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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하늘 세트

[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하늘 세트

김억, 김소월, 한용운, 정지용, 김영랑, 백석, 김상용,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지은이), 이남호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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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하늘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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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큰글자도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하늘 세트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971179
· 쪽수 : 1240쪽
· 출판일 : 2023-04-03

책 소개

한국시사 10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맞으며 출간한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세트. 한국 현대시사에서 20세기 초는 시대적 고통과 개인의 천재성이 만나 탁월한 시집이 다수 출간된 시기이다.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시리즈는 당대 시인들이 남긴 시집을 엄선했다.

목차

해파리의 노래
진달래꽃
님의 침묵
정지용 시집
영랑 시집
사슴
망향
청마시초
백록담
청록집

저자소개

김소월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고 그곳에서 성장하고 생활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기적 사실을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회고담이나 신문 잡지에 난 관련 기사를 통해 그의 생애를 재구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소월의 본명은 정식(廷湜)으로 1902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남산학교를 졸업하고 14세 때 세 살 연상인 홍실단(원명은 홍상일)과 결혼했으며 상급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3년간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1917년 오산학교 중학부에 입학해 수학하던 중 은사인 김억을 만나 시를 쓰게 되었다. 오산학교를 다니던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급생들과 함께 만세 운동에 참여해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오산학교도 임시 폐교되었다. 1920년 스승인 김억의 주선으로 ≪창조≫에 <낭인의 봄> 등의 시를 소월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작품은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춘강(春崗)> 등 다섯 편이고 그 후 ≪학생계≫, ≪동아일보≫ 등에 작품을 발표했으나 소월은 이 초기의 작품들을 시집에 수록하지 않았다. 소월은 오산학교에 이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 서울로 이주해 1922년 4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1923년 3월에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학자금 조달에도 어려움이 있고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10월에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1924년에 김동인, 이광수, 김억, 주요한, 김찬영, 전영택, 오천석 등과 함께 ≪영대≫의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5년 12월 26일 자로 시집 ≪진달래꽃≫을 간행했다. ≪진달래꽃≫은 상당히 판매가 되었는지 발행처는 같은 매문사로 되어 있지만 총판이 ‘중앙서림’으로 되어 있는 것과 ‘한성도서주식회사’로 되어 있는 것의 두 판본이 유통되었고 그 원본이 각기 현재 전해지고 있다. 1924년 이후에는 그의 처가가 있는 평안북도 구성군 남시로 이주해 생활했으며 1926년 8월부터 동아일보 지국 일을 맡아 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1년에 한두 편씩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과 1933년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1934년에 다시 몇 편의 시를 발표했으나 그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던 것 같다. 지국 경영은 일찍이 작파해 남에게 넘겼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한 울분이 겹쳐 거의 매일 술을 마셨으며 아내에게 살아 봐야 낙이 없으니 같이 죽자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1934년 12월 23일 밤에도 술에 취해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남편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잠결에 듣고 불을 켜 보니 아편 덩어리를 입가에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의 사망 일자를 1934년 12월 24일 아침으로 보고 있다. 소월의 사망이 알려지자 12월 30일 자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에 사망 관련 기사가 실리고 1935년 1월에 서울 종로 백합원에서 소월 추모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김억은 소월에 대한 추모사를 낭독하고 그것을 ≪조선중앙일보≫(1935. 1. 22~26)에 <요절한 박행의 시인 김소월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1939년 12월 김억이 소월의 시를 선정하고 다시 편찬해 박문출판사에서 ≪소월시초≫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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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김영랑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이다. 영랑永郞은 아호인데 《시문학詩文學》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했으나 불과 1년 반 만에 부인과 사별했다. 그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 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이 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후 고향에 머물렀다. 1925년에 개성 출신 김귀련과 재혼했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했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냈으며,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했다. 9·28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길에서 유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작품이 실린 《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 《영랑시선》(1949),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198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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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16년 1월 6일,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부친 박준필(朴準弼)과 모친 박인재(朴仁哉)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고성이지만, 본적지는 경상북도 월성군 서면 모량리(毛良里) 571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영종(泳鍾)인데 동시를 지을 때는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계성중학교 재학 중에 동요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1933년, 윤석중(尹石重)이 편집하던 ≪어린이≫란 잡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이란 여성 잡지의 현상 공모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어릴 적에 누구나 애송했던 이 동요도 목월의 동시인 <얼룩송아지>를 가사로 하고 있다. 