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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일본소설 > 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 ISBN : 9788950971229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7-10-31
책 소개
목차
제2화. 교열걸과 편집 우먼 ................................................................053
제3화. 교열걸과 패셔니스타와 아프로 ...............................................101
제4화. 교열걸과 뱀장어.......................................................................149
제5화. 교열걸과 러시아와 그 외의 뱀장어..........................................195
에필로그. 사랑을 이루기를, 교열걸.....................................................245
리뷰
책속에서
어째서 이런 일이.
남자는 피에 물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눈을 부릅뜬 채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그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품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여자는 피를 흘리며 남자 눈앞에서 죽었다. 여자의 매끄러운 살결과 온기가 떠올라 남자는 머뭇머뭇 여자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유방을 주무르자 아직 말랑했다.
에쓰코는 세 번째 줄의 ‘피를 흘리며’에 밑줄을 그은 뒤 삭제라는 두 글자와 물음표를 써넣고, ‘말랑’과 ‘했다’ 사이에 ‘말랑?’이라고 표시한 다음, 교정 메모 ‘마’란에 쪽수를 적었다. 한숨 돌린 에쓰코는 연필을 책상에 내던지고 목을 우두둑우두둑 돌렸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으면 가슴을 주물러서 딱딱하지 않은가 확인할 것이 아니라 우선 목이나 손목을 짚어서 맥박이 뛰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닌지?
이런 의문점은 지적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나중에 써두기로 했다.
“누구 원고야?”
옆자리에서 비슷한 작업을 하던 요네오카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석양이 비쳐드는 시간에 바로 옆에서 사무실 블라인드가 조금 열려 있어서 요네오카의 얼굴에 줄무늬가 생겼다.
“혼고 다이사쿠.”
“아, 에로 미스터리. 뭐야, 후끈 달아올랐어?”
“시끄러워, 돋보기 확 던져버린다!”
“그러지 마세요, 죽어요.”
커피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서는 에쓰코에게 요네오카가 “내 것도!” 하고 부탁했다. 에쓰코는 그의 부탁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한 컵만 따라서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사무실 가장자리의 큼지막한 회의용 책상에서 작업 중인 패션 잡지 교열부를 바라보았다. 여러 사람이 자아내는 살기등등한 분위기가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일찍이 저 살기를 동경했다. 그리고 지금도 동경한다.
저쪽으로 가고 싶다. 왜 난 혼자서 문학 분야를,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교열하고 있는 거람.
대학교 2학년 때 경범사의 직장 여성 잡지 《라시》에 실린 ‘에디터스 백’을 보고 한눈에 반한 순간, 에쓰코의 인생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에디터는 ‘편집자’라는 뜻이다. 에디터스 백은 패션 잡지의 편집자나 필자들처럼 선택받은 부류들만 들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독자 모델들이 지면에 공개한 소지품과 비교해보기만 해도 그 선택받은 부류의 삶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예쁜 가방을 당당하게 들고 다니려면 패션 잡지 편집자가 되어야겠다 싶어서 취업 제1지망을 경범사로 정했다. 하지만 입학 커트라인이 어중간하고 요조숙녀 학교라는 이미지밖에 별다른 특징이 없는 여대 출신인 에쓰코에게 경범사 취직은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이 출판사 직원들은 도내의 국립대학교나 국립에 버금가는 사립대학교 출신자가 대부분이다. 성 정체성이 불분명한 요네오카마저 도쿄 대학교에 떨어질 것에 대비해 원서를 넣었던 일류 사립대학교 출신이다.
평범하고 태평한 여대생이었던 에쓰코는 기백과 근성만으로 입사시험에 통과했다. 경범사의 패션 잡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경범사의 패션 잡지가 자기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면접관이 질릴 만큼 열변을 토한 끝에 입사했지만, 어째서인지 교열부로 발령이 났다.
에쓰코의 성은 고노(河野)다. ‘가와노’가 아니라 ‘고노’라고 읽는다.
고노 에쓰코.
인사부가 ‘이름이 교열(교열은 일본어로 ‘고에쓰’라고 발음한다-옮긴이)과 비슷하다’라는 이유만으로 배속을 결정한 모양이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채용한 것 같다.
연수를 마친 후 배속된 부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이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에쓰코는 자신의 일터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그 휘하에서 변신한 앤 해서웨이들이 북적거리는, 세련되고 활기 넘치는 사무실일 줄 알았다. 하지만 에쓰코가 일하는 곳은 전혀 세련되지 않았다. 활기가 넘치는 곳은 이미 다른 부서 취급을 받는 잡지 교열부뿐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버섯 양식장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부장이 새송이버섯을 닮았다.
첫날부터 에쓰코가 불만스럽다는 태도로 나오자 새송이버섯은 잠시 에쓰코를 지켜보다가 타이르며 말했다. “성과를 내면 원하는 부서로 옮길 수도 있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인사이동을 할 때 부서 이동 희망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뭐, 일단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게 중요해.’
새송이버섯의 말을 듣고 에쓰코는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도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교열부에서 성실하고 완벽하게 업무를 보고 있다. 언젠가는 《라시》 편집부로 이동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