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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아시아사 > 동아시아/극동아시아사
· ISBN : 9788994606583
· 쪽수 : 408쪽
· 출판일 : 2020-02-21
책 소개
목차
머리말_ 비교와 연동, 동아시아사의 새로운 발견
1부_ 비교: 국가·사회를 둘러싼 생각들
1장_ 19세기 동아시아 민중운동과 폭력
-정당성의 사상적 기반에 대한 비교를 중심으로 _배항섭
1. 민중반란의 시대-동아시아의 19세기
2. 19세기 동아시아 민중운동과 인명살상
3. 인명살상의 강도와 민중운동의 정당성 기반
4. 민중운동 및 폭력의 강도와 정치문화
2장_ ‘중화’ 해체의 두 가지 길
-홍대용과 스기타 겐파쿠 비교 연구 _이경구·이예안
1. ‘중화’를 다시 묻다
2. 사상적 배경
3. 화이의 전복 가능성
4. 성인과 중화의 통념 허물기
5. 두 가지 길의 외연: 보편적 이념 또는 개체적 실증
3장_ 류큐왕국과 조선왕조 족보의 비교 연구 _손병규
1. 족보의 신분제적 성격
2. 류큐 가보의 형태
3. 류큐 사족의 가계 계승
4. 정부의 계보 파악과 민의 대응
5. 족보 비교?분석을 통한 사회문화사 연구
2부_ 비교와 연동: 경제·사회의 구성과 운용
4장_ 17~18세기 조선의 화폐 유통과 은 _권내현
1. 은의 이동
2. 화폐로서 은
3. 동전 주조와 가치 척도
4. 은의 국적 논란과 은화의 가능성
5. 은의 기능 변화
5장_ 동아시아 근세 시장구조와 농촌공업
?청대 강남지역과 에도시대의 비교를 중심으로 _홍성화
1. 근세의 시장 네트워크
2. 16~18세기 중국의 시장구조
3. 거울로서 에도시대 시장구조
4. 서로 다른 농촌 수공업
5. 서로 다른 경제성장
6장_ 보갑의 동아시아
-20세기 전반 대만·만주국·중국의 기층 행정조직 재편과 그 의미 _문명기
1. 제도 천이의 다양한 면모
2. 원형: 청대 보갑제의 개관
3. 혁신: 대만총독부의 보갑제 재편과 정착
4. 역수입: 만주국의 보갑제 도입과 ‘절반의 성공’
5. 부활: 남경국민정부의 보갑제 재건과 좌절
6. 대만 보갑제: 중국적 명칭과 일본적 내실의 혼혈아
3부_ 연동과 교류: 사유와 문화
7장_ 연암그룹의 이적 논의와 『춘추』 _조성산
1. 연암그룹의 『춘추』 이해에 대한 두 가지 시선
2. 『춘추』의 두 가지 이적관
3. 명대 이후 문화적 화이론의 ‘자천이시지’ 논의
4. 연암그룹의 이적관과 『공양전』의 연계성
5. 연암그룹 이적관의 사상적 계보
8장_ 19세기 조선에 수용된 중국의 역사적 인물 도상 _고연희
1. 역사와 기억
2. 수입서적의 다층적 인물상
3. 보고 싶은 역사적 인물
4. 역사적 인물의 도상화
5. 역사의 허구화 문제
9장_ 동아시아 공덕·사덕 담론과 근대 주체 기획 _이행훈
1. 전통적 공사 관념과 덕의 분리
2. 메이지 일본의 공덕 양성 운동
3. 『신민설』의 공덕·사덕 담론
4. 공덕의 결핍, 미완의 국가
5. 도덕의 변용과 주체 기획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책속에서
이 글에서는 질문을 다르게 설정해보았다. 가장 문제적인 화이관 해체를 시도한 이들을 선정하고 그 결론에 도달한 과정을 역추적해보았다. 홍대용과 아사미처럼 ‘사유의 출발지가 같았으나 결론이 달랐던 것’과는 반대로, ‘출발지는 다른데 결론은 비슷해진’ 과정을 되짚어보는 방식이다. 이것은 유학적 인식과 영향을 조금 거두어내고 새 지식의 수용과 기성 지식의 균열이라는 과정 자체에 좀 더 초점을 맞춰보자는 의도이다.
이 글에서는 화이관에 관해 조선과 일본에서 가장 문제가 된 저술로 각 각 홍대용의 「의산문답」과 스기타의 『광의지언狂醫之言』을 선택하였다. 두 저술은 동시대 화이관을 해체하는 최고의 문제작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분, 학문 그리고 저술에 이르게 된 과정은 매우 달랐다. 홍대용은 사대부로서 주자학에 정통했고, 중국을 견문하고 한역된 서학서를 보며 세계관을 넓혔으며, 철학적 사유를 제련하여 중화를 비판했다. 한편 스기타는 난방의蘭方醫로서 네덜란드 의학 원서를 번역하면서 지식을 습득했으며, 체험과 실증 위주인 의학 특히 해부학을 통해 중화 지식의 허구성을 체험했다. 습득한 지식의 내용도 학문 방법도 상당히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은 화이 인식에 근원적인 의심을 품었고 급진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막상 비교를 진행해보니 두 사람의 개성과 몇몇 행적이 묘하게 닮아 있어서 흥미로웠다. 둘은 모두 호기심이 강했으며 새 지식에 개방적이었다. 전문 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보수적 인사들과 거침없이 논쟁을 벌였고, 터부를 깨고자 하는 노력도 같았으며, 논쟁한 결과 「의산문답」과 『광의지언』이라는 문제작을 남긴 것도 공통점이었다. 두 사람의 저술이 당대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19세기 후반 이후에 주목되어 실학, 과학, 서 양학 등의 강조에 활용된 점도 유사하다.
19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동아시아 삼국, 곧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민중운동이 빈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