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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25811291
· 쪽수 : 254쪽
책 소개
목차
1. 나의 벽장
2. (가짜) 신혼 생활
3. 야마자키 제7빌딩의 사람들
4. 밤을 걷다
5. 하나 짱과 비스킷
6. 강변에서 노래 부르다
7. 남매 경연
8. 아빠와 만나다
9. 물총
10. 한밤중, 편의점에 가듯이
책속에서
달빛을 켜듯이,
세상을 조금은 밝힐 스위치가 있다면…….
인간은 이따금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한다.
진지하게 살고 있다거나, 그렇지 못하다거나 그런 것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진지하더라도, 아니,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만다. 누구 때문도 아니다. 누구 잘못한 것도 아니다.
인간 따위, 어차피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생물인 것이다.
카오리, 그녀 역시 불륜이라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만다. 그렇게 바라던 남자와 잠깐의 신혼 생활을 하게 되지만, 평온한 일상 속의 그녀는 오히려 불안하기만 했다. 벽장 안에서밖에 잠을 청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벽장만이 그녀가 있을 유일한 장소이자, 작디작은 대피소였다.
하지만 어둠 속의 그녀에게도 빛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특별하게 다가온다.
어딘가 결여돼 있기에, 자신의 인생이 결코 행복하다 생각하지 않기에, 그들은 그녀의 잘못을 크게 나무라지도,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저 은은한 달빛처럼 그녀가 잘못 든 길에 조용히 빛이 밝혀 줄 뿐이다.
이제 빛을 밝혀 줄 그 스위치를 켜느냐 마느냐는 그녀의 선택이자, 독자의 선택인 듯하다.
세이 짱과의 생활은 편했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나를 배려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중략)
다만 문제가 됐던 것은 자는 장소였다.
첫날, 아무 생각 없이 세이 짱과 침대에 누웠는데, 눕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커다란 킹 사이즈 침대는 그가 아내와 살았을 때부터 사용하던 것이겠지.
(중략)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서로 몸을 포개어도 평소만큼 기분 좋은 느낌을 얻을 수 없었다.
계단을 잘못 올라간 듯한 느낌이었다.
세이 짱은 곧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지만, 나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꿈에서도 그려 온 일상. 세이 짱과 쭉 함께 지내는 생활.
그런데 왜 잠들지 못하는 걸까……. - 51~52쪽 중에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벽장 안에 들어가 있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나는 벽장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세이 짱이 없을 때는 줄곧 벽장 안에서 지냈다.
그의 아내가 고른 조리 기구. 그가 아내와 신혼 생활을 보냈던 방. 온갖 장소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점령하고야 말았다는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녀의 흔적들에 서서히 눌려 죽을 것만 같은 마음만이 늘어 가고 있었다.
벽장만이 내 보금자리였다.
그곳에 틀어박혀 문을 닫아 버리면 그저 따뜻한 어둠만이 나를 감쌌다. - 171~172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