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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영미소설
· ISBN : 9788981339432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11-04-15
책 소개
목차
1_ 7
2_ 34
3_ 56
4_ 79
5_ 103
6_ 125
7_ 151
8_ 187
9_ 211
10_ 228
11_ 246
12_ 265
13_ 283
14_ 304
15_ 330
16_ 357
17_ 377
옮긴이 후기_ 381
주_ 393
리뷰
책속에서
우리가 입을 열면 우리가 족보도 모르는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지. 우리는 걸어 다니는 사전들인 셈이야. 한가로이 수다를떨 때 내뱉는 한 문장에서도 우리는 라틴어, 앵글로색슨어, 옛 스칸디나비아어를 보존하고 있거든. 우리는 머릿속에 박물관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면서 날마다 우리가 들어보지도 못한 종족들을 기념하고 있어. 심지어 우리는 엄청난 분량의 정보를 말하지 - 우리 언어는 우리가 읽어보지도 못한 모든 것들의 언어거든. 셰익스피어와 흠정 영역 성서가 슈퍼마켓에서, 버스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수다에서 표면으로 떠오르곤 하거든. 난 이런 일들이 기적 같아. 늘 볼 때마다 경탄하게 돼. 낱말들이 세상 무엇보다 더 오래 간다는 게, 낱말들이 바람과 함께 불면서, 동면했다가 다시 깨어나고, 전혀 뜻밖의 숙주에 기생체로 붙어 은닉하고, 살아남고 살아남고 또 살아남는다는 게.
죽음을 다루는 이동식 무기 몇 톤을 수줍게 위장한 말들인 “마틸다”며 “허니”들에 대한 간명한 수다, 그리고 폭격을 당했을 때 폭발하지 않는 (대신 탑승한 군인들은 산 채로 구워진다) 그런 걸 두고 “푹 익었다”고 표현하는 식의 귀여운 완곡어법. 아, 피크닉이라는 말도 있었다.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라 ‘결국 해냈고’, 총에 맞는 게 아니라 ‘총알을 막았다’. 그런 게 얼마나 괴상한 말들이었는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당시에는 그게 정상적이고, 심지어 용인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낱말들은 내 직무였는데, 그때는 그 낱말들의 함의들을 정밀 분석할 만한 때가 아니었다. 아니 최소한 그런 종류의 분석은 할 수 없었다. 연합군 총사령부에서 나오는 코뮈니케들…… 공보 장교한테서 나오는 브리핑들…… 지금까지 갖고 있는 임페리얼 타자기로 정신없이 두들겨 작성한 나의 기사들.
오래 전, 우리가 열세 살 열네 살이고 만사에 라이벌이던 시절, 우리는 어머니가 어느 여름 과외교사로 고용했던 젊은 청년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었어. 아마, 대학생이었을 거야. 열아홉이나 스물쯤 되었을까. 교실 밖에서 우리는 선생을 무시했지. 그러다가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어. 어느 날 내가 교실에 들어갔더니 고든이 말콤과 단 둘이 베르길리우스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두 가지 사실을 눈치챘지. 고든이 공부를 즐기고 있다는 것과,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어. 허리를 굽혀 연습문제집을 바라보고 있는 말콤의 손이 고든의 어깨에 놓여 있었어. 나는 그 손을 보고 - 야윈 갈색 손이었지 - 짙은 눈썹과 갈색 눈으로 고든과 고든이 하는 말을 열중해서 듣고 있는 말콤의 얼굴을 바라보았어. 그러자 온몸이 뜨거운 질투로 가득 찼어. 그 손길이 내 어깨에 얹혀 있기를 바랐어. 나는 그 어른을, 남자를 원했고, 그러자 갑자기 무한하게 매혹적인 눈길이 나를 겨냥하더군.
나는 장미꽃밭 한가운데로 어머니를 찾으러 가서, 나도 라틴어를 배우고 싶다고 선언했어.
아마, 그로부터 몇 년 후, 내가 대학 입학시험을 그렇게 거뜬히 합격할 수 있었던 건, 처음으로 일깨워진 성적 욕망 때문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