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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액션/스릴러소설 > 외국 액션/스릴러소설
· ISBN : 9788932915210
· 쪽수 : 392쪽
책 소개
목차
제1장 독자적 억지력
제2장 냉각 필터
제3장 데스폿
제4장 주사
제5장 헐벗은 불꽃
제6장 엑조세 갑판
제7장 유럽의 빛
제8장 아군 오발
제9장 성장
제10장 스펠 저지대
제11장 석판
제12장 바스라 로
제13장 죽어서야 잠들리
옮긴이의 말_사회 도처의 부조리와 폭력에 대한
뱅크스의 신랄한 비판
리뷰
책속에서
한마디 하려는데 전화기가 울린다. 외선 전화다.
프랭크는 미소를 지으며 볼펜을 흔들어 전화기를 가리킨다. 「우리의 아처 씨 전화인지도 몰라.」
나는 자리에 앉아 수화기를 든다. 전화 감이 엉망이다.
「콜리 씨?」 기계적인 목소리, 마치 합성음 같다. 아처 씨가 분명하지만 스티븐 호킹과 통화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을 정도다. 나는 녹음기를 틀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후 마이크 장치를 수화기에 붙인다.
「네, 콜리입니다. 아처 씨?」
「그래요. 내 말 잘 들어요. 새로 알려 줄 정보가 있어요.」
「그래야죠, 아처 씨.」 내가 말한다. 「저도 갈수록 ─」
「오래는 통화 못 해요, 이 전화로는.」 기계적인 목소리가 말을 잇는다. 「장소부터 받아 적어요.」
나는 연필과 메모지를 낚아챈다. 「아처 씨, 설마 이번에도 한바탕 ─」
「랭홈, 브런트실 로. 공중전화. 같은 시간.」
「아처 씨, 그건 ─」
「랭홈, 브런트실 로. 공중전화. 같은 시간.」 목소리가 반복해 말한다.
「아처 씨 ─」
「그때 이름 하나를 알려 드리죠, 콜리 씨.」 목소리가 말한다.
「무슨 ─」
신호가 죽었다. 나는 수화기를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마이크 장치를 떼기 시작한다.
「그날 저녁엔 아무도 안 만났습니까?」 맥던이 묻는다.
「이봐요, 전 여기 에든버러에 있었다고요. 웨일스 <근처에도> 안 갔어요. 여기서 웨일스까지 어떻게 갔다 왔다 한단 말입니까?」
「콜리 씨에게 혐의가 있다는 건 아닙니다.」 맥던 반장이 기분 상한 말투로 얘기한다. 「그날 저녁 <아무도> 안 만났어요?」
「네. 집에 있었어요.」
「혼자 사시나요?」
「네. 일 좀 하고는 밤새 데스폿이란 게임을 했어요.」
「찾아온 사람도, 콜리 씨를 봤을 법한 사람도 없어요?」
「네, 없어요.」 나는 그날 저녁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 애쓴다. 「전화가 오긴 했어요.」
「그게 몇 시경이었죠?」
「자정요.」
「누구 전화였는데요?」
나는 주저한다. 「저기 말이에요.」 내가 말한다. 「날 기소하려는 겁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정말 어이없기는 하지만 변호사부터 부르는 게 ─」
「아무 혐의도 없고 콜리 씨를 기소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맥던 반장이 합리적이되 조금 불쾌한 목소리로 말한다.
욕조에 앉은 젊은 남자 혹은 여자는 고개를 젖히고 다시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여자 같다. 목선이 매끄럽고 후골도 보이지 않는다.
너는 라디오 전선으로 다시 눈길을 던진다.
입이 탄다. 어찌한다? 힘 하나 안 들이고 단방에 처치할 수도 있다. 그럼 모든 게 수월해질 테지. 마치 운명이 네 귀에 대고 <이것 봐, 내가 널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고> 하고 속삭이는 것 같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후딱 처리해 버려. 이 남자 혹은 여자의 정체가 뭐건, 아래층의 남자와 연관된 이상 저놈의 실체를 알아야 마땅하잖아.
그래도 결단이 서지 않는다. 이건 네 원칙을 거스르는 행위, 애초에 정한 작전 범위를 위반하는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원칙을 따라야 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전시에도 법을 따라야 하지 않나. 이거야말로 운명의 시험일지 모른다. 일종의 리트머스 실험으로서, 장애물을 간단히 비껴갈 방법을 제시하는 척 굴며 실제론 네가 본색을 드러낼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만일 여기서 쉬운 길을 택한다면 그 순간 너는 시험에서 낙방할 테고, 한번 실패한 이상은 어떤 수로도, 제아무리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결연하고 정당하게 행동한다 한들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스스로 행운을 저버린 셈이라 더 이상의 요행을 바랄 수도 없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