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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32044262
· 쪽수 : 159쪽
· 출판일 : 2025-07-23
책 소개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하는 이 시리즈는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2023년 한 편의 ‘흑백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으로 새 단장을 마친 〈문지 에크리〉는 영화의 스틸 컷 같은 앞표지 사진,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을 연상케 하는 실선의 배치 등을 통해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명암을 통해 등장인물의 감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흑백영화처럼 오직 ‘쓰는’ 행위를 조명함으로써 작가의 사유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문지 에크리〉는 무엇, 즉 목적어의 자리를 빈칸으로 남겨놓는다. 작가는 마음껏 그 빈칸을 채운다. 어떤 대상도 주제도 될 수 있는 친애하는 관심사에 대해 ‘쓴다’. 독자는 장르적 경계를 훌쩍 넘어서는 〈문지 에크리〉 안에서 문학작품으로만 접해온 작가들의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시절의 기억을 지닌 채 놀이터를 떠나지 못하는
어린 영혼이 당신에게도 있는지”
부서진 시소 한끝에 걸터앉아 놀이하며
가만한 우정을 건네는 당신 안의 유령,
시인 이기성 첫 산문집
정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삶 곳곳에 어룽진 상흔을 응시하는 시인 이기성의 첫 산문집 『놀이터의 유령』이 문학과지성사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의 열한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집 여섯 권과 평론집 두 권을 펴내며 꾸준히 독자와 소통해온 문학인으로서 열어 보이는 글쓰기에 대한 고백, 도시 풍경마다 스며 있는 고독과 소외, 금지되고 난파된 언어를 둘러싼 단상 등을 폭넓게 다룬 산문 20편을 묶었다.
『놀이터의 유령』에는 장르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장들이 선연하게 얼크러져 있다. 시와 산문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픽션적 구성과 비평적 사유는 자유로이 연결된다. 어떤 사건의 장면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리포트 같기도, 자신의 우연한 수신인이 되어줄 상대를 찾아다니는 아주 내밀한 편지 같기도 한 이기성의 글 속에서 다층적인 문학의 언어가 태어나고, 이는 현실의 언어와 끊임없이 맞물린다. 마음껏 몽상하는 창조와 힘차게 뛰어노는 역동이 파괴된 폐허에 끝까지 남아 있을 최후의 놀이기구가 있다면, 언어를 축으로 하여 문학과 현실을 잠시간 넘나드는 시소가 아닐까.
시소는 공중을 오르내리며 “궁극적으로 부재하며 충만한 유령의 언어”(「검은 식당에서」)로 유령을 불러내 제 한쪽 끝에 앉힌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가라앉고 설핏한 어둠이 내려앉으면 나릿하게 깨어나 자신만의 놀이에 침잠하는 유령. 이번 산문집의 표제로 삼은 산문 「놀이터의 유령」에서 이기성은 동료 시인 김경후의 시를 경유함으로써 이 ‘놀이터의 유령’을 만난다. “추억할 만한 슬픔도 없는데/몸의 구멍마다/이상한 울음이 자꾸 쏟아진다”(‘시인의 말’)라는 말로 첫 시집 『불쑥 내민 손』(문학과지성사, 2004)의 포문을 열었던 이기성이 “성대가 발화 기관이 아니라 울음의 기관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김경후의 시에 공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놀이터의 유령」은 독자와 비평가 사이에 오가는 대화적 목소리를 빌려 김경후의 시 세계를 집중 분석 하고 있지만, 이를 비단 특정 시인 한 명에 대한 서술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활짝 부풀린 커다란 성대를 가진 그녀”의 외연은 점차 “울음을 분출함으로써 슬픔에서 놓여나기보다는, 그것을 삼킴으로써 슬픔 속에 거주하기”를 택한 “유령-시인”들, 나아가 글을 읽고 쓰는 모두로 확장된다.
세상의 놀이법을 거부하고 자신의 놀이법을 따라 놀기. 터질 것 같은 울음을 기어이 참아내며 놀기. 노동하듯 성실한 태도로 놀기. 그럼으로써 쓸쓸하되 황홀해지기. 놀이터의 유령에게서 가없는 애틋함을 느끼는 이상, 이기성의 “이 외롭고 집요한 놀이-노동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요즘의 이상한 날씨」)이다.
