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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문화/문화이론 > 성(性)/성문화
· ISBN : 9788984454170
· 쪽수 : 440쪽
책 소개
책속에서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태양신의 딸이라 부를 만큼 빼어난 미모에 우수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덕분에 각종 외국어에 능통하고 지혜와 재능이 출중해서 천부적인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기원전 51년, 국왕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두 사람이 공동으로 집정했다.
하지만 얼마 후 두 군주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로 쫓겨났다.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에서 군대와 결탁하여 이집트의 왕위를 되찾을 준비를 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파르살루스에서 전투 준비를 하며 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양측의 전세가 매우 긴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였다. 당시 쉰다섯 살의 막강한 통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과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군사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고, 도망가는 그를 쫓아 이집트로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카이사르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신하 포티누스를 시켜 폼페이우스를 유인해서 죽인 다음 그의 머리를 베어 카이사르에게 바쳤지만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는 데는 실패했다. 카이사르는 로마인인 폼페이우스가 다른 민족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장차 누가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든지 간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집트가 로마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곧바로 로마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내분에 대해서 처음부터 중립을 지키거나 무관심했다.
이처럼 중대한 순간이 닥치자 클레오파트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기원전 47년 3월 스물한 살의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의 본거지를 떠나 바다를 통해 유유히 실리시아의 타르수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는 목욕을 깨끗이 하고 하녀를 시켜 몸에 향유를 바른 다음 담요로 몸을 감쌌다. 담요에 싸인 클레오파트라는 하녀의 손에 들린 채로 자신이 곤경에 처하기를 바라던 포티누스의 앞을 지나 당당하게 카이사르의 병영으로 들어갔다. 담요가 서서히 펼쳐지자 호색한 카이사르는 눈앞에 나타난 클레오파트라의 매혹적인 자태에 넋을 잃었고 차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쩔쩔매면서 여왕에게 구애했다. 그러고는 곧장 나일 강으로 가서 2개월 동안 밀월여행을 즐겼다.
이렇듯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포티누스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이집트의 막강한 해병대를 앞세워 4천 명밖에 되지 않는 카이사르의 로마군대를 포위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현저한 세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력을 다해 공방전을 치렀다. 3개월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하마터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뻔했으나 다행히 때마침 도착한 로마의 지원군 덕분에 전세는 역전이 되었다. 결국 이집트 군대는 전멸했다. 포티누스도 살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전쟁의 패배로 소란한 가운데 익사했다. 혼란이 진정된 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왕위를 독점했고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낳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에 로마에서 암살당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카이사르의 지휘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실리시아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로마를 배반한 경위를 규명하려고 했다. 서슬이 퍼렇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마주했던 단 한 번의 대면에서 바로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고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은 시작되었다. 기원전 37년 두 사람은 마침내 이집트에서 결혼을 발표했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흠뻑 빠져 있어서 로마 동부 지역의 일부를 이집트 연인에게 바치려고까지 했다. 로마의 원로원은 즉각 격앙된 반응을 표출했고 외부에 출정을 나가 있던 안토니우스를 ‘조국의 원수’라고 선언한 동시에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 포고했다.
― <서문_성 스캔들은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