감한 의역으로 자연스러운 번역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는 쉽고 재미있는 번역이다. 이러한 번역은 한국 독자와 외국 작가의 대화를 원활하게 할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인으로서의 피천득과 번역 문학가 피천득이 서로 “대화”하는 상보적인 관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피천득은 만년에도 몇몇 친구와 꾸준히 만났다. 98세까지 장수하며 주로 책 읽기, 음악 듣기, 명화 감상, 산책 그리고 문인 친구나 후배 또는 제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 놓이는 친구가 없는 것같이 불행한 일은 없다. 늙어서는 더욱 그렇다. 나에게는 수십 년간 사귀어 온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둘 세상을 떠나 그 수가 줄어간다. 친구는 나의 일부분이다. 나 자신이 줄어가고 있다.
나 죽을 때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던 친구가 멀리 가버리기도 하였다. 다행히 지금 나에게도 일주일에 한 번쯤 만나는 친구 몇 분이 있다. 만나서 즐기는 것은 청담뿐이 아니다. 늙는 이야기, 자식 이야기, 그런 것들이다. 때로는 학문의 고답한 경지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어느덧 섹스가 화제가 되어 소리 내어 웃기도 한다. (수필 〈우정〉)
대화 중에 친구들과의 대화가 가장 즐겁고 자유롭다. 늙어가면서 주위에 격의 없는 대화나 농담을 나눌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피천득의 대표 시의 하나인 〈이 순간〉에 친구들과 대화하기를 찬양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3연)
이 시는 피천득의 “순간의 미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 순간 친구들과 웃으면서 대화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사실일 뿐이다.
대화적 상상력을 통해 피천득은 어떤 인식론적 효과를 얻었는가? 첫째 ‘소극적’인 태도의 문체이다. 피천득의 경우 소극적은 ‘적극적’의 반대말이고 부정적 반대어는 아니다. 적극적이란 능동적이고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나를 비워야 나라는 주체 속에 타자라는 객체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시공간이 생겨난다. 둘째 대화란 ‘연한 마음’을 가져올 수 있다. ‘강한 마음’은 흔히 경직되고 억압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대화를 통한 연한 마음은 부드러움, 이해, 용서, 포용을 가져올 수 있다. 셋째로 무엇보다도 대화는 적극적과 다르게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공감을 불러오는 타자적 상상력이 용이하다. 따라서 대화는 그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든 자연과의 관계든 소통, 교류, 이동, 변화를 가능케 한다.
피천득의 대화록은 그가 쓴 시, 수필, 산문, 번역에서 제외되었던 강연, 대담과 좌담회에서 언명된 것으로 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들이다.
이 책은 일대일 대담 9편과 좌담 2편 그리고 강연(질의응답 포함) 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러나 일부 대담은 게재 허락을 받지 못해 이곳에 포함시키지 못해 매우 아쉽다. 다음 기회에는 수록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의 제목이 대화록이지만 여기에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강연도 한 편 들어 있고 새로운 시도로 피천득 선생님과 필자와의 가상 대담도 넣었다. 부록에 피 선생의 차남 피수영 박사와 박소현 수필가가 한 대담을 넣었다. 또한 피천득 선생의 애제자이며 수필가인 이창국 교수와 편자의 대담도 실었다.
지난 수년간 이 대화집을 엮는 데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피천득 선생의 차남 피수영 박사의 관심과 격려에 감사를 드린다. 또한 평소에 편자를 아끼며 지도해 주시는 이창국 교수님께도 인사드린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엮는 데 적극적으로 도아주시고 흔쾌히 재수록을 허락해 주신 여러 대담자 여러분들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금아피천득선생기념사업회 조준행 회장님과 김진모 사무총장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피천득문학전집간행위원회 변주선 위원장님, 이희숙, 김선웅, 안현기 수석부위원장님, 총무 최성희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범우사 윤형두 회장님, 윤재민 사장님 그리고 김영석 실장님, 신윤정 기자, 윤실, 김혜원 대리에게도 머리 숙인다. 이 책 한 권 묶어 펴내는 데도 모든 것들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다. 아무쪼록 이 대화집이 독자들에게 피천득의 삶과 문학과 사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