망각의 그늘에 묻힌 빛을 되살려내는 투명한 몸
그 빛을 거쳐 또다시 찾아온 공허를 맞닥뜨리는 일에 대하여
아이는 떠돌이 광대였으며, 늙은 도서관의 사서였고, 금지된 책이었으며, 국적을 잃은 공산주의자, 아이를 잃고 전쟁터를 떠도는 여인, 미라가 된 공주였고, 그녀의 아름다웠던 애인, 목이 잘린 경비원, 이국의 노동자, 딸을 잃은 어미였고, 난파된 광장의 소녀였습니다. 되돌아온 계엄령이었고, 어둠 속 점점이 밝혀진 촛불이었고, 심장병을 앓는 우체부였고 그의 눈물이었고, 찢어진 연애편지, 폐결핵에 걸려 죽어가던 시인, 그가 밤길에 만났던 도깨비. 아이는 그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들의 목소리였으며…… 그리고 마침내 놀이터의 유령…… (‘후기’에서)
오직 유령만이 포착하여 붙들 수 있는 생의 한 부분이 있다. 유령은 허공의 부유물로서 고적한 공기를 감각하고, 비정형의 존재로서 서서히 소멸되어가는 흐릿한 형상을 알아보며, 떠도는 혼령으로서 죽음을 곁에 둔 영혼을 어루만진다. 도시의 창살과 벽을 통과하며 유령이 마주하는 이 모든 것을 ‘그늘’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전면에 드러나 있지 않은, 그래서 잊히고 만 어둑한 삶의 그림자.
주름처럼 자리한 오랜 상처 이전에 폭력이 있었으리라는 것. 구속에 익숙해진 육신 이전에 생동이 있었으리라는 것. 열기가 식은 잿더미 이전에 불덩이가, 좌초되고 남은 파편 이전에 열망이 있었으리라는 것. 이제는 노래와 이야기를 잃은 듯한 그늘의 메마른 면면에도 수많은 전사(前史)가 도사리고 있음을 유령은 안다. 그 누구도 아니기에 “모든 것들의 목소리”(‘후기’)가 될 수 있는 그것이 제 투명한 몸을 그늘에 겹치는 순간 “촘촘한 시간의 박음질 속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시작”(「나의 동물원」)되고, “슬픔 가득한 세계에 대한 울분, 불면의 시간들, 겨울 광장의 촛불들과 끝끝내 채워지지 않던 백지에 대한 이야기들”(「놀이터의 유령」)은 비로소 형형히 빛난다.
그늘에 서려 있던 이야기가 끝나고 유령이 열어젖힌 미약한 빛마저 사그라지고 나면, “기필코 그 속의 텅 빈 어둠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다”(「나의 동물원」). 공허라는 더 짙은 이름으로 돌아온 어둠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당신과 내가 먼 세기의 연인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그러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앉아 있는 여기는 어떤 공허의 내부”이며, “영원한 허기, 공백, 그 텅 빔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검은 식당에서」). 아이들이 자취를 감춘 뒤에도 차마 놀이터를 떠나지 못하는 유령이 건넨 우정은 어느새 필연하고 영원한 숙제가 되어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
목차
아버지의 책
코끼리
북쪽 시인
벨트
화염의 박물관
어제의 편지
벽 속의 남자
어떤 침묵
수요일의 편지
올페, 실패한 시인
요즘의 이상한 날씨
연인
멸종
나의 동물원
놀이터의 유령
꿈을 놓치고
너의 비밀을 보여줘
불면의 시
고아떤 삼양동
검은 식당에서
후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K가 시인인 것을 안다. 그는 오랫동안 남몰래 시를 썼고, 그의 시가 씌어진 공책은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K는 밤낮으로 시를 생각하고 그것을 옮겨 적는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는 시. 말하자면 나는 그의 유일한 독자인 것이다. 선의에 가득한 독자로서 나는 그의 시를 사랑한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향기롭고 부드러운 맛을 가지고 있다. 딱 한 번 앞니가 부러질 뻔한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크리스마스 쿠키를 먹듯이 나는 그것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밤새도록 사각사각…… 검은 글자가 사라진 공책은 처음의 백지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K는 무한히 쓸 수 있고 나의 배고픔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K와 나는 쓰기-지우기라는 공동의 작업을 수행하는 멋진 한 쌍이 아닌가. (「연인」)
—저녁엔 축제가 있었답니다. 모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죠. 누구나 달콤한 사탕처럼 빨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죠. 향기로운 술과 화려한 웃음이 거품처럼 넘치는 시간 말이에요. 그런 날엔 사람들은 우리 속에 있는 코끼리를 잊어버리죠. 그러나 축제는 끝이 나고 음악은 꺼지고 이제 텅 빈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어둠으로 가득한 현관에 서서 오랫동안 가방 속의 열쇠를 뒤적거리죠. 그들은 알지 못해요. 망설임 끝에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잿빛 코끼리를 보게 되리라는 걸. (「나의 동물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봄이 다가와 있어. 너는 숨을 죽이고 꽃이 피는 것을 기다려. 하지만 천변의 나무들은 아직 고집스럽게 웅크리고만 있어. 회색 하늘 아래서 자신의 비밀을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이 확신에 찬 몸짓으로 겨울의 외투를 확 벗어 던지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거야. 세상의 모든 비밀이 왈칵, 피어오르는 순간, 지상의 모든 빛깔들이 일시에 난만하게 터져 나오는 그 순간이.
그리고 그때 우리는 무엇을 말하게 될까, 밤의 새하얀 입술로. (「검은 식당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