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예술/대중문화의 이해 > 미학/예술이론
· ISBN : 9788968494369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7-08-30
책 소개
목차
서문 / 4
Ⅰ. 사회학의 예술-되기
1. 여성이 될 것인가, 여성-되기를 할 것인가 / 11
2. 매끄러운 공간과 프랑스 예술 스쾃 / 33
Ⅱ. 철학의 문학-되기
1. 문학과 건강 / 93
2. 들뢰즈와 문체 / 120
3. 들뢰즈의 후기 프루스트론과 거미-되기 / 135
Ⅲ. 영상 이미지와 사유 이미지
1. 사무엘 베케트와 사유 이미지 / 153
2. 프루스트와 크리스탈-이미지 / 177
3. 미디어아트와 미시정치 - 벤야민과 들뢰즈의 ‘정치’ / 213
Ⅳ.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Ⅰ. 사회학의 예술-되기
1. 여성이 될 것인가, 여성-되기를 할 것인가
1) 좌초된 ‘다른 삶’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의 주인공 ‘미녀’는 마을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인 청년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모를 가꾸고 가사에 전념하는 여느 여자들과 달리 미녀는 오직 책과 벗하면서 살아간다. 늘 시골마을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한편 젊고 멋진 왕자는 외모만 가꾸었지 마음을 가꾸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녀의 마법에 걸려 야수가 된다. 끔찍한 외모로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마법은 풀리게 된다. 하지만 야수는 자신의 모습을 비관한 나머지 외롭게 살면서 성격마저 포악해진다.
미녀와 야수의 만남은 두 젊은이의 삶에 다른 선을 긋게 한다. 미녀는 야수로 인해 꿈꿔오던 다른 삶을 살게 되고 외모만큼이나 거칠던 야수의 마음에는 미녀에 대한 사랑이 싹트게 된다. 이 만남은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이나 멋진 왕자로서의 삶을 벗어던지고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야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에는 미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은 그들에게 본래 자신의 일상적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시간들이다. 야수의 진심을 안 미녀는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녀 또한 사랑고백을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야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평범한 여성의 삶에서 도주하려는 그 순간, 야수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평범한 선남선녀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미녀와 야수. 일상적 삶으로부터 일탈은 종결을 고한다. 이제 왕자의 사랑을 얻게 된 미녀와 왕자가 되어버린 야수에게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내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미녀’는 무언가 다른 삶을 기도하면서 쉽지 않은 사랑을 선택했지만 야수가 왕자로 되돌아와 버렸기에 결코 다른 삶을 실현할 수 없다. 삶의 여정에서의 일탈은 언제라도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일상에서의 이탈 혹은 도주는 일상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여성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성으로서의 삶과 여성-되기의 삶을 구분한다. 일탈은 여성으로서의 삶이겠지만 이탈 혹은 도주는 여성-되기의 삶이다. 이 글은 우선 ??천개의 고원?? 10장에서 말하는 여성-되기가 무엇인지 밝혀보고, 더 나아가 현대의 여성주의 담론들이 여성-되기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궁극적으로는 여성-되기란 여성주의 담론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2) 모방을 넘어
먼저 들뢰즈와 가타리의 여성-되기를 논하기 전에 ‘-되기’가 무엇인지, 그 배경에는 어떤 철학이 숨겨져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논의는 조금은 복잡하지만 난해하기로 유명한 두 사상가의 주장을 따라가 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
‘-되기(devenir-, becoming-)’의 개념은 들뢰즈의 생성 철학의 핵심이다. 서구의 전통철학이 본질적이고 불변하는 초월적 ‘존재(etre, be)’에 대한 사유를 기본으로 삼는데 비해 들뢰즈는 존재와 동일시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성’을 사유한다. 생성의 사유에는 존재의 사유가 지닌 고정된 이미지가 없다. 대신 생성은 움직임, 운동, 변화를 사유한다. ??의미의 논리??에서 루이스 캐롤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앨리스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앨리스가 자란다’에는 동시에 커지고 작아지는 움직임, 운동, 변화가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생성이다.
‘-되기’ 또는 생성이 들뢰즈의 사유에서 부각된 것은 스피노자의 영향이다. 스피노자는 개체들의 결합 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이 되는 것을 양태라고 말하고 이 양태들의 변형을 변용이라고 한다.(SPP, 71:76) 들뢰즈는 모든 양태는 이행과 해체를 통해 관계를 맺으며 따라서 개체는 오로지 운동과 정지, 느림과 빠름에 의해서만 서로 구별될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한다. 개체들을 구별하게 해주는 속도와 운동 관계가 들뢰즈에게는 바로 되기이며 생성이다. 개체는 이러저러한 연결접속 관계 속에서 다른 개체의 부분이 되며, 이 되기의 운동은 무한히 계속된다. 되기를 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의 변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속도와 힘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생성의 사유는 가타리와의 공동저작들에서는 ‘-되기’라는 용어로 자주 등장한다. 그들이 말하는 ‘-되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우선 ‘-되기’는 모방이 아니다. 모방은 유사, 유비, 동일시의 관계이기 때문이다.(MP,338:452) 반면 ‘-되기’에서 개체의 한 요소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해 다른 개체의 한 요소와 접속하는데 이 접속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개체는 이전의 다른 두 요소와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다. 두 요소가 어떤 것이었는가가 아니라 두 요소의 연결접속이 어떤 관계인가가 중요하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는 난초와 말벌의 수정은 난초가 말벌을 모방하고 말벌이 난초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난초도 말벌도 아닌 다른 개체가 되는 것, 난초의 말벌-되기, 즉 말벌의 난초-되기이다.
