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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아시아사 > 동아시아/극동아시아사
· ISBN : 9788994606460
· 쪽수 : 544쪽
· 출판일 : 2017-06-15
책 소개
목차
머리말
도입_동아시아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_ 미야지마 히로시
1. 보편으로서 서구 근대 패러다임을 넘어
2. 분과 학문체계의 극복
1부_ 정치와 사회
1장_ 백성이 호소하고 국왕이 들어주다 -‘근세’ 동아시아의 정치문화와 직소 _ 배항섭
1. 직소-인정仁政이 수반하는 ‘뜨거운 감자’
2. 조선의 직소
3. 중국의 직소
4. 일본의 직소
5. 직소를 통해 본 동아시아 정치문화
2장_ 19세기 전반 일본에서 군주 친정의 대두 -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경우 _ 박훈
1. 도쿠가와 정치체제에서 군주의 위치
2.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친정
3. 다이묘의 지방역인 접촉
4. 다이묘의 순행: 나리아키의 영민 접촉
5. ‘명군名君’ 나리아키 친정의 역사적 의미
6. 군사지휘관에서 군주로
3장_ 조선 후기 부계가족, 친족 확산을 보는 관점 _ 권내현
1. 제도와 관행
2. 성리학과 다른 요인
3. 지역과 계층
4. 19세기 사회와 부계 가족·친족
4장_ 19세기 공노비 후손들의 삶-제주도 대정현의 사례 _ 김건태
1. 해방에서 그 100년 후까지
2. 18세기 공노비
3. 19세기 공노비 후손들의 직역
4. 20세기 공노비 후손들의 토지 소유
5. 떼지 못한 딱지
2부_ 문화와 사상
5장_ 18세기 후반~19세기 조선의 언어와 문자 의식에 대한 시론 _ 이경구
1. 언어와 문자, 장기변화의 시금석
2. 훈민정음의 다양한 속성
3. 18세기 후반의 언어의식과 『을병연행록』
4. 19세기 전반기의 언어의식
5. 1883년 『이언易言』의 언해
6. 언어와 문자가 보여주는 조선의 변화
6장_ 연암그룹 지식인들의 천天 인식 _ 조성산
1. 연암그룹 사유에 대한 이해와 천天 인식의 중요성
2. 소옹邵雍의 기수론적氣數論的 천관天觀과 천주교의 주재적 인격천 비판
3. 자연천 인식의 면모와 이理의 개방성 주장
4. 인격천人格天의 가능성과 인과보응론因果報應論의 전개
5. 천 인식의 개방성: 자연천과 인격천의 절충
7장_ 19세기 지식장의 변동과 문명의식-홍한주, 이규경, 최한기를 중심으로 _ 김선희
1. 19세기를 바라보는 시선
2. 19세기 지식장의 변화
3. 홍한주, 지적 공간의 중첩
4. 이규경, 지식의 복원
5. 최한기, 보편 문명의 구상
6. 유학의 확장 가능성
8장_ 근대 계몽기 신문과 추리소설 - 『신단공안神斷公案』을 중심으로 _ 박소현
1. 추리소설과 근대문학
2. 공안과 추리소설의 사이: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신단공안』
3. 『신단공안』의 세계: 욕망과 감시의 권력
4.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본 『신단공안』
9장_ 18, 19세기 농서에 나타난 경험적 지식의 의미 변화와 분화 _ 안승택
1. 현장 대 실험실이라는 대립구도
2. 경험적 지식의 정당성에 대한 이해의 분화
3. 경험 및 개혁의 주체에 대한 이해의 분화
4. 대립하는 두 농업론에서 현장의 문제
3부_ 재정정책
10장_ 18, 19세기 납세조직의 활동과 지방재정 운영 _ 손병규
1. 중앙과 지방이 만나는 곳, 면리面里
2. 지방경비의 할당과 동계洞契 활동
3. 지방재정의 역할과 위상
4. 지방재정 개혁의 방향과 현실
5. 조선 왕조 지방재정의 향방
11장_ 다산 정약용의 수령 진휼론에 나타난 주자진법朱子賑法의 적용과 그 당대적 변용 - 『목민심서』 진황조의 분석 _ 송양섭
1. 『목민심서』와 정약용의 진휼론을 바라보는 눈
2. 수령의 진자확보책과 권분勸分
3. 진장의 운영과 주자진법의 적용
4. 정약용의 진휼론 : 『주례』적 이상의 추구, 순속順俗과 주자朱子의 만남
12장_ 재정사財政史의 각도에서 다시 보는 한중 관계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재검토 _ 문명기
1. 조선 정부는 왜 「장정」을 체결하려 했는가?
2. 「장정」의 체결과 어윤중의 역할
3. 대외무역과 정부재정
4. 주관적 의도와 객관적 실태의 괴리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속에서
양반들의 전반적인 영세화는 부계의 족결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속에서 딸들은 제외되고 장자는 우대받았으나 차자들까지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제사와 상속에서 딸들이 배제된 뒤 적장자는 차중자와 함께 윤회 봉사를 하기도 하였으나 제사의 책임이 점차 적장자에게 귀속됨에 따라 상속 분량이 차중자들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차중자들을 딸과 마찬가지로 상속에서 제외할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관직 진출과 경제력 확보가 용이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몰락을 가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대다수 양반은 자신들의 동성촌락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학문에서 다소 멀어지더라도 농업 경영에 적극 참여할 뿐 다른 방식으로 부를 창출하지도, 그럴 기회를 잡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양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의례의 준수는 그들의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중으로 대표되는 부계 혈연집단은 양반들에게 안전판 구실을 하였다. 차중자들에게 최소한의 상속을 보장하고 장자와 종손 중심으로 문중 구성원들을 결속해 친족들의 몰락을 일정하게 제어해나갔던 것이다.
장자는 상속에서 우대받았으나 제례를 책임져야 했고 인근에 거주했던 형제들의 경제적 위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또한 부계 친족들이 운영하던 족계族契는 구성원들을 직접적으로 구휼하는 기능을 했고, 문중 전답의 경작에서도 가난한 친족들은 배려를 받았다. 그럼에도 구성원 의 일부는 경제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고, 19세기 부세 운영의 강화 혹은 수탈의 확대는 문중이 만들어놓은 안전판을 넘어서는 위협이 되었다. 단성, 진주를 비롯하여 농민항쟁에 양반 사족들이 적극 참여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