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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동양철학 > 한국철학 > 퇴계/율곡
· ISBN : 9788967350758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13-09-30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1장 퇴계의 삶을 따라가며
1. 퇴계라는 사람
2. 학문과 관직 사이에서
3. 풍성한 집필과 충만한 교유
4. 자득自得의 자는 독자獨自인가 자연自然인가
5. 호남 유림은 어떤 사람들인가
2장 퇴계와 호남 선비들
1. 도학·절의·문장 겸비한 최고의 벗 - 하서 김인후
2. 나를 아는 자가 드물면 내가 귀하다 - 호걸 선비 금호당 임형수
3. 퇴계의 답장 대신 부고를 들어야 했던 노시인 - 면앙정 송순
4. 호리병 속에 은거한 시인 - 석천 임억령
5. 퇴계와 깊은 교분을 나눈 풍영정 주인 - 칠계 김언거
6. 존경하는 학자에게 대를 이어 정성을 다하다 - 행당 윤복과 그의 세 아들
7.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실천한 제자들 - 풍암 문위세와 죽천 박광전
8. 강직하고 고집스러웠던 만년 제자 - 천산재 이함형
9.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하다 - 사암 박순
10. 지음의 제자 - 고봉 기대승
3장 퇴계·고봉의 논쟁과 몇 가지 오해
1. 사칠논변의 의의
2. 사칠논변의 시말
3. 이황과 기대승의 논리
4. 이제 그 사상사적 의의를 돌아보니
주
참고문헌
책속에서
‘김인후’부터 ‘기대승’까지 본문 주요 내용
김인후 - 한마디 말에 의기투합하여 이황과 김인후 두 사람은 친한 벗이 되었다. 이황은 종종 자신을 재목으로 쓸 수 없는 나무인 ‘저력樗?(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에 비유하여 이런 자신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고 술회하는데, 김인후와 함께한 시간을 회상하면서 다시 그런 겸사를 하고 있다. 이런 부끄러운 자신에 비하여 김인후는 허주虛舟, 즉 ‘빈 배처럼 세상에 처신하고 있다’고 했다. ‘빈 배처럼 처신한다’는 것은 <장자>에 나오는 말로, 배를 몰고 갈 적에 사람이 탄 배가 와서 부딪치면 화를 내지만 사람이 없는 빈 배가 와서 부딪치면 전혀 화를 내지 않듯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을 살아가면 아무도 그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형수 - 이황이 임형수에게 준 여러 시를 보면 임형수를 아끼고 좋아하는 이황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은 연배, 출신지 등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기질도 확연히 차이 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교분을 나눌 수 있었을까? 차분한 성격과 겸손한 성품의 이황은 사람을 대할 때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상대를 예우하고 존중했기에 그가 임형수를 친구로서 대한 것은 의아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담대한 호걸이었던 임형수는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인정하지 않거나 존중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만큼은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송 순 - <퇴계집>에는 송순에게 보낸 편지가 보이지 않는데 <면앙집>에는 이황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상당 부분 일실되어 내용을 확인할 수 없고 또 하나는 형이상하形而上下와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人心道心에 대한 이황의 논변에 의문을 제기한 편지다. 송순의 편지를 보면 그가 진심으로 이황의 질정을 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풍류를 즐기는 시인이면서 형이상하나 사단칠정과 같은 성리설에도 관심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이황의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편지 뒤에는 다음의 자주自註가 붙어 있다. “돌아오는 인편에 경호景湖(이황의 자)의 답장을 받지 못하고, 갑자기 그의 부고를 들었다. 사문斯文(유학)의 불행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으니 어찌하리오. 형이상하와 사단칠정의 논변은 소소한 의론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인데 공이 세상을 떠나 질정할 곳이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그저 스스로 애통해할 뿐이다.”