더 나아가 ‘-되기’는 과거의 기억, 회상, 추억을 현재로 재현하지 않는다.(MP,360:556) 그것들을 재현한다는 것은 모방의 연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러 번 강조했던 다음 예는 설득력을 갖는다. 한스의 행동은 과거에 보았던 말에 대한 기억을 현실에 재현하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한스와 말이라는 개체들의 운동과 속도에 의해 연결접속된 말-되기이다.
결국 ‘-되기’는 모방이나 기억이 아니라 블록(bloc)이다. 블록은 선분의 양쪽 끝이 모두 변하여 만들어진 영역, 한 항이 다른 항으로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두 항 모두 변하여 만들어진 부분이다. 되기의 블록이란 각각의 되기를 통해 연결된 상관적인 항들의 짝을 말한다. 되기의 선은 이 선이 연결접속하는 점들에 의해서도 이 선들을 합성하는 점들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되기의 선은 점들 사이를 지나가며 중간을 통해서만 돌출하기 때문에 시작이나 끝이 아닌 중간만이 있다.(MP,361:557) 난초의 말벌-되기, 말벌의 난초-되기는 난초의 생식이나 말벌의 생식에서 해방되어 탈영토화한 난초와 말벌의 되기의 블록이다. 또한 한스의 말-되기는 유년기의 기억에서 해방되어 한스와 말이 연결접속됨으로써 만들어진 공통의 탈영토화의 지대를 형성하는 되기의 블록이다.
??천개의 고원?? 전체에서 ‘-되기’는 자기 동일시나 뿌리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리좀의 상태, 정착이 아니라 자기 영토에서 벗어나 탈영토화하는 유목적 삶, 분절된 자기 지층에서 벗어나 탈지층화를 실현하는 모든 운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3)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별종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 10장에서 “모든 되기들이 여성-되기와 함께 시작하고 여성-되기를 경유한다”(MP,340:526)고 단언한다. 그런 점에서 여성-되기는 ‘-되기의 선을 풀어가는 실마리이자 열쇠라 하겠다. 되기는 움직임과 운동이 내재해 있다는 점에서 존재와 구분되었던 것처럼 여성-되기는 여성이라는 존재와 엄밀히 구분되어야 한다. 여성은 정지이지만 여성-되기는 운동인 점에서, 여성은 고정된 존재(etre)이지만 여성-되기는 무한한 주체성을 지닌 생성인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여성-되기는 몰적(molaire) 존재로서의 여성과는 전혀 유사하지 않다.(MP,337:522) 들뢰즈와 가타리가 몰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컨대 여성과 남성을 대립시키는 이분법 속에서 포착되고 형태에 의해 한정되고, 기관과 기능을 갖추고 있고, 주체로 규정된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되기는 이러한 존재를 모방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러한 존재물로 변형되지도 않는다. ‘미녀와 야수’에서의 미녀를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여성이라고 칭하기 위해 여성-되기의 개념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 사용한 것이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여성은 그러한 존재들 전체를 칭하는 몰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여성-되기를 한다고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의 모습을 모방하거나 띠는 것이 아니라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또는 미시-여성성의 근접지대로 들어가는 입자들을 방출하는 것, 말하자면 우리 자신 안에서 분자적인 여성을 생산하고 분자적인 여성을 창조하는 것”(MP,338:522-3)이다. 이는 인간이 동물-되기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개-되기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짖어대는 몰적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분자적인 개를 방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되기이건 여성-되기이건 모두 분자-되기를 한다. 합성된 분자들 간의 근접지대로 들어가서 방출된 입자들 간의 운동과 속도의 관계들을 생산해내는 것, 그것이 분자-되기이다. 두 종류의 입자들이 각자의 개체의 주변부로 나와서 다른 개체의 근접지대로 들어가는 것이 분자-되기의 블록이다. 동물-되기의 블록은 인간의 입자들이 동물의 입자들과 접속되어 몰적 인간도 몰적 동물도 아닌 비규정성과 불확실성의 객관적 지대, 주변부와 식별불가능한 지대에 있다. 여성-되기의 블록은 몰적 여성이 아닌 분자적 여성의 생산에 있는 것이다.
