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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독일소설
· ISBN : 9788934981190
· 쪽수 : 632쪽
· 출판일 : 2023-04-03
책 소개
리뷰
책속에서
문장이 마음에 들면 늘 그렇듯이 레이랜드는 크게 소리 내어 읽으며 그 리듬에, 음색의 리듬과 뜻의 리듬에, 그리고 그 두 리듬이 서로 섞이는 방식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에 그는 자신이 말의 울림을 즐기는 것 말고 다른 일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리비아에게 문장을 낭독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11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에. 아내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집중하는 방식은 그를 사로잡고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2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트리에스테 집에서 둘은 계단 제일 위쪽 층계에 앉아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그걸 독일어와 영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가끔은 트리에스테 사투리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밤마다 접수처에 앉아 있던 3년 동안 레이랜드는 그 전에는 책으로만 알던 일을 직접 보고 들었다. 술에 취해 돌아온 손님들은 자기 객실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서류를 잃어버리고 숙박비를 갚지 못하기도 했다. 복통이 심해서 의사를 불러야 한 손님도 있었다. 어떤 여자는 산통이 예상보다 일찍 시작되어 구급차가 달려왔다. 경찰이 나타나 누군가를 데려가는 일도 있었다. 정신 나간 어떤 음악가는 새벽 3시에 트럼펫을 연주했다. 너무 급해서 미처 침대까지 가지 못하는 연인도 있었다. 어떤 영화 팀은 하필 한밤중에 촬영하려고 했다. 낯선 도시에 와서 급하게 변호사를 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은 자기 모국어를 할 줄 아는 레이랜드를 반가워했다. 실망과 불안, 고독에 대한 토막 난 이야기들이었다.
“난 약사였습니다. 아버지 약국을 넘겨받았지요. 이스트 엔드의 해크니 지역이었어요. 그곳에는 노동자와 빈민, 서류가 없는 외국인도 많이 삽니다. 의사는 적고, 오래 기다려야 하지요. 약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왔습니다. 명백한 질병, 명백한 증상이었지요. 내가 알아본 건 의사도 똑같이 판단했을 겁니다. 난 첫해에는 약사가 해야 하는 말을 했어요. 처방전이 없으면 약을 팔 수 없다고. 그러다가 힘든 겨울이 왔어요. 전염병과 폐렴, 위험한 질병이 많이 돌았지요. 기침을 하는 엄마와 병든 아이들. ‘의사에게 갈
수 없는데,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들이 말했지요. 그래서 처방전이 필요한 약을 처방전 없이 주기 시작했습니다. 약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와서 감사 인사를 했지요. 소문이 나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난 회계장부를 조작했지요. 직원은 그걸 보며 침묵하다가 말했어요.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나도 압니다. 하지만 이러는 게 옳아요. 불법이긴 하지만 옳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