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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언론/미디어 > 언론학/미디어론
· ISBN : 9788959065158
· 쪽수 : 648쪽
· 출판일 : 2019-03-08
책 소개
목차
머리말 : “보도지침 사건이 뭐예요” ․ 5
제1장 개화기의 언론 ① 1883~1897년 ․ 17
『한성순보』이전의 언론 활동 | 근대의 시발점이 된 1876년 강화도조약 |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의 등장 |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갈등 | 1883년 『한성순보』의 창간 | 『한성순보』의 보도 내용과 성향 | 1884년 갑신정변과 『한성순보』의 폐간 | 1886년 『한성주보』의 창간 | 전신 매체의 도입과 개신교의 선교 활동 |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 1895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1896년 『독립신문』의 창간 | 『독립신문』의 노선과 성향 | 『독립신문』의 독자와 광고
제2장 개화기의 언론 ② 1897~1910년 ․ 49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 활동 | 1898년 최초의 일간지 『일신문』 창간 | 『제국신문』과 이승만의 언론 활동 | 유생·양반 계층을 겨냥한 『황성신문』의 창간 | 『시사총보』·『상무총보』와 개신교 신문의 창간 | 전화, 유성기, 전차, 영화, 기차의 등장 | 1904년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 1905년 을사늑약과 「시일야방성대곡」| 1906년 『국민신보』·『만세보』·『경향신문』의 창간 |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민족주의 | 1907년 광무신문지법과 일제의 언론 탄압 | 『대한매일신보』와 국채보상운동 | 『소년』과 『대한민보』의 창간 | 일제의 강점과 신문들의 폐간
제3장 일제강점기의 언론 ① 1910~1929년 ․ 83
일제의 ‘무단정치’와 분할통치 전략 | ‘무단정치 시대’의 신문 | 수탈의 통로로 건설된 철도와 신작로 | 무성영화와 연쇄극의 인기 | 3·1운동과 지하신문의 활약 | 일제의 ‘문화 통치’와 친일파 육성 공작 | 일제가 신문 발행을 허가한 이유 |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의 창간 | 『개벽』·『창조』·『폐허』·『백조』의 창간 | ‘청년 신문’ 『동아일보』의 혈기 왕성 | 『동아일보』의 ‘상업주의’와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 파동 | 『조선일보』의 ‘비판의 상품화’ | 1920년대 중반의 사회주의 열풍 | 최남선의 『시대일보』창간과 좌절 | 이상협의 『중외일보』창간 | 언론 단체의 활동과 기자단의 결성 | 한국 최초의 여기자 이각경·최은희 | 조선일보사의 라디오 실험 방송 | 1927년 경성방송국의 개국 | 무성영화의 인기와 나운규의 <아리랑> | 1920년대의 소비 대중문화 | 1920년대의 기차·자동차 문화
제4장 일제강점기의 언론 ② 1929~1945년 ․ 129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언론 탄압 | 1931년 만보산 사건과 중일전쟁 |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한글 보급 운동 | 1933년 방응모의 『조선일보』인수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격렬한 지상 비방전 | 일본 광고주들을 위한 ‘기생 관광’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속보·잡지 경쟁 | 신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 | 신문의 문학 지배 |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 황국신민화 운동과 『조선일보』·『동아일보』의 굴종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지원병제 홍보 | 창씨개명과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폐간 |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폐간 이유 | 조선일보사의 『조광』을 통한 활동 | 『매일신보』와『경성일보』의 번영 | 1930년대의 라디오방송 | 1942년 ‘단파방송 밀청 사건’과 전화의 인기 | 영화의 인기와 전쟁 프로파간다 도구화 | 백화점과 소비문화 | 대중가요의 인기와 춤바람