목월은 1939년 9월호에 <길처럼>과 <그것은 연륜(年輪)이다>로 첫 번째 추천을, 같은 해 12월에 <산그늘>로 두 번째 추천을, 그리고 1940년 9월에 <가을 어스름>과 <연륜(年輪)>이란 시로 세 번째 추천을 받고 공식적으로 시단에 등단했다. 후세에 남겨진 박목월(朴木月)이란 이름은 목월이 ≪문장≫지에 응모할 때 본인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작명할 때 아이디어는 수주(樹洲) 변영로(卞榮魯)와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에게서 따왔다. 수주의 나무 수 자를 나무 목으로 바꾸고 소월의 달 월 자를 그대로 따와서 붙인 이름이다. 조국이 해방되자 당시 출판계에 발이 넓었던 조풍연(趙豊衍)은 ≪문장≫의 추천 시인 몇 사람을 묶어 합동 시집을 내면 좋겠다고 을유문화사에 제의해서 ‘자연(自然)’을 공통분모로 시작을 하고 있던 박목월, 박두진(朴斗鎭), 조지훈(趙芝薰) 등 3인의 합동 시집을 기획하게 되었다. ‘청록집(靑鹿集)’이란 시집명은 목월이 제안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46년 6월 6일, 해방 후에 처음 나온 창작 시집으로 ≪청록집≫이 간행되었다. 1947년 목월은 10여 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뒤에 모교인 대구 계성중학교의 교사로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49년 서울의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으면서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산아방(山雅房)’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했다. 1950년 6월에는 ≪시문학≫ 창간호를 조지훈, 박두진, 이한직(李漢稷) 등과 함께 발행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창간호는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목월은 공군종군문인단의 일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휴전 후에 홍익대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교 등에서 강의하다가 1959년 4월 한양대학교에 부임해 1978년 은퇴할 때까지 국문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문리과대학 학장을 지냈다. 1968년에 시인협회 회장에 선임된 이래 작고할 때까지 연임했다. 1955년에 시집 ≪산도화(山桃花)≫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했으며, 1968년에는 시집 ≪청담(晴曇)≫으로 대한민국문예상 본상을, 1969년에는 ≪경상도(慶尙道)의 가랑잎≫으로 서울시문화상을, 그리고 197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지 ≪아동≫(1946), ≪동화≫(1947), ≪여학생≫(1949), ≪시문학≫(1950) 등을 편집하고 간행했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했다. 교수로, 시인협회 회장으로, ≪심상≫의 발행인으로 1인 3역을 감당하던 목월은 과로가 쌓여 갔다. 당시 그는 이미 고혈압을 지병으로 앓고 있었다. 1973년 삼중당에서 ≪박목월 자선집(自選集)≫을 간행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된 ≪무순(無順)≫을 발간했다. 한양대 교수직에서 퇴임한 목월은 그의 나이 63세 되던 해인 1978년 1월, 서울 원효로의 효동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장로 장립을 받은 지 약 두 달 만인 3월 24일, 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뒤 현기증을 느끼며 자리에 누워 지극히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용인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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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지은이)    정보 더보기
(白石, 1912~1996)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로 평가받는 백석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1934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했고,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8월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여성』지 편집 주간,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직원, 만주 안둥 세관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시를 썼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 정주로 돌아왔고,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이 되어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이 외에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 편집위원,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 발표한 일련의 동시로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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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08년 음력 7월 14일 경상남도 충무에서 아버지 유준수의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한문 교육은 이후 그의 시에서 빈번한 한자 사용의 바탕이 되었다. 이후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22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했다. 1923년 형인 극작가 동랑(東朗) 유치진과 함께 도쿄 교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이 무렵 유치진이 주도한 토성회(土聲會)에 참여해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6년에 한의원을 하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귀국해 동래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1927년 20세의 나이로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해에 통영 지역 문인회가 간행한 ≪참새≫ 제2권 1호에 <단가(短歌)> 9편을 발표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 학원에 다녔다. 이해 10월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던 경성 중앙보육학교 출신 안동(安東) 권씨(權氏) 재순(在順)과 결혼했다. 이 무렵 그는 일본 아나키스트 시인 다카무라 고타로, 구사노 신페이 등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29년 귀국해 형 유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掃除夫)≫를 발간했다. 이해에 그의 장녀 유인전이 태어났다. 1930년 유치진의 이름으로 ≪소제부 제1시집≫이 발간되었고 여기에 유치환의 시 <오월(五月)의 마음> 외 25편이 수록되었다. 1931년 24세에 시 <정적(靜寂)>을 ≪문예월간≫ 제2호에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이해에 차녀 유춘희가 태어났다. 유치환은 1932년 평양으로 이주했다.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아 폐업하고 시작(詩作)에 전념하게 되었고, 3녀 유자연이 태어났다. 1934년 다시 부산으로 이주했다. 1935년에는 화신연쇄점에 1년간 근무했다. 1937년 통영으로 이주해서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시 동인지 ≪생리(生理)≫를 부산에서 발행했다. 1939년 12월, 32세의 나이로 첫 시집 ≪청마시초≫를 청색지사(靑色紙社)에서 간행했다. 이 첫 시집에는 <기빨> 외 53편이 수록되었다. 