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기타국가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64231517
· 쪽수 : 552쪽
· 출판일 : 2013-01-20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부 음모 속의 수도원
2부 신비주의 철학
3부 테멜의 각인
4부 코바벨의 체스판
5부 아메자락의 고리와 성자의 지팡이
6부 아마로스의 노래
에필로그
마르첼로 시모니와의 대화
역자 후기
리뷰
책속에서
어느덧 비비엔은 말을 몰고 언덕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더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눈이 녹아 진흙탕이 되어버린 길을 달리느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편 깊은 명상에서 깨어난 붉은 얼굴의 남자는 어둠 속으로 내달리는 도망자를 알아본 뒤 벌떡 일어나 말들에게 채찍질을 가하며 추적을 시작했다.
“비비엔 드 나르본! 멈춰라! 생 베므를 피해 영원히 숨어 있을 수는 없어!”
그가 외쳤다.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비엔은 계속해서 말을 몰았다.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현기증 때문인지 모든 것이 환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뒤편에서는 마차 바퀴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차가 그를 따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 진창인 길을 그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뒤에서 그를 쫓아오는 것은 말들이 아니라 차라리 지옥의 악령들이었다.
추적자가 외치는 말은 그가 프랑크 판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다시 책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들은 책을 수중에 넣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인물들이었다. 천사들의 예언을 듣기 위해서라면, 그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그를 고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인간들이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흐르는 눈물을 집어 삼키고 도망자는 말고삐를 마구 흔들어대며 말을 재촉했다. 그러나 비비엔은 말이 낭떠러지에 너무 가까이 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눈과 진흙 때문에 불안정해진 토양이 말발굽 아래에서 허물어지면서 비비엔은 말과 함께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신부의 비명소리가 말 울음소리와 함께 계곡 아래로, 폭설 속으로 사라져갔다. 마차가 멈추고 마차에서 내린 검은 옷의 마부는 낭떠러지에 가까이 다가가 절벽 아래를 살폈다.
“이제 그걸 아는 유일한 사람은 이냐시오 톨레도뿐이군. 그를 찾아내야 해.”
그는 오른손을 얼굴로 가져가 사람의 피부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차갑고 딱딱한 살갗을 어루만졌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는 그의 진짜 얼굴을 감추고 있던 붉은 가면을 턱에서부터 천천히 들어올렸다.
― 프롤로그 중에서
훌코는 상인의 방 앞에 도달했다. 부근에서 인기척이란 전혀 없었고, 따라서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훌코는 침대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궤짝이 그곳에 버젓이 놓여 있었다. 일부러 고생을 하며 찾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지저분해진 손을 내밀며 앞으로 나아간 그는 궤짝 위로 허리를 굽힐 참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그의 목에 와 닿았다. 칼이었다.
대항할 만한 한순간의 여유조차 없었다. 손 하나가 그의 손목을 붙잡고 그를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의 허리뼈에서는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붙잡고 뒤로 잡아당기는 키가 큰 남자는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발자국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제 끝장이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는 살해당할 것이고, 그것이 그의 최후가 될 것이다.
칼날이 그의 목을 눌러오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살 안으로 파고 들어가면서 그의 지저분한 살갗 위로 빨간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칼날이 느슨해지더니 그를 향한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한 번만 도둑질하러 이 방에 들어오면 그때는 아예 목을 잘라버릴 테다.”
훌코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상인임에 틀림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되돌아올 수 있었던 거지? 아래에서 망을 보던 지네시오는? 마치 고양이처럼 움직이는 걸 봐. 이 남자는 마법사임에 틀림없어!
훌코에게는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대항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문 밖으로 곧장 내팽개쳐졌고 그의 목을 위협하던 칼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칼은 훌코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이냐시오는 훌코의 옷에 칼을 문지르며 묻어 있던 피를 여유만만하게 닦아냈다. 그런 다음 그의 어깨춤을 잡고는 엉덩이를 발길로 차며 자신의 몸에서 그를 떨어트렸다.