제5장 미군정기의 언론 1945~1948년 ․ 175
“언론의 둑은 터졌다” | ‘엄정 중립은 기회주의적 이념’ | 『조선일보』·『동아일보』의 속간 | ‘찬·반탁’ 논쟁과 『동아일보』| ‘매국신문’ 대 ‘반동신문’의 대결 | ‘좌익 우세’를 저지하기 위한 언론통제 | ‘출판의 둑’도 터졌다 | “좌우(左右)는 싸움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 라디오의 ‘정당 방송’과 ‘전파 주권’ 획득 | 연극·악극·영화·방송에서의 이념 투쟁 | 쫓고 쫓기는 ‘신문 전쟁’ | 제주 4·3항쟁과 5·10 단독 총선거 | 연설 커뮤니케이션의 호황 | 미군정의 ‘엄청난 물량전’ 공보 활동
제6장 이승만 정권기의 언론 1948~1960년 ․ 207
좌익지의 소멸, 우익지의 번성 | 6·25전쟁과 신문들의 시련 | 6·25 종군 기자들의 어려움 | 만화·문학·영화·가요의 참전 | 신문은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권력기관 | 1954년 『한국일보』의 창간, 기독교방송의 개국 | 1955년 『대구매일신문』테러 사건 | 신문의 오식(誤植)에 대한 졸렬한 대응 | 『사상계』·『학원』의 창간과『자유부인』 | 반공 영화와 미국 지향적 가요 | “『동아일보』를 보면 재미없다” | 1956년 한국 최초의 TV 방송과 AFKN TV | 라디오와 아나운서의 인기 | 영화 <자유부인>과 ‘고무신 관객’ | 1957년 관훈클럽과 ‘신문의 날’ 탄생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와 『사상계』의 활약 |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 신문의 정론성과 상업성 | 4·19혁명과 김주열의 시체 사진
제7장 장면 정권기의 언론 1960~1961년 ․ 249
10배 가까이 늘어난 신문 | 사이비 기자의 발호와 독자들의 ‘실력 행사’ | “누가 더 비판을 잘하나” 경쟁 | ‘신문 망국론’의 등장 | 『민족일보』와 장면 정부의 충돌 | 4·19 1주년의 ‘통분·치욕·울분’ |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
제8장 박정희 정권기의 언론 ① 1961~1970년 ․ 265
5·16군사쿠데타와 신문의 지지 | 장준하의 5·16군사쿠데타 지지 | 『민족일보』조용수 사형 | KBS TV 개국과 ‘TV 열풍’ | 부패 언론인 단속과 단간제 실시 | “주여! 상업방송을 금지시켜 주시옵소서” | 1964년 한일회담과 6·3 사태 |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과 언론의 굴복 | 삼성의 ‘동양 TV’ 개국과 『중앙일보』 창간 | 라디오의 ‘DJ 전성시대’와 코미디 경쟁 | 영화 <맨발의 청춘>과 <저 하늘에도 슬픔이> | 1966년 삼성의 ‘사카린 밀수’ 사건 | 『경향신문』경매, 기자 테러 | 『동아일보』50만 부 돌파, ‘신민당 소명서’ 사건 | ‘서울 공화국’ 체제의 가요와 스크린쿼터제 | “신문은 편집인 손에서 떠났다” | 언론에 대한 특혜와 언론의 상업적 성장 | 기자의 빈곤·촌지·전직 | 주간지의 번성과 『선데이서울』의 인기 | 재벌의 언론계 영향력 증대 | 1969년은 한국 영화의 최전성기 | TV 안테나는 ‘번영과 문명화’의 상징
제9장 박정희 정권기의 언론 ② 1970~1979년 ․ 315
1970년 김지하의 「오적(五賊)」| 『다리』 탄압 사건 | 대학생들의 ‘언론화형선언문’ |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데스크> 탄생 | 박정희의 특명에 따른 MBC 민간 분양 | 프레스카드제와 언론 통폐합 | ‘10월 유신’과 언론의 관제화 | ‘유신방송법’과 한국방송공사의 탄생 | 언론인의 정관계 진출 | <여로>·<님과 함께>·‘통블생’·<별들의 고향> | ‘오일 쇼크’와 여권 매체 계열화 | 『동아일보』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 『조선일보』에서 내쫓긴 32명의 기자 | 『동아일보』에서 내쫓긴 113명의 기자 | 해직 기자들의 수난과 고통 | 베트남 패망, 헌법 논의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 | 대중문화계를 강타한 박정희 정권의 히스테리 | 신문과 TV의 광고 쟁탈 갈등 | ‘하이틴 영화’·‘호스티스 영화’·‘대학가요제’| 『우상과 이성』·『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일지’ 사건 | 신문들의 판매 전쟁과 독과점화