유치환은 1940년 3월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일제의 압박을 피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북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농장 관리인으로 지내는 한편 정미소를 경영했다.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된 여러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 북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들이다. 1945년 광복 직전인 6월에 귀국해 부인은 통영 문화유치원을 운영하고 유치환은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했으며, 8월 15일 광복 이후인 10월에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46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초대 부회장에 이어 회장이 되었다. 1947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제1회 시인상을 수상했다. 이해 6월에 시집 ≪생명의 서≫를 행문사에서 간행했고 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1948년 3월 통영여자중학교를 떠나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1948년 8월에 시집 ≪울릉도≫, 1949년 5월에 시집 ≪청령일기≫를 행문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로 부산으로 이주했고 문인구국대를 조직해 육군 제3사단에 종군했다. 1951년 9월에는 문예사에서 종군 시집 ≪보병과 더불어≫를, 1953년 4월에는 ≪예루살렘의 닭≫을 간행했다. 그는 1953∼1954년에 경북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지냈으며 1954년 4월, 47세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었다. 10월에 시집 ≪청마시집≫(시집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의 합본)이 문성당에서 간행되었다. 그는 1954∼1957년 대구매일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다. 1955년에는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경주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56년 3월에는 경상북도 제1회 문인상을 수상했으며 1957년 50세의 나이로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피선되었다. 1957년 12월에 시집 ≪제구시집≫을 한국출판사에서 간행했다. 1958년 2월에는 아시아재단 자유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2월 ≪유치환 시선≫을 정음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1959년 3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재피선되었으며 산문집 ≪동방의 느티≫를 신구문화사에서 간행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경주고등학교 교장을 사임했으며, 12월에는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를 신흥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유치환은 1960년 12월에 시집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를 동서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61년 3월 경주여자중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며 1962년 7월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2월에 대구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었다. 그리고 1963년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장이 되었으며, 산문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평화사에서 간행했고, 7월에는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64년, 57세에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이 되었고 그해 11월 시집 ≪미루나무와 남풍≫을 평화사에서 간행했으며 부산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65년 4월에는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으며,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1월에 시선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를 평화사에서 간행했다. 1967년 2월 13일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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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으로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搖籃同人)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하여, 일본의 유학 시절 『학조』, 『조선지광』, 『문예시대』 등과 교토의 도시샤대학 내 동인지 『가(街)』와 일본시지 『근대풍경(近代風景)』에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런 작품 활동이 박용철과 김영랑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들과 함께 시문학동인을 결성하게 되었다. 첫 시집이 간행되자 문단의 반향은 대단했고, 정지용을 모방하는 신인들이 많아 ‘지용의 에피고넨(아류자)’이 형성되어 그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의 이런 시적 재능과 활발한 시작 활동을 기반으로 상허 이태준과 함께 『문장(文章)』 지의 시부문의 고선위원이 되어 많은 역량 있는 신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유작으로는 『정지용시집』(1935), 『백록담(白鹿潭)』(1941) 등 두 권의 시집과 『문학독본(文學讀本)』(1948), 『산문(散文)』(1949) 등 두 권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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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지은이)    정보 더보기
본명은 조동탁(趙東卓). 1920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1939년과 그 이듬해 《문장》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혜화전문학교 졸업 후 월정사 불교강원 강사를 지냈고 조선어학회 《조선말 큰사전》 편찬위원으로 일했다. 1948년부터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종군문인으로 6·25전쟁을 겪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국학 연구의 기틀을 닦고 《한용운 전집》 간행위원회를 발족하는 등 저술, 편찬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박두진, 박목월과의 3인 합동 시집 《청록집》을 포함해 총 5권의 시집을 출간하였고, 시론집 《시의 원리》, 수필집 《지조론》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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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萬)海)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 서양 근대사상을 접했다. 이 무렵 서구 문물과 세계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돌아왔다. 1901년 고향에 돌아와 2년간 은신한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가 1905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08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 대학림에서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이를 계기로 1913년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 비판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 준비 과정에서 최린과 더불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검사의 취조에 대한 답변서로서 세칭 「조선 독립의 서」를 집필했다. 1922년 출옥 후에는 각지를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내설악 백담사에서 은거하면서 쓴 시집 『님의 침묵』을 1926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 50세를 전후하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 은거하면서 불교 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였으며 『흑풍』 『후회』 『박명』 등의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 시조를 남겼다. 