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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88963579924
· 쪽수 : 428쪽
· 출판일 : 2025-01-25
책 소개
목차
1장 고성 현령 원전_충신의 일대기
2장 진주 목사 원사립_충신이자 효자인 유장(儒將, 선비 장수)
3장 가문을 빛낸 선조들
4장 자랑스러운 후예들
저자소개
책속에서
(대신) 윤두수(尹斗壽): 공주(公州)의 수령(목사)도 역시 비어 있습니다. 이암(李岩)이 (그 자리를) 맡을 만합니다. 【이암은 왕실 외척이다. 그는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을 때, 백성들의 전결(田結)을 빼앗아 사사로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국가에 바치는) 공부(公賦, 세금)가 줄어들었는데도, (왕에게) 보고하는 신하들이 (이암은) 저축을 많이 했다고 칭찬하였다. 그래서 윤두수가 (이암을) 힘껏 추천하였다. - 사관의 주석 】
(대신) 이산해(李山海): 공주는 가장 중요한 곳이니, 반드시 적임자를 얻어야 합니다.
선조: 원균(元均)의 아우 원전(元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는 (나라에) 공로도 있고, 또 장사(壯士)이니라.
공석으로 있던 충청도 공주목사로 누구를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로 설왕설래한 회의였다. 그런데 선조는 대뜸 원전의 이름을 들고 나왔다. 원전으로 말하면 한산대첩을 비롯해 여러 전투에서 수훈(殊勳, 뛰어난 공훈)이 있다는 점을 왕은 기억하였다. 게다가 또, “장사”라고 하였다. 원전은 기개(氣槪)가 출중하고 골격(骨格)이 굳센 인물이라는 평가였다. 요즘 식으로 말해, 원전은 용모와 성격이 볼만하고 나라를 위해 큰 공훈을 세운 관리였던 셈이다.
선조가 원전을 이렇게까지 호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왕은 남해에서 원균이 보낸 <장계>를 가지고, 원전이 조정에 여러 차례 드나든 사실을 회상하며 언젠가 때가 되면 반드시 중책을 맡기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위에서도 서술한 것처럼 원전은, 우리 수군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또, 왜적의 형편도 가감없이 보고하는 강직한 무관이었다. 선조는 원전을 믿음직한 신하로 여겼다. 그랬으므로, 왕은 비변사 대신들에게 남쪽 형편에 관해서는 원전에게 물어보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다. 원전은 공훈도 있고 기개도 있는 무관이라는 선조의 칭찬을, 대신들이 어찌 감히 흘려들을 수 있었겠는가.
원사립의 업적을 평가할 때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를 최우선적으로 손꼽게 된다.
첫째, 그는 무관이었으나 문학(文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러한 그의 자질을 평하여 <목사공 사적>에서는, “무관 중에 진주 목사가 된 사람은 그 앞에도 뒤에도 오직 공 한 사람뿐이었다. (武弁中除晉牧者 前後唯公一人云)”라고 하였다. 그 평가는 조금 과장된 것이기는 하였다.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진주 목사 중에도 무관이 몇 명쯤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주 목사 자리는 본래 재간이 뛰어난 문관이 임용되는 것이 상례(常例)였으므로, 아주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도 원사립의 선비다운 풍모를 높이 평가하는 이들이 경향(京鄕)에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둘째, 그는 나라를 위해 충심을 다한 영웅이었다. 정유재란 때 왜적이 서천과 한산 사이를 점거하여 크게 진을 치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고, 여러 지방관을 죽이는 일도 많아 모두가 두려워하였다. “조정에서는 사태를 매우 우려한 나머지 문신이든 무신이든 적을 제압하고 백성을 안정시킬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고자 하였다.(朝廷以是 憂之 方擇文武中 鎭靖之才)” 바로 그처럼 위급한 때에 사태를 해결할 인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원사립이었다.
누구라도 선뜻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원사립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목사공 사적>에서는 그때의 과감한 결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때 공은 (생부 현감 공의) 상복을 입고 있었으나, 특별히 기용하였다. 공은 차마 나랏일을 외면할 수 없어 부득이 왕명을 받들고, 홀로 부임하였다. (而公時在憂服中 特命起復 公以 王事靡臨 不得已膺命 單車赴任)”
단기필마(單騎匹馬)라는 표현 그대로였다. 오직 그 혼자서 한 필의 말을 타고 적진이 코앞인 충청도 서천으로 부임하였다. 그 곁에는 충직한 마부 “돌이”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모아, 몇 십 배나 숫자가 많은 왜적을 공격해 그들을 몰아냈다. 지략 있는 충신이 아니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뒤에도 김해와 만포진에서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사실은, 이미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셋째, 원사립은 출천지효(出天之孝), 즉 하늘이 낸 효자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아무리 날씨가 춥거나 더워도 어머니의 묘소를 돌보는 데 소홀함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였겠지만 <목사공 사적>에는 신기한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공(원사립)이 어머님의 산소에서 통곡하며 울 때는 슬픔과 그리움이 지극하였다. 그래 서였는지 무덤 속에서도 그 울음소리에 응답하는 듯하였다. 하늘이 낸 효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마침내 공은 몸이 상하여 고질병을 얻었으니, 상기를 마치기가 무섭게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 (公天性 至孝 晩年丁內艱 日三上墓 雖隆寒盛暑者不廢 哭泣之際 哀慕 彌篤 自壙中有相應之聲 非誠孝之出天 寧如是耶 凘毁成疾 纔制畢卒)”
세상에 살아 있는 아들이 통곡한다고 하여 어찌 돌아가신 어머님이 지하에서 응답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원사립의 효성이 참으로 지극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원사립에게 많은 이적(異蹟,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믿었다. 가까운 친족은 물론이고 온 마을 사람들 가운데 원사립의 효성에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그의 효제(孝悌, 효성과 우애)를 본받은 후손들 중에서도 효자와 열녀가 대대로 이어졌다. 과연 뿌리가 깊은 나무는 여간한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법이요, 그 꽃이 아름답고 열매도 풍성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