제10장 전두환 정권기의 언론 1979~1988년 ․ 365
신군부의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 공작 | 다시 일어난 ‘자유언론실천운동’ | 5·18광주항쟁과 ‘관객의 부재’ | 언론의 5·18 왜곡·허위 보도 | 신군부의 민주 언론인 제거 공작 | ‘공포 분위기’로 강행한 언론 통폐합 | 언론 통폐합의 7대 효과 | 컬러 TV 방송 실시 | 언론기본법 제정과 공익자금 조성 | 신문의 산업적 호황과『조선일보』의 번영 | 야만의 극치를 보인 ‘한수산 필화 사건’ | 1982년 통금 해제와 <애마부인> | 프로야구의 출범과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 KAL기 실종과 ‘땡전 뉴스’ | ‘보도지침’ 폭로 사건 | TV 시청료 거부 운동 | 1986년 ‘평화의 댐’ 사건 | 박종철과 이한열, 그리고 6월 항쟁 | 1987년 언론기본법 폐지와 언론노조 결성
제11장 노태우 정권기의 언론 1988~1993년 ․ 407
1988년 『한겨레신문』의 창간 | 서울올림픽과 대중매체의 호황 | 자유화의 물결, 사이비 언론의 창궐 | <어머니의 노래>·<광주는 말한다> | 신문들의 증면·CTS 경쟁 | UIP 영화 직배 반대 투쟁 | 복합극장의 등장, 국산 영화 점유율 20퍼센트 | 1990년 4월 KBS 사태 | 방송법 국회 날치기 통과 | 1991년 수서 사건과 언론 부패 | 언론의 촌지·향응 잔치 | <땅>·<여명의 눈동자>·<사랑이 뭐길래> | 신문의 엔터테인먼트 상품화 | ‘권력과의 싸움’에서 ‘자본과의 싸움’으로 | SBS 라디오·TV 개국 | 1992년 SBS의 반란 | ‘서태지와 아이들’과 <질투> | ‘김영삼 장학생’ 논란
제12장 김영삼 정권기의 언론 1993~1998년 ․ 447
김영삼 여론 정치의 명암(明暗)| 신문 전쟁과 ‘생활정보신문’의 번성 | TV 시청률 무한 경쟁과 ‘<서편제> 열풍’ | ‘연예인 신드롬’과 연예 저널리즘 | 1994년 신문·방송의 광고 전쟁 | 신세대·마니아·PC통신 | 차인표·신은경·<모래시계> | 케이블TV·지역 민방·‘땡김 뉴스’ | 1996년 ‘부끄러운 신문 100돌’ | 음반 사전 심의와 영화 사전 검열 위헌 판결 | ‘몸’·‘불륜’·‘섹스’의 재발견 |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대중화
제13장 김대중 정권기의 언론 1998~2003년 ․ 475
‘서바이벌 게임’에 들어선 언론 | 신문을 많이 팔수록 손해 본다 | 언로(言路) 독과점과 언론개혁시민연대의 출범 | 조선일보사가 만든 ‘최장집 사건’| 스크린쿼터제 축소 논란과 ‘<쉬리> 열풍’ | ‘제1권부’로 등극한 언론 | 통합방송법 제정과 홈쇼핑 채널의 인기 | “IMF가 없었다면 한류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 인터넷의 급성장과 포털의 등장 | 노래방·비디오방·PC방의 인기 | “한국에선 개나 소나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 언론사 세무조사 논란 | ‘2002 월드컵 열풍’의 수혜자는 포털과 노무현
제14장 노무현 정권기의 언론 2003~2008년 ․ 503
‘취재 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논란 | 노무현 정권과 『오마이뉴스』| 인터넷과 무료신문이 촉발시킨 ‘신문 위기론’ |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방송 논란 | ‘조선·동아는 역사의 반역자’ 논란 | 신문법과 언론피해구제법 제정 | 지상파방송 위기론, ‘손안의 TV’ 시대 개막 | “의원 146명이 당게낭인 12인에 끌려다닌다” | 진보-보수파의 인터넷 장악 전쟁 | ‘조선·동아는 독극물’, 안티조선운동 | 노무현 대통령의 댓글 정치 | ‘포털 논란’과 ‘UCC 열풍’| <괴물>과 ‘1,000만 신드롬’ | ‘언론과의 전쟁’을 무력화시킨 부동산 투기 광풍
제15장 이명박 정권기의 언론 2008~2013년 ․ 529
친(親)이명박 폴리널리스트의 전성시대 | 18대 총선과 ‘진보 정치’의 몰락 | ‘쇠고기 촛불집회’의 온라인 24시간 생중계 | 방송통신위원회의 출범과 KBS 사장 정연주 탄압 | YTN의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 | 미디어법 논란과 ‘미네르바 신드롬’ | 낙하산, YTN 기자 구속, 장자연의 죽음 | 노무현 서거와 ‘죽음의 문화정치학’ | 미디어 관련 3법 날치기 통과 | 방송계 블랙리스트 논란 | 조선·중앙·동아·매경의 종합편성채널 개국 | 방송 노조공동 파업과 ‘방송계 사찰 보고서’ | 4·11 총선에 독(毒)이 된 ‘<나꼼수> 열풍’ | 제18대 대선은 ‘종편과 <나꼼수>’의 싸움
