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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일본사 > 일본사 일반
· ISBN : 9788967358624
· 쪽수 : 660쪽
책 소개
목차
추천 서문
들어가는 말
서문
1부 굴레의 기원
1장 에도 시대 이전의 일본
천황 제도 | 후지와라 가문과 헤이안쿄의 설립 | 헤이안 시대의 유산 | 여성에 의해 쓰인 문학 |『 마쿠라노소시』와『 겐지 이야기』| 헤이안 질서의 붕괴와 봉건주의의 등장 | 쇼군 | 몽골의 침략, 가마쿠라의 멸망, 아시카가 막부 | 일본의 ‘봉건주의’ | 봉건시대의 문화와 종교 | 유럽인의 도래 | 일본의 재통일
2장 근대 국가로서의 일본의 탄생
도쿠가와 시대의 쇄국 | 질서와 안정에 대한 도쿠가와 막부의 집착 | 경제와 사회의 변화 | 대중문화 | 47명의 로닌 이야기 | 페리 제독의 ‘흑선’과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 | 1868년의 ‘혁명’? | 막부의 종말
3장 메이지 유신에서 미군정기까지
이와사키 야타로와 근대 일본 산업 조직의 탄생 | 자본의 축적과 입헌 정부라는 겉모습 | 1895년의 청일전쟁 | 1904~1905년의 러일전쟁 | 메이지 시절에 뿌리내린 근대 일본의 비극 |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과 메이지의 유산 |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정치적 통제를 뛰어넘은 관료주의 | 전쟁의 재앙 | 루거우차오 사건과 노몬한 전투 | 진주만, 항복, 전쟁의 유산
4장 경제 기적
전후 10년간의 이례적인 상황 | 고도성장의 정치적·문화적 기반
5장 고도성장의 제도적 기틀
일본의 기업들 | 산업협회들과 경쟁의 통제 | 고용 관행 | 교육 제도 | 금융 시스템 | 관료 제도 | ‘현실의 관리’
6장 성장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
성장의 대가 | 야구와 샐러리맨 문화의 등장 | 고도성장기 일본의 여성 | 마쓰다 세이코 | 고도성장의 제도와 글로벌 경제 프레임워크
2부 오늘의 일본을 구속하고 있는 어제의 굴레
7장 경제와 금융
대차대조표 불황 | 일본의 차이 | 공황의 회피: 일본 금융기관의 구제 | 잘못된 전제, 그리고 활짝 열린 재정 적자의 문 | 아시아 금융 위기의 단초 | 일본 정부의 재정 지출
8장 비즈니스
서비스 분야 | 바뀌어가는 고용 관행 | 세계화의 어려움 | 글로벌 브랜드와 해외 직접 투자 | 매몰 비용의 포기 | 한국으로부터의 도전 | 일본 비즈니스의 미래와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
9장 사회문화적 변화
세계로 뻗어나간 일본 문화 | 갸루 | 오바타리안, 소다이고미, 황혼 이혼 | 초식남 | 일본의 남성성 | 변화하는 일본 남성 집단 | 계급의 부활 | 일본 지도층의 쇠퇴
10장 정치
1955년 체제 | 다나카 가쿠에이 | ‘닉슨 쇼크’와 다나카의 총리 시절 | 록히드 스캔들 | 야미쇼군 다나카 | 측근들: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 | 오자와 이치로 | 정치 질서의 수호자들 | 1994년의 선거제도 개혁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야스쿠니 신사와 고이즈미 정권의 외교관계 | 고이즈미 이후의 자민당
11장 일본과 세계
‘신일본통’ | 오키나와와 후텐마 해병 기지 | 하토야마 정권의 붕괴 | ‘영향력의 대리인’ | 3·11과 간 나오토 정권의 운명 | 노다 정권의 자멸 | 센카쿠열도와 일본의 영토 분쟁 | 아베 신조의 귀환 | 경제 회복? | TPP, 특정비밀보호법, 아베 정권의 우선순위 | 중국과의 관계 정립 | 지속 가능할 수 없는 미일 ‘동맹’ | 다시 아시아의 일원으로 | 아베의 과욕과 미래
부록 1: 메이지의 지도자들
부록 2: 전후 일본의 유력한 정치가·관료
더 읽을거리
한국어판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리뷰
책속에서
대신 진정한 사랑이 그렇듯, 그 매혹에는 비극에 대한 깨달음이 덧입혀졌다. 불완전한 생명체와 그들이 만든 것을 사랑하는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깨달음이다. 이제 나는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일본 근대사의 대부분이 비극이고, 그 비극이 흔히 그렇듯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결점이 결합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나라와 이 사람들을 사랑하게끔 만든 바로 ‘그 무언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모두를 끌어들인 것은 섹스였다. 섹스는 에도 시대에 화려하게 꽃핀 대중문화를 움직이는 공공연한 뿌리이자 원동력이었다. 나중에 일본인들이 서양인들의 도덕관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부키나 우키요에 같은 정통 일본 예술의 뿌리는 의도적으로 숨겨졌다. 특히 그때까지 일본의 지도층에게 쓰레기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던 에도 대중문화인 목판화나 예술품들에 서양인들이 열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랬다.
젊은이가 군주가 당한 모욕을 복수하고는 기꺼이 스스로의 배를 가른다는 생각은 대부분의 농민에게 기괴하고 불효스럽게 느껴졌다. 젊은이는 모름지기 쓰러질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 아버지에게 효도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무라이 정신 자체도 에도 시대에 이미 풍자의 대상이 될 정도로 화석화되었다. 사무라이들은 그런 정신이 실질적으로 무의미해진 사회에 대해 시위라도 하듯 좀더 과장된 자기희생과 지독한 금욕주의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일본이 갑자기 외부로부터의 군사 위협과 국내의 격화된 자유민권운동에 직면하자, 사무라이의 가치는 에도 시대 박물관으로부터 꺼내져서 단지 근대화된 군대에 필요한 것이 아닌 군국주의 사회 전체에 필요한 가치로 재포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