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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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 시단을 대표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인이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으로 제국의 붕괴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했다. 735년 진사 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재차 유람에 나서는 한편 이백, 고적(高適)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으로 옮겨 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삶에 대해 절감하기 시작했다. 755년은 그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해였다. 그해 10월, 그는 10년 노력의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이후 두보의 삶은 전란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된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州)에 떨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이후 두보의 삶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전란의 와중에 현종(玄宗)은 사천으로 피난 가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임시로 즉위한 사실을 알고 두보는 이를 경하하기 위해 영무로 가던 중 반군에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되어 얼마간 억류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봄의 전망(春望)>을 썼다. 757년 2월, 숙종이 행재소를 봉상(鳳翔)으로 옮겼을 때 두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해 숙종을 배알해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것은 곧이어 파직으로 이어졌다.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행을 감행한다. 두보의 대표적 사회시로 알려진 이른바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 이즈음에 지어졌다.
759년 두보는 진주에서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해 성도(成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막부(幕府)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엄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이르게 되었다. 기주는 성도에 비해서도 더욱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시가 창작에서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가을날의 흥취(秋興八首)>를 꼽을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풍요로웠던 과거와 일순간에 일어난 전란을 지극히 미려한 언어로 수를 놓듯이 새긴 이 시는 율시(律詩)가 이룩한 미감의 정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두보는 기주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에서 벼슬하리라는 희망을 끝내 놓을 수 없었기에, 768년에 협곡을 빠져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과 담주(潭州) 사이를 전전하다 뱃길에서 사망했다.
시인 두보가 품었던 뜻은 시종일관 정치를 바르게 펼쳐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었으나 운명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전란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삶은 자기 한 몸도 돌보기 힘들 만큼 곤란해지는 때가 많았다.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은 아니었으나, 역설적으로 상황이 열악해질수록 그는 더욱더 시인의 눈으로 피폐한 사람과 영락한 사물을 따뜻하게 돌아보고,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 사후에 그에게 붙은 ‘시성(詩聖)’이나 ‘시사(詩史)’라는 칭호는 그의 고단하고 정직했던 삶에 대한 애도 어린 칭송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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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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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81년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1983년과 1992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문학 석사와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계명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몸담아 지금 중국어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0년 국립 타이완사범대학(國立臺灣師範大學), 1997년과 2017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University of Minnesota)와 이스턴미시간대학교(Eastern Michigan University)에서 연구 교수를 역임했다. 일찍이 시로써 시를 논한 비평 양식에 관심을 기울여 우리나라 중국 문학계 최초로 시로써 시를 논한 ‘논시시(論詩詩)’라는 특수한 비평 양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논시시의 가장 전형적인 체재인 ‘논시 절구(論詩絶句)’를 중심으로 그 기원과 역사적 전개 과정 및 특징 등을 탐색해 〈역대 논시 절구 연구(歷代論詩絶句硏究)〉(서울대학교 문학 석사 학위 논문, 1983) 등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당시 우리나라 중국 문학계의 연구가 시가 장르 일변도로 편중되어 있음을 문제점으로 진단하고, 연구가 크게 미진한 산문 장르로 관심을 돌려 한유(韓愈)를 중심으로 해당 연구에 착수했다. 그 성과로 나온 《한유 산문의 분석적 연구》(1992)는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의 산문 분야 제1호 박사 학위 논문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한유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전승되고 평가되었는지를 탐색해, 그 연구 성과를 타이완과 중국 학계에 알리는 노력을 시도했다. 즉, 우리나라의 한유 산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평가를 타이완의 ‘제5회 중국 수사학 국제 학술 대회’(2003)에서 발표하고 〈韓國如何評論韓愈散文的藝術成就〉라는 논문을 《수사논총(修辭論叢)》 제5집(2003)에 게재한 것을 시작으로, 중국 차오저우시(潮州市)에서 열린 ‘2009 한유 국제 학술 대회’에서 한유 시문의 우리나라 전파 시기와 과정 및 배경에 대해 발표하고 〈韓愈詩文在韓國的傳播時期·過程和背景〉이라는 논문을 《저우커우사범학원 학보(周口師範學院學報)》 제33권 제1기(2010)에 게재했으며, 한유가 유학 방면에서 거둔 성취에 대한 우리나라에서의 평가를 베이징에서 열린 제1회 중국 경전의 해외 전파 문제를 다룬 국제 학술 대회에서 발표하고 〈韓國如何評論韓愈在儒學上的成就〉(2015)라는 논문을 대회 논문집(2016)에 게재했다. 그리고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한유의 산문 작품을 모두 우리말로 번역하고 상세한 해설과 주석을 붙였다. 그 작업은 한국연구재단의 ‘2007년 명저 번역 지원 사업’의 지원 아래 진행되어 《한유 산문 역주》(2012)라는 다섯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그 성과가 높이 평가되어 ‘2013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되었다. 2020년에는 현전하는 세계 최초의 실록인 한유의 《순종실록(順宗實錄)》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을 붙여 《당 순종실록 역주》로 출간했는데, 그 책은 한국대학출판협회 ‘2020 올해의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되었다. 한유를 위시한 중국 산문 연구 성과가 타이완과 중국 학계에서 높은 관심과 평가를 받아 두 곳의 권위 있는 학술지와 언론에 소개되었다. 즉, 중국 산문 연구의 권위자인 국립 타이완사범대학(國立臺灣師範大學)의 옌루이팡(顔瑞芳) 교수가 《한유 산문 역주》를 중심으로 한 성과를 〈韓愈在韓國〉이라는 제목으로 《국문천지(國文天地)》 제29권 제6기(2013)에 소개했고, 중국 송대(宋代) 산문 연구의 권위자로 중국산문학회 부회장인 화둥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의 훙번젠(洪本健) 교수가 〈韓國李鍾漢敎授和他的韓愈硏究〉라는 제목으로 《저우커우사범학원 학보》 제33권 제1기(2016)의 ‘한유 연구’ 전란에 게재했다. 그리고 2009년 중국 차오저우에서 논문 발표를 할 때, 그 지역의 대표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취재하고 상세한 내용을 TV 방송과 신문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 밖에 2011년부터 매주 한 번씩 계명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장자 읽기’ 세미나를 주도해 인문학 분야뿐 아니라, 사회 과학, 자연 과학, 공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과 함께 《장자(莊子)》의 원전을 완독한 뒤, 《한비자(韓非子)》 읽기로 이어 학제 간 소통과 융합 연구도 도모해 오고 있다. 학술 연구 외에 계명대학교에서 학과장, 교무부처장, 명교생활관(기숙사)관장, 인문대학학장, 통번역대학원장, 기획정보처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쳐 지금은 동산도서관장을 맡아 학문과 대학의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Lee Jonghan is a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Chinese and Chinese Studies, College of Humanities and International Studies, Keimyung University and Director of Dongsan Library. He is interested in the study of Chinese prose, including the works of Han Yu, as well as the translation of Chinese classics. His publications include The Prose Works of Hanyu: A Korean Translation with Annotations (5 volumes, selected as an outstanding publication by the Korean Academy of Sciences in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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