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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일제치하/항일시대
· ISBN : 9788997581788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15-08-15
책 소개
목차
목차
프롤로그 | 김장순의 시로 못 다한 이야기
1부 일본 탈출기
나는 첫 번째 귀국자였다 / 꿈에 그리던 면 서기가 되었으나 / 임명장 대신 날아온 영장 / ‘인촌’의 아들이 내 자리에 / 송별식 / 부산으로 / 시모노세키에서 대판으로 / 전쟁 막바지의 대판 풍경 / 부끄러운 피지배자의 모습 / 일본인보다 더 악랄한 조선인 지도원 / 채소 찌꺼기를 주워 먹는 동포들 / 밀감 장사로 큰돈을 벌었지만 / 폭격의 공포도 점점 무뎌지고 / 일은 고되지 않았으나 / 도박꾼들 / 자신의 딸을 주겠다던 일본인 조장 / 공습으로 불타는 대판 / 공습으로 폐허가 된 대판 / 진짜 환자, 가짜 환자 / 탈출 준비 / 일본인들에게 받은 인상 / 노가다 판으로 / 기총소사에 넋을 잃고 / 일본에서 한 재산 마련한 밥집 주인 / 노가다 판을 떠나 시모노세키로 / 동포에게 맛본 지옥 체험 / 꿀맛보다 달콤했던 상한 밥 한 그릇 / 고마운 경상도 아저씨 / 표류하는 배에서 사경을 헤매다 / 섬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다 / 풍랑이 잦아들자 도원경이 찾아들고 / 보고파 몸부림치고 목메어 울던 고향 땅으로 / 후기
2부 내 고향 줄포
줄포의 전성기와 폐항 / 일제 강점기 일본인 분포 상황 / 일본인 호적 / 중국인 분포 상황 / 일제 강점기 관공서·각종 기관(단체)·학교 / 일제 강점기 줄포의 유흥업소 / 줄포의 민속과 풍습 / 내 고장 인물들 / 맺는말
3부 줄포 아리랑
진정서에 얽힌 사연 / 미영골 양반 / 신언서판 / 일모작 모내기 철을 보내고
에필로그 | 착한 사람이 아니고는 농사짓덜 못 해요
책속에서
내 고향 줄포면에서 나는 첫 번째 귀국자였다
1945년 8월 10일 밤에 시모노세키를 출발혔어. 낮에는 미군의 공습 땜시 섬에 숨고, 풍랑이 잔잔한 밤에만 살살 움직였지. 열흘 만인 8월 20일 10시,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부산에 도착혔어. 그렁게 해방된 이후에 도착한 셈이지. 근디 이상허드라고. 해방되었다는디도 일본군이 무장한 채 경비를 서고 있어서 그런지, 해방의 벅찬 감격이나 기쁨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드랑게. 당시 부산 역 주변은 일본군이 없어서 그런지, 배설물이 가득혔어. 다들 서로 타겠다고 덤벼드는디 정말 아수라장이었지. 겨우 비집고 올라타, 대전 역에서 호남선으로 갈아타고, 21일 오후 늦게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지. 뜻밖의 악몽으로 시작된 일본 징용이 이렇게 10개월로 끝을 맺었지. 난 그래도 천운이 따랐능가벼, 고향에 돌아와 가정을 이루고 살 수 있었응게 말이여. 그래서 일본 징용 체험을 자식들에게나 전할라고 ‘일본 탈출기’라는 제목의 수기로 써 보았지. 근디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출판사에서 책으로 내자며 우리집을 찾아오기도 혔어. 잘되나 싶더니 그냥 유야무야되어 버리더라고. 처음엔 좀 아쉬웠는디,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혔어. 왜냐하면 일본에 징용 가게 된 게 우리나라 굴지의 대재벌가의 음모 때문이라고 떠들면, 서슬이 시퍼런 그 권력이 혹여 내 자식들을 핍박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영 찜찜혔거든. 그려도 이젠 이야기혀도 되겄지. 내가 인자 산 사람도 아닝게. 이미 저승에 와 있는 사람이 그간의 아픈 속사정을 말헌들, 귀신의 넋두리를 누가 탓할 수 있겄능가.
- ‘프롤로그’ 중에서
일본 탈출기 후기
부둣가 도로 양편에 즐비하게 늘어앉은 여인들의 모습. 판자를 댄 평상에 더러는 땅바닥에 가마니 떼기를 깔고, 김밥이며 갖가지 떡과 과일 등속을 수북이 쌓아 놓고 서로 손을 까불며 손님 부르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값도 싸다. 이십 전어치 먹을거리를 한 번에 먹기가 벅차다. 일행 셋이서 이것저것 잔뜩 사서 나무 그늘에서 먹어 치우고 남은 건 보따리에 쑤셔 넣고서 땀을 씻었다. 부산 중심가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이 정렬하여 철통같은 경비를 하고, 파출소에는 일본인 순사가 떡 버티고 앉아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의 얼굴 모습에서 조국 해방의 벅찬 감격이나 희열 같은 걸 도무지 느낄 수가 없다.