문 밖으로 내던져진 훌코는 복도 바닥에 코와 무릎을 부딪치며 쓰러졌다. 손으로 바닥을 집으며 안간힘을 다해 재빨리 적을 향해 돌아섰지만 어느 샌가 또다시 칼이 그의 턱을 위협하고 있었다. 상인은 그를 향해 몸을 굽힌 채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손으로 돌려가며, 마치 은색 깃털이라도 된다는 듯 장난을 치고 있었다.
“정말 너 같은 시골뜨기가 내 코앞에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냐?”
이냐시오는 냉소적인 미소와 함께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꺼져라. 내가 생각을 바꾸기 전에…….”
훌코는 뒷걸음질쳤지만 상인은 그의 멱살을 잡으며 다시 그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걸 똑똑히 기억해둬라!”
그는 번뜩이는 칼을 그의 바로 눈앞에 가져가 보이며 외쳤다. 그러고는 그를 놔주었다. 훌코는 공포에 몸을 떨며 손으로 피가 흐르는 목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줄행랑을 쳤다.
상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페르시아의 마법사들이 이른바 ‘불멸의 성인들’이라 부르며 섬기는 아메르타 스펜타와 대천사장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미오 시뇨레, 정확하게 알고 싶으신 게 뭔가요?”
“그래요…….”
백작은 마치 그에게 비밀이라도 털어놓겠다는 듯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몇 달 전에 어느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천사들을 불러오게 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제게 관심이 있는지 물어보더군요. 물론 적당한 배상금은 지불을 해야 합니다.”
이냐시오는 스칼로와 같은 남자가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혹시, 밀랍과 지푸라기로 만든 그 ‘마술머리’를 말씀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마술머리‘라고 하셨나요?”
“네. 어떤 신비주의 학자들은 머리 부적 안으로 천사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말입니다. 말씀하시던 것이 바로 그건가요?”
백작은 상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는 것 같더니 끝내 부정을 하고 나섰다.
“그 납으로 만든 머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프랑스인 신부의 편지는 천사들을 부르는 방법을 설명하는 어떤 책을 언급하고 있어요. 페르시아 수사본에서 필사한 책이라고 하더군요. 초자연적인 피조물들은 현세에 일단 한번 발을 들여놓게 되면 전혀 거리낌 없이 천상의 비밀을 공개한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오간다는 것을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도처에서 합니다. 현자들은 그 학문을 강령술이라 부릅니다.”
“압니다.”
대화의 내용이 그의 근심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비관적인 눈초리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 신비의 책 이름이 뭐라고 하던가요?”
“『우테르 벤토룸』이라고 합니다.”
“『우테르 벤토룸』, ‘바람 주머니’라…….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책입니다. 어디 한번 볼까요, 제가 의미를 밝혀낼 수 있는지…….”
상인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는 생각을 더듬어가며 말을 이었다.
“천사들은 말을 타고 바람 위를 달립니다. 그리고 공기보다도 더 가벼운 기체로 되어 있다고들 하지요. 대신 ‘주머니‘라고 하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이올로스가 율리시즈 앞에서 바람을 집어넣기 위해 사용했던 가죽 주머니밖에 없군요. 주머니를 하나의 방법이나 부적으로 가정해볼 수는 있을 겁니다. 천사들을 꼼짝 못하게 한 다음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드는 부적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가죽 주머니의 뚜껑을 연 것이 율리시즈에게 덕을 가져왔던 건 아니죠.”
이냐시오는 스스로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게다가 속임수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믿으실 수 있느냔 말입니다.”
백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그 사람을 믿어야 할지 말지는 선생님께서 밝혀내셔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조건을 제시하면서 책 주인이 끝에 선생님의 중개를 요청했습니다. 선생님이 아니면 아무하고도 안 만나겠다고 하더군요. 오로지 선생님께만 『우테르 벤토룸』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잘 안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제는 이해하시겠죠? 왜 제가 선생님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지 말입니다. 그 신부를 알고 계신만큼 틀림없이 책의 진가도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도대체 그의 이름이 뭡니까?”
더 궁금해진 이냐시오가 물었다.
“비비엔 드 나르본이라고 합니다.”
이냐시오는 마치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옛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비비엔……. 그의 소식을 들은 지 너무 오랜만입니다. 그가 자취를 감춘 뒤로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