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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사 일반
· ISBN : 9788962622478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18-10-24
책 소개
목차
一 한반도화교는 언제, 어디에서 왔을까?
화교가 ‘오무장공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까닭
청국 조계에서 인천차이나타운으로
중국인이 조선에 이주한 이유
한반도화교의 인구 추이 (1883~2015)
二 한국식 중화요리를 창조하다!
짜장면의 한국화, 그리고 세계화
화교 중화요리점의 비애
명동 고급 중화요리점 ‘아서원’의 비화
三 삼도업(三刀業), 가위와 면도, 식칼 기술로 이룬 경제
상해에서 시작된 첨단 패션의 화교 양복점
싸고 서비스가 좋은 화교 이발소
四 화교가 주단포목상점을 석권한 이유
비단장수 ‘왕서방’의 마지막 후예
화교 주단포목상점의 전성기
조선총독부의 고관세 부과로 쇠퇴의 길을 걷다
五 솥과 양말 제조에 두각을 나타내다
솥 제작의 달인, 주물업 시장을 장악하다
화교 양말제조의 중심지, 신의주
六 종교건축을 도맡아 시공한 화교 건축회사와 기술자
명동성당 시공을 주도한 화교 건축기술자
노동시장 판도를 바꾼 화공
七 화교 농민, 채소재배의 달인이 되다
인천 최초의 채소시장을 열다
채소재배의 경쟁력은?
화농의 쇠퇴, 사라진 ‘왕서방’들
八 경제활동에 적극 참여한 북한화교
꾸준하게 채소재배를 해온 북한화교
북한에도 짜장면이 있다!
북·중 무역을 주무르는 화교 무역상
九 한국의 대표 차이나타운: 인천 vs 대림
노(老)화교 차이나타운의 새로운 도약
신(新)화교 차이나타운의 탄생과 급속한 발전
十 화교 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동향회관’의 탄탄한 조직력
화교사회를 결집하는 ‘중화회관’과 ‘중화상회’
화교협회, 교민협회, 그리고 북한의 화교연합회
재이주한 지역에서 한화(韓華)의 정체성으로 뭉치다
十一 화교학교의 교육 흐름
화교학교 설립
교동회 중심의 화교학교 운영
중국 정부에 흔들리는 화교의 교육과정
사라져 가는 한국의 화교학교
북한정부에 좌지우지되는 북한의 화교학교
十二 민간신앙과 종교 생활
거선당, 의선당 그리고 달마불교회
107년 역사의 화교 교회
十三 친일과 항일 그리고 중국과 대만 사이
중화민국 시기부터 생겨난 조선화교의 민족의식
경성총영사관 국기 교체사건
범한생 총영사의 친일 활동
격렬하게 펼쳐진 조선화교의 항일활동
국민당과 공산당, 중국과 대만 사이에서
十四 화교배척사건과 차별의 역사
두 차례의 화교 배척사건
평양사건의 피해가 큰 이유
한국화교에 대한 차별
나라 없는 난민
十五 조선족 신(新)화교와 한족 신(新)화교 사회
한족 신(新)화교 사회단체
재한조선족 신(新)화교 사회단체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화교 중화요리점의 역사는 한국 중화요리의 역사와 겹치는 것이 많다. 1880년대 서울과 인천에서 시작된 중화요리점은 급속하게 발전한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이주해 온 화교가 주요한 고객이었지만 점차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 이들 중화요리점은 북경요리와 광동요리 등 고급 요리를 파는 곳으로 고급 요정 역할도 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비밀리에 열린 곳은 아서원이고, 나석주가 서울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하기 위해 화교로 가장하고 식사를 한 곳은 공화춘이었다. 1940년 소파 방정환의 전집 출판기념회가 개최된 곳은 열빈루였다. 화교 중화요리점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역사적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 제2장 「한국식 중화요리를 창조하다!」 중에서
서울시 중구 을지로입구에 세워져 있는 36층의 롯데호텔은 롯데백화점과 같이 내외국인에게 인기가 있는 명소이다. 롯데호텔의 부지 가운데 을지로1가 181-4번지와 181-5번지의 부지는 1974년 4월 이전까지 화교가 경영하는 고급 중화요리점 아서원(雅?園)이 자리한 곳이었다.그런데 1969년 2월 서광빈의 무남독녀인 서○○가 롯데 재벌에 아서원을 6,000만 원에 매각하면서 5년간에 걸친 아서원 소송사건이 벌어졌다. (…) 아서원 주주 측과 한국화교 사회는 대법원의 판결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그들은 롯데라는 막강한 경제력을 등에 업은 재벌과의 싸움에서 돈 때문에 패소했으며, 화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판결과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아서원 주주 측의 패소는 한국에서 화교가 살아갈 희망을 빼앗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서울의 3대 중화요리점이었던 태화관(泰和館)과 대관원(大觀園)도 아서원에 뒤이어 문을 닫았다.
/ 제2장 「한국식 중화요리를 창조하다!」 중에서
벽돌제조와 조적의 기술을 가진 일본인 건축기술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화교 건축회사와 화공이 그들보다 더 많이 채용 및 동원된 데는 그들만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미국 남장로회의 스와인하트 선교사는 광주와 순천 지역의 개신교 관련 건축물의 대부분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는 15년간 함께 화교 건축회사와 공사한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장점을 세 가지로 소개했다. 첫째, 직공의 선택과 재료의 사용에서부터 완성까지 전반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실행력이 높다는 점. 둘째, 건축 자재를 스스로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도난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 셋째, 미국의 일반적인 견실한 건축회사의 활동과 비교적 유사하다는 점.
/ 제6장 「종교건축을 도맡아 시공한 화교 건축회사와 기술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