임억령 - 이 시에서 이황은 임억령에 대해 ‘시는 두보와 이백을 따르고 도는 장자와 열자를 흠모한다’고 평가한다. 임억령이 박상의 문하에서 배울 적에 박상은 그에게 <장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당시의 일화가 전하는데 박상이 임억령에게 <장자>를 가르치며 “너는 반드시 문장가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함께 수학하던 임백령에게는 <논어>를 가르쳤다고 하니, 임억령의 기질과 문재에 <장자>가 잘 맞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이 시에서 이황은 임억령을 ‘시은市隱’이요 또한 ‘호은壺隱’이라고 평가한다. (…) 임억령은 시은이지만 또한 호은과 다를 바 없으므로, 그까짓 장흥군수를 그만두어도 아쉬울 게 없다고 이황은 시로써 위로했다. (…) 이처럼 이황과 임억령은 기질이 무척 달랐지만 서로를 알아주고 이해함으로써 벗으로서의 교분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김언거 - 김언거와 이황이 꼭 들어맞은 부분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산수와 더불어 생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김언거가 풍영정을 짓고 시를 모았던 것도 그런 바람을 나타낸 것이리라. 이 마음을 알았기에 이황은 처음 풍영정 시에 화운할 때 ‘산수를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탄식’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모두 한 번씩 그 바람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 모두 다시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이 한 번씩 고향을 떠나게 된 탓에 김언거의 고향에 있는 칠수의 백구는 놀라고 이황의 고향 근처 병산의 학은 원망하게 된 것이다.
윤 복 - 윤복은 인사의 예물禮物을 들고 이황을 찾아뵈었는데, 그날은 마침 이황의 집에 제사가 있었다. 예물을 받을 때 우연히 품목을 확인하지 않았다가 저녁이 되어서 열어보니, 노루 고기와 전복 등의 물건이 있었다. 제삿날에 고기를 받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한 이황은 곧 편지와 함께 고기를 윤복에게 돌려보냈다. 그 편지가 <퇴계집>에 실려 있다. (…) “어제 예단을 받을 적에 미처 살피지 못했다가 저녁이 되어 그 안에 노루 고기와 전복 등의 물품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미 받았다는 이유로 그냥 둔다면 그동안 제가 해온 관례가 일이 허사가 될 뿐만 아니라 훗날 다시 이런 말을 하기도 어려워질 터이기에 삼가 사람을 보내 이 두 물품을 돌려보냅니다. 저의 진심을 굽어 살피시어 괴이쩍게 여기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황송한 심정 이길 길이 없습니다. 살펴주십시오.”
박광전 - 그리고 이황은 자신은 학문의 바른길을 찾지 못해 겨우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듯이 주자 학문의 일부분만 봤을 뿐이라고 했다. 물론 겸사로 들어야 할 터이지만, 워낙 겸손한 인품의 이황이고 보면 그 자신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이어서 이황은 자신이 이미 노쇠한 나이에 이르러 그동안 학문의 길을 잘못 걸어온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이제 박광전과 같은 좋은 벗을 얻어서 자기 학문에 발전이 있었다고 했다. 따뜻한 스승의 마음으로 젊은 제자를 격려하는 말이다.
이함형 - 자기 부부의 불행한 과거사를 털어놓는 것은 사대부의 집안의 범절이 삼엄한 조선시대에는 친구 사이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자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솔직히 털어놓으면서 부부간의 도리를 다하라고 간곡히 타이르고, 아내를 박대하는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학문도 쌓을 수 없고 행실도 닦을 수 없다고 간절히 충고한 것을 보면, 이황의 인품이 얼마나 너그럽고도 진솔했으며 제자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넉넉히 알 수 있다.
박 순 - 1568년에 박순은 양관兩館 대제학에 임명되고 이황은 제학에 임명되었다. 이때 박순은 존경하는 이황이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임명된 것을 미안하게 여겨 직임을 바꾸어줄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이황이 양관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일에 대해 이황은 정유일鄭惟一에게 보내는 편지에 “박화숙朴和叔(박순의 자)이 문형文衡(대제학의 이칭)을 맡고 있으면서 나를 추대하고 자신은 사양하여 마침내는 이 관직을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소”라고 했고, 끝내 사양하여 직임을 받지 않았다.
(이하 생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