여성-되기의 개체를 별종이자 아웃사이더라고도 한다.(MP,298:465) 다른 개체와 접속이 용이한, 즉 분자적 방출이 용이한 접경지대, 가장자리, 경계와 사이를 잇는 지대에서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남장을 한 여자나 일부 여성성을 드러내는 남성 동성애자는 비정상인 것이 아니지만 사회에서 별종이나 아웃사이더로 지목받는다. 그러나 사실 이 별종과 아웃사이더야말로 몰적 존재로서의 남성이나 여성에서 가장 멀리 탈영토화한 여성-되기의 실재이다.
여성-되기는 결혼이나 전쟁과 같은 사건에서 두드러지기도 한다. 처녀로 남아 결혼을 거부하려는 여성은 여장을 해서 전쟁터로부터 도주하는 전사와 동등성 혹은 등가성을 보여준다. 아마존의 여성 전사들은 결혼을 거부하여 처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여성들끼리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고 남성이 없는 공동체를 살아가기에 여성의 몫이 아닌 것으로 여겼던 전쟁에 전사로써 참가하는 것이다. 여성-되기와 전쟁 기계-되기를 통해 아마존의 여성전사들을 -되기의 운동 가운데 있다. 따라서 ‘남성-전쟁’과 ‘여성-결혼’ 간의 관계는 유비가 아닌 관계들의 등가성, 유사성 없는 대응관계, 일종의 상동성을 갖는다.
그러한 예는 그리스신화의 아킬레우스와 펜테실레이아의 이야기에서 예를 찾을 수 있다. 전쟁을 피해 여장을 하기도 하고 펜테실레이아에게 사랑에 빠져 국가를 등지는 아킬레우스, 또한 여성 전사로서 전쟁터에서 아킬레우스와 맞서 싸우면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의 대상을 죽이고 자신도 죽게 되는 펜테실레이아, 이들의 이야기는 유비나 유사로는 설명될 수 없다. 죽음과 사랑이 동시에 두 사람을 스쳐지나갔던 그 신속함과 격정은 생성에 의해서만 이해 가능하다. “일련의 분자적인 도취, 현기증, 실신 속에서” 아킬레우스와 펜테실레이아가 “순간적인 지그재그의 운동은 비대칭적인 생성의 블록”(MP,341:527)으로 되기를 실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킬레우스와 펜테실레이아의 사랑은 미녀와 야수의 사랑과 전혀 다르다. 아킬레우스와 펜테실레이아의 사랑이 지나가는 전쟁기계에는 다양하게 결합된 성, n개의 성이 생성되지만, 미녀와 야수의 사랑은 남녀라는 두 성의 사랑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야수는 남성으로서 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분자적 성 중에 하나로서 미녀의 분자적 성을 연결접속하고자 한다. 분명 미녀와 야수의 사랑도 여성-되기와 동물-되기를 시도하면서 수많은 성의 입자들의 방출과 연결접속을 시도한다. 하지만 야수의 마법이 풀림과 동시에 절대적 사랑은 끝이 나고 성은 두 성으로 메말라버린다. 미녀와 야수의 사랑은 남녀의 사랑으로 재영토화되어 버리는 상대적인 탈영토화 운동에 귀착되어버리지만 아킬레우스와 펜테실레리아의 사랑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성을 생성하면서 탈영토화의 절대적 문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되기가 동물-되기, 분자-되기를 경유하여 지향하는 것은 지각불가능하게-되기이다. 여성-되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인간인지 동물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자적으로 해체되어 결국에는 지각 불가능한 지점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되기의 선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인간에서 동물로, 분자들로, 입자들로 끝내는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선을 긋는다.
4) 유목적 ‘주체’는 없다!
여성-되기(devenir-femme)에서 ‘하이픈(-)’을 한 까닭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여성에 대한 사유가 전통적 사유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표시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여성 되기’는 남녀라는 이분법적 성에서 남성에 의해 억압받았던 여성의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주장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성-되기’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에 의한 분자적 생성에 의해 남녀의 양성이 아니라 수많은 n개의 성을 만들어내는 생성운동이다.
여성-되기는 남성이든지 동물이든지간에 주변의 어떤 것과도 식별이 불가능한 중간, 사이, 경계지대에서 생성을 하자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이 되어 여성이라는 고정된 주체성을 기필코 지켜내자는 몰적 존재로서의 여성 되기와는 다르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되기의 선을 끊임없이 그어나가자는 것이지 여성이라는 점에 종속되자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한데 묶여 남성적 점, 여성적 점을 만들어 놓고 그 여성적 점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하자고 하는 것은 이제껏 역사 속에서 남성이 남성적 점과 여성적 점을 만들고 그 점을 지키기 위해 해왔던 지배와 억압의 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 이른바 주체화의 점에 이르기 위한 여성 되기는 거짓 운동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