‘해방 만세’니 뭐니 하는 초라한 벽보가 더러 눈에 띌 뿐이고, 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거리마다 먹을거리를 파는 잡상인 여인네들이 떼 지어 있는 광경만이 조금 예외적인 모습이었다. 비록 일본군이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무표정, 무관심일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 역 광장 한쪽 구석은 온통 사람의 배설물로 뒤덮이고, 변소마다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다. 소변기나 변소 바닥과 주위 할 것 없이 한결같이 배설물 더미다. 해방된 지 불과 6일 사이에 이렇게도 급변했단 말인가? 배설물의 주인공은 누구냐? 우리 조선인이다.
“조선인은 똥오줌 가릴 줄 모르는 미개인이다.” 이 말은 이 땅에 상륙한 미군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건국 후 본국에 돌아간 어느 외신 기자는 “한국은 도둑놈의 나라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주한 영국 대리공사 ‘아담스’는 1950년 10월 8일 자로 본국에 띄운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상 한국인들은 가장 도둑질을 잘하고 구걸을 잘하는 사람들이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지성, 관습, 능력, 근면성에 대해 매우 낮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들에게 어느 때쯤 자치 능력이 생길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같은 해 12월 5일 자에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승만이나 그의 정부 각료들이 좋은 자들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비판은 비단 한국정부뿐만이 아닌 한국인 전부에게 해당된다. 간혹 좋은 사람이 있기는 하나 그 수는 너무나도 적다. 이것은 일본의 보호 조치와 미국의 응석받이 보호가 한국인을 현재와 같이 타락시켜 놓았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나라의 밝은 장래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적어도 자율적이라든가, 미국의 보호하에선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과연 누가 이들을 지도해야 하는가?”
‘아담스’는 영국 의회와 합세하여 이렇게도 떠들어 댔다고 한다.
“한국의 이승만은 정신 이상 증세가 있는 자라고 한다. 일본 치하의 한국인들은 모두 막노동꾼뿐이었으므로 영국 정부는 훈련된 행정 관리를 한국에 파견하여 통치토록 하라.”
이 얼마나 모욕적인 언사이며, 우리를 분노케 하는가.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전혀 반성할 점이 없는지 자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산 역에는 조선인 직원 몇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질서고 뭐고 있을 수 없는, 문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매표나 검표도 없는 무임승차인데, 차 시간표도 없이 불규칙적으로 열차를 운행하여 몇 시간 만에 열차가 들어서면 서로 밀치고 떠밀고 아수라장을 벌여 노약자는 아예 승차를 포기해야만 했다. 만약에 한 사람이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줄줄이 넘어지고 밟히고 해서 대형 압사 사고가 터질 게 틀림없었다.
아슬아슬 곡예하듯 해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 속에 어렵사리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 안은 사람으로 꽉 차서 터질 듯,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었다. 악다구니를 치며 떠들어 대는 속에서 땀으로 목욕을 하며, 꼬박 열흘을 넘긴 극적인 일본 탈출의 피로를 이겨 내며 대전 역에 닿았을 때엔 이미 밤이 깊었다.
대전 역 주변의 이름 모를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일찍 대전 역으로 나가 정읍행 호남선 열차를 기다렸다. 이곳 대전 역도 부산 역과 다를 것이 없었다. 배설물 전시장이요, 매표나 검표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8월 21일 오후 늦게 비로소 고향 줄포 땅에 섰다.
이 글은 내가 58세 때인 1979년에 썼던 것을 다시 1987년에 정리한 것인데, ‘일본 탈출기’란 제목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열 달에 불과한 일본에서의 고생이 그리 대단할 것도 없고, 나보다 수백 배 더 심한 고초와 괴로움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똑같은 태양, 꼭 같은 달과 별 아래서 꿈길에도 고국을 그리며 눈물짓는 사할린 억류 동포의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에 어찌 비할 수 있으랴!
보통학교(초등학교) 동기 동창 김기성은 학교 앞 도로에 일렬로 학생들, 기관장, 유지들이 가득 모인 가운데, “오오기미니 메사레 따루……(천황에게 부름을 받아).” 군가를 제창하는 환송회에서 국민복 차림에 전투모를 쓰고 늠름한 자세로 소위 성전聖戰에 나서던 그날이 마지막이 되었다. 어느 땅 어느 곳에서 무덤도 없이 외로운 영혼으로 떠도는지……. 징병, 학도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 가 개죽음이 되어 그 이름조차 잊힌 우리 조선인이 그 얼마일꼬…….
‘일본 탈출기’ 운운 한다는 것이 송구할 뿐이다. 그저 나라 잃은 시절에 한 가난한 사람이 겪은 이런 일도 있었다는, 하찮은 수기의 한 토막쯤으로, 나 스스로 여기는 것이다.
1987년 7월 7일, 촌 늙은이가(당년 6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