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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동유럽소설
· ISBN : 9788989571773
· 쪽수 : 412쪽
책 소개
목차
백합 세 송이·7
훼방 선생·13
성 벤체슬라오의 미사·27
물의 정령·49
올해 위령의 날에 쓴 글·63
보렐 씨가 해포석 파이프를 길들인 사연·87
한밤의 이야기·97
리샤네크 씨와 슐레글 씨·121
다정한 루스카 부인·143
그녀가 거지를 망하게 만든 방법·155
1849년 8월 20일 오후 12시 30분에 오스트리아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173
인간 군상 ― 어느 수습 변호사의 목가적이고 단편적인 기록들·207
1890·361
·해설 천년 독서의 이야기_ 이바나 보즈데호바·393
·지은이 소개·408
·옮긴이 소개·411
책속에서
15분쯤 지나서 문득, 그 소녀가 다시 백합 세 송이의 입구 안쪽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비에 젖은 드레스를 매만지며 머리카락에서 빗물을 짜냈다. 그녀보다 나이 많은 여자 하나가 그것을 도왔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집에는 왜 갔던 거니?”
여자가 물었다.
“언니가 절 데리러 왔었거든요.”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였다.
“집에 무슨 일 있어?”
“방금 엄마가 죽었어요.”
나는 몸서리를 쳤다.
아름다운 눈을 지닌 소녀는 몸을 돌려서는 혼자 백합 세 송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옆에 서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의 떨리는 손 옆에 그녀의 손이 있었다. 이윽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었다.
10~11면, 「백합 세 송이」
시신을 담은 관이 장례 행렬보다 먼저 우예스트 문 앞에 도착했다. 사제들이 뒤돌아서자 재무국 직원들은 천천히 관대를 땅에 내려놓았고, 곧 성수를 뿌리는 예식이 시작되었다. 마부들이 마차에서 이동식 밑판을 빼내자 재무국 직원들은 관을 그 위에 얹기 위해 들어올렸다. 바로 그때, 일이 벌어졌다! 관의 한쪽을 너무 높이 들어 올렸는지 아니면 양쪽 다 잘못 들어 올렸는지 관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리더니, 관 뚜껑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온 것이다. 시신은 관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지만 아래로 쑥 내려가는 바람에 무릎이 굽혀졌고, 오른쪽 손이 관 밖으로 삐져나왔다.
경악한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옆 사람 호주머니에 있는 시계의 째깍거림이 들릴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시선은 죽은 셰펠러 의원의 굳어진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런데, 그때 하필 관 옆에 서 있었던 것이 바로 헤리베르트 선생이었다. 선생은 산책을 마치고 우예스트 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군중을 헤치며 이동하던 중 어쩌다보니 사제들 뒤에 멈춰 서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회색 외투 차림의 헤리베르트 선생이 검은 수의를 입은 시신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헤리베르트 선생은 내키지 않다는 듯 관 밖으로 덜렁거리는 시신의 오른팔을 집어 들었다. 아마도 관 속에 다시 집어넣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팔을 잠시 붙든 채 그것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초조하게 더듬으며 시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시신의 오른쪽 눈꺼풀을 열었다.
“저 사람 지금 뭐하는 거야?” 오스트로흐라드스키가 소리를 질렀다. “다들 시신을 관에다 집어넣지 않고 뭐하는 거야? 여기서 마냥 서 있을 작정이야?”
젊은 재무국 직원들 몇 명이 움직이려는 동작을 취했다.
“잠깐!” 몸집이 작은 헤리베르트 선생이 의외로 풍부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사람은 죽은 게 아니야!”
19~21면, 「훼방 선생」
당시 상황을 말씀드리자면, 프라하에 살다가 지방으로 떠난 사람이 20년 만에 다시 프라하로 돌아온다고 해도 스트라호프 문을 통과하여 스포렌 거리로 들어서면 옛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길모퉁이의 상점, 변함없는 간판의 빵집, 똑같은 잡화점 주인을 발견하게 되는 시절이었다. 모든 것들에 고유한 자리가 정해져 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를테면, 잡화점이 있던 공간에 난데없이 밀가루 가게를 여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이 터무니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가게들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대대손손 이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행여 가게가 프라하 또는 타지방 출신의 외부인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그가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여 새로운 무언가로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동네 토박이들은 그를 그럭저럭 참아 주고는 했다. 하지만 보렐 씨는 생면부지의 외부인이었을 뿐 아니라, 가게 따위는 전혀 없었던 초록 천사 건물에 가게를 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보렐 씨는 원래 주거용이었던 1층 가게의 길가 쪽 벽을 허물어 버리기까지 했다!
87~88면, 「보렐 씨가 해포석 파이프를 길들인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