일제의 강요로 많은 지식인이 변절했을 때에도 끝까지 민족의 지조를 지켜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학병 출정에 반대했다. 그러나 1944년 6월 29일, 그토록 그리던 조국 광복을 눈앞에 두고 중풍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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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시인.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으며, 1939년 정지용에 의해 〈향현〉, 〈묘지송〉 등이 《문장》에 추천되며 등단했다. 박목월, 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그는 민족적 울분과 해방에 대한 소망을 자연과 신앙에서 구하는 시풍에서 출발하여,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과 영적 성숙을 위한 언어적 수행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적 편력을 일관되게 보여 주었다. 연세대, 단국대, 추계예술대 등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아세아자유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 3·1 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상, 동북아 기독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청록집》, 《해》, 《오도》, 《포옹무한》, 《수석열전》, 〈박두진 전집〉(전10권), 〈박두진 산문 전집〉(전7권) 등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이 있다. 그의 고향 안성에서는 그의 시 정신을 기리고 오늘에 되살리는 뜻에서 해마다 10월에 ‘혜산 박두진 문학제’가 열리며, 공모를 통해 ‘혜산 박두진 문학상’을 시상한다.(올해 제13회) 2018년 가을에는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296 안성맞춤랜드 내에 박두진문학관이 이전·개관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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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 (지은이)    정보 더보기
1896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고 호는 안서(岸曙)다. 필명으로 ‘안서(岸曙)’, ‘안서생(岸曙生)’, 안서의 머리글자를 딴 ‘A. S.’, 에스페란토 이름인 ‘Verda E. Kim’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 수업을 받았으며 1907년 정주 오산학교에서 신학문을 수학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14년 부친의 사망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으며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부임했다.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학예부 기자, 문예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대 ≪매일신보≫ 기자를 거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 직후까지 경성 중앙방송국에 근무했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했다. 해방 후, 출판사인 수선사(首善社)의 주간을 맡았고 1946년부터 한국 전쟁 때까지 육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강의했다. 한국 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김억은 1914년 일본 유학생들이 발간한 잡지인 ≪학지광≫에 <이별>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으로 <야반>, <나의 적은 새야>, <내의 가슴>, <밤과 나> 등이 있다. 이후 개인적 감정을 중시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개성적 리듬을 강조한 시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한편, 1916년 9월 ≪학지광≫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를 번역한 <내 가?에 내리는 비>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서구의 시와 시론을 번역·발표했다. 특히, 1918년 9월 창간된 ≪태서문예신보≫에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해 소개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에 상징주의 시풍을 정착시켰다. 1920년 ≪폐허≫ 동인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개벽≫, ≪동광≫, ≪영대≫, ≪조선문단≫, ≪학생계≫ 등에 참여했다. 1925년 이후,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했으며 한시 번역에도 힘을 쏟았다. 김억은 한국 현대시 최초의 창작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를 위시해 ≪봄의 노래≫(1925), ≪금모래≫(1925), ≪안서 시집≫(1929), ≪지새는 밤≫(1930), ≪안서 시초≫(1941), ≪먼동이 틀 제≫(1947), ≪민요 시집≫(1948) 등을 상재했다. 그리고 베를렌, 구르몽, 보들레르, 예이츠 등의 시가 수록된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필두로, 타고르의 시를 번역한 ≪기탄자리≫(1923), ≪원정≫(1924), ≪신월≫(1924), 아서 시먼스(Arthur Symons)의 시를 번역한 ≪잃어진 진주≫(1924), 한시를 번역한 ≪망양초≫(1934), ≪동심초≫(1943), ≪꽃다발≫(1944), ≪야광주≫(1944), ≪지나 명시선≫(1944)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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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호 (엮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명예교수, 평론가.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198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주요 저서로 『한심한 영혼아』, 『문학의 위족』, 『녹색을 위한 문학』, 『문학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일요일의 마음』, 『문자제국쇠망약사』, 『이 쓸쓸한 뜰에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 『교과서에 실린 문학작품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혼자만의 시간』, 『상상력의 보물창고』, 『느림보다 더 느린 빠름』,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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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
머나먼 저 바다의 수평선 위로
끊지도 아니하고 홀로 가는
언제나 하소연한 나의 꿈……
--- 「바다 저편, 해파리의 노래」 중에서


들꽃은
피어
흩어졌어라.

들풀은
들로 한 벌 가득히 자라 높았는데,
뱀의 헐벗은 묵은 옷은
길분전의 바람에 날아돌아라.
--- 「들도리, 진달래꽃」 중에서


그러나 떨어진 도화가 날아서 당신의 입술을 스칠 때에 나는 이마가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울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실로 수놓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 「당신은, 님의 침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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