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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50960803
· 쪽수 : 316쪽
· 출판일 : 2015-08-20
책 소개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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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계속 어렴풋한 위화감을 풍기는 그 책장 앞에 가서 섰다. 저절로 흠칫했다. 줄줄이 꽂힌 책의 제목에 ‘살인’, ‘잔혹’, ‘지옥’, ‘엽기’, ‘고문’, ‘학살’ 같은 오싹한 단어가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느낌표가 유난히 많고 폰트도 일일이 피투성이를 모방한 것처럼 과장스럽다.
“이런 거 좋아해?”
도쿠야마는 등 뒤에 누워 있는 하쓰미에게 물었다.
하쓰미는 고개를 들어 팔베개를 하고 “이런 거라니, 뭔데요?”라고 막 잠에서 깨어난 듯 코에 걸린 목소리를 냈다.
“저기 ‘살인의 뭐뭐’라든가 ‘학살의 뭐뭐’라든가 ‘고문 백과전서’라든가, 어쩐지 악몽을 꿀 것 같은 책들이잖아.”
“아, 그거요?” 하쓰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요.”라고 침대 위에서 큰대자로 우우우 기지개를 켜고 나서 말했다. “거기에 인간의 악의를 모두 다 진열하고 싶어요.”
“역시 괴짜구나, 너. 아주 상당히 괴짜야.”
“네, 근데 그만두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그만둘게요. 내다버리라고 하면 내일이라도 전부 다 버릴 거예요. 어차피 물건일 뿐이니까.”
“나는.” 하쓰미가 말을 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달라, 그런 말은 안 해요. 절대로 안 할 거예요.”
“아니, 자, 잠깐만.”
“안 돼요?”
“안 되다니,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그보다 너는 지금 그대로가 좋아. 지금 그대로 괜찮다고. 아니, 그보다 우리, 서로 안 지도 얼마 안 됐고, 개성적인 면도 뭐랄까, 좀 괴짜라서 좋아, 재밌어. 그야 약간 멈칫한 건 사실이지. 여자 방에서 〈흠뻑 젖은 욕정〉이라는 포르노 비디오를 발견하면, 그야 그렇잖아?”
“이 잡지.” 하쓰미는 책장 아랫단에서 대형 사이즈의 경제 잡지를 꺼냈다. “여기 특집호에 이 시대를 주도하는 경영인, 성공인 들의 반생이니 인터뷰니 하는 게 실려 있는데, 이것도 진짜 지독해요. 지독하고, 대단해요. 그럴싸한 거짓말만 한가득. 또는 참 잘도 이런 말을 지껄이는구나, 감탄이 터지는 폭언들. 하긴 블랙기업이니 격차사회라는 게 주목받기 전이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 끔찍해요. 옛날 『여공애사』의 경영자들과 기본적으로 달라진 게 전혀 없어요. 부정(不正)은 방편일 뿐이고 법률은 족쇄로 써먹고, 아무튼 자신들이 하는 일은 국가를 위한 것이니까 찍소리하지 마라, 우울증도 과로사도 노동자의 자기 책임이다, 마음대로 앉지 마라, 마음대로 쉬지 마라, 마음대로 밥 먹지 마라, 마음대로 살지 마라, 마음대로 죽지 마라, 그런 식이에요. 놀고 있죠. 놀고 있고, 진짜 저질이고 천박해요.”
이런 이야기를 아주 즐겁게 하는구나, 하고 도쿠야마는 느꼈다. ‘끔찍하다’든가 ‘진짜 저질’이라는 말을 할 때, 하쓰미는 표정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심지어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