제16장 박근혜 정권기의 언론 2013~2017년 ․ 555
스마트폰 세계 1위, 무료신문의 죽음 | ‘손석희의 JTBC행’과 ‘종편의 역설’ | ‘세월호 참사’와 ‘기레기’의 탄생 | 세월호 ‘보도 통제’와 ‘폴리널리스트’ 논란 | ‘정윤회 국정 개입 보고서’ 파문 | ‘뉴스 어뷰징’과 ‘포털 뉴스 규제론’ | ‘인터넷신문 요건 강화’ 논란 | 방송 통제 ‘당근과 채찍’ 논란 | 기자의 직업윤리와 김영란법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서막을 연 TV조선 | JTBC ‘최순실 태블릿PC’ 특종 보도의 충격 | “드라마보다 뉴스가 더 재미있다” | 조갑제의 ‘조중동은 보수의 배신자’ 선언 | ‘대통령 박근혜 파면’, 1,600만 촛불 집회 종료
제17장 문재인 정권기의 언론 2017~2019년 ․ 581
방송계 ‘적폐 청산’ 갈등 | ‘가짜뉴스’ 논란과 ‘팩트체크’ | ‘가짜뉴스’라는 용어의 혼란 | “포털의 시대가 지고, 유튜브 시대가 오고 있다” | 알릴레오와 홍카콜라가 불붙인 ‘유튜브 혈전’ | ‘알고리즘 독재’로 “IT기업이 ‘신’이 된 세상” | “양치기 소년의 외침으로 끝나지 않을 ‘신문 소멸’” | ‘미투’ 2차 가해를 양산한 언론 보도 | 넷플릭스, 지상파 위기론, 중간광고 논란 | 권언유착 없는 폴리널리스트는 가능한가
맺는말 : ‘기술결정론의 독재’를 넘어서 ․ 604
개화기∼미군정기의 언론 | 이승만 정권∼박정희 정권기의 언론 | 전두환 정권∼노태우 정권기의 언론 | 김영삼 정권∼문재인 정권기의 언론 | 한국은 ‘미디어 사회’ | “민주주의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위기다”
참고문헌 ․ 619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런 암묵적 타협하에서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되었다(『한성순보』엔 음력 10월 1일로 표시되어 있는데, 양력은 1896년 1월 1일부터 사용되었다). 그런 창간 배경으로 인해 『한성순보』는 여러 정치 세력들이 갖고 있는 각기 다른 생각들의 투쟁의 장(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김민환(1988, 97)은 “개화 지식인 가운데 아직 혼재하고 있던 양무론적 서구 수용론과 명치유신형의 탈아론적 서구 수용론이 『한성순보』라는 한 마당 안에 그대로 혼재하게” 되었으며 “이런 특성은 『한성순보』의 지면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평가했다. 「제1장 개화기의 언론 ①」
일제의 가혹한 인권탄압과 억압적인 정책의 결과, 고종의 서거(1919년 1월)와 일본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의 영향을 매개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국사편찬위원회는 2019년 2월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3·1운동 사건을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시위) 계획 333건 등 모두 2,464건으로 종합했다. 시위 참가 인원은 최소 80만 명에서 최다 103만 명, 사망자는 최소 725명에서 최다 934명에 이르렀다.(조종엽, 2019) 「제3장 일제강점기의 언론 ①」
1947년 8월 1일 우파의 신문기자 조직인 조선신문기자협회가 결성되면서 좌우파 언론 간 힘겨루기는 좌파 우세에서 우파 우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우파 우세’의 추세를 가속화시킬 결정타를 가했으니 그게 바로 ‘8월 대공세’였다. 1947년 8월 11일 미군정 당국은 남로당 당수 허헌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면서 남한에서 공산주의 활동은 불법이라고 선언했는바, 남한의 모든 좌익 신문도 지하로 들어갔고 좌익 언론인은 우익 신문에 위장 취업하는 일이 벌어졌다.(이우용, 1991; 정병준, 2005; 차배근 외, 2001) 「제5장 미군정기의 언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