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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필사 : 역사 속 시조 101수로 깨우치는 일곱 자 단문의 묘

고전의 필사 : 역사 속 시조 101수로 깨우치는 일곱 자 단문의 묘

(소리 내어 읽고 쓰는 우리 시조 101선)

정도전, 정몽주, 이방원, 조광조, 성삼문, 박팽년, 김굉필, 윤선도, 유응부, 남구만 (지은이)
  |  
소와다리
2014-11-10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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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필사 : 역사 속 시조 101수로 깨우치는 일곱 자 단문의 묘

책 정보

· 제목 : 고전의 필사 : 역사 속 시조 101수로 깨우치는 일곱 자 단문의 묘 (소리 내어 읽고 쓰는 우리 시조 101선)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책읽기/글쓰기 > 글쓰기
· ISBN : 9788998046392
· 쪽수 : 224쪽

책 소개

고전을 통째로 필사하는 것은 작법을 깨우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 책에는 3장 12구의 형식이 온전하고 내용이 명료한 시조 중에서도 역사적의로 의미가 있는 101수를 우선 가려 실었다.

목차

제1장 : 풍류의 장 마흔아홉 수
재 너머 성권농 집의 - 정철
말 업슨 청산이요 - 성혼
대쵸 볼 불근 골에 - 황희
자내 집의 술 익거든 - 김육
달이 두렷하여 - 이덕형
집방석 내지 마라 - 한호
매암이 맵다 울고 - 이정신
추강에 밤이 드니 - 월산대군
나뷔야 청산 가쟈 - 작자 미상
산촌에 눈이 오니 - 신흠
두류산 양단수를 - 조식
거문고 타쟈 하니 - 작자 미상
십 년을 경영하야 - 송순
떳떳 상 평할 평 - 작자 미상
빈천을 팔랴 하고 - 조찬한
백일은 서산의 지고 - 최충
비 오난대 들희 가랴 - 윤선도
동창이 발갓느냐 - 남구만
댁들에 동난지이 사오 - 작자 미상
삿갓셰 되롱의 닙고 - 김굉필
강호사시가(연시조 네 수) - 맹사성
오우가(연시조 여섯 수) - 윤선도
개를 여라믄이나 기르되 - 작자 미상
청산리 벽계수야 - 황진이
내 언제 무신하야 - 황진이
산은 옛 산이로되 - 황진이
청초 우거진 골에 - 임제
공산에 우난 접동 - 박효관
이화에 월백하고 - 이조년
길 우희 두 돌부텨 - 정철
바람도 쉬여 남난 고개 - 작자 미상
한 손에 막대 잡고 - 우탁
춘산에 눈 노긴 바람 - 우탁
훈민가(연시조 네 수) - 정철
반중 조홍감이 - 박인로
태산이 놉다 하되 - 양사언
잘 가노라 닷지 말며 - 김천택
내해 됴타 하고 - 변계량

제2장 : 충신의 장 스물일곱 수
구룸이 무심탄 말이 - 이존오
이 몸이 주거 가셔 - 성삼문
수양산 바라보며 - 성삼문
가마괴 눈비 마자 - 박팽년
금생여수라 한들 - 박팽년
천만 리 머나먼 길에 - 왕방연
방 안에 혓난 촉불 - 이개
이런들 엇더하며 - 이방원
이 몸이 주거 주거 - 정몽주
가마괴 싸호는 골에 - 영천 이씨
이시렴 브디 갈따 - 성종
오면 가랴 하고 - 선조
쓴 나믈 데온 물이 - 정철
삼동에 뵈옷 닙고 - 조식
올해 댜른 다리 - 김구
삭풍은 나모 긋테 불고 - 김종서
장백산에 기를 꼿고 - 김종서
장검을 빠혀 들고 - 남이
적토마 살디게 먹여 - 남이
십 년을 가온 칼이 - 이순신
한산셤 달 발근 밤의 - 이순신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 최영
국화야 너난 어이 - 이정보
어리고 성긴 가지 - 안민영
바람에 휘엿노라 - 인평대군
눈 마자 휘여진 대를 - 원천석
구즌 비 개단 말가 - 윤선도

제3장 : 탄식의 장 스물다섯 수
굼벙이 매암이 되야 - 작자 미상
싸움애 시비만 하고 - 이덕일
옥을 돌이라 하니 - 홍섬
검으면 희다 하고 - 김수장
냇가에 해오라비 - 신흠
노래 삼긴 사람 - 신흠
져 건너 일편석이 - 조광조
노푸나 노픈 남게 - 이양원
철령 노픈 봉을 - 이항복
곳치 딘다 하고 - 송순
엊그제 버힌 솔이 - 김인후
간밤의 부던 바람에 - 유응부
풍파에 놀란 사공 - 장만
나모도 병이 드니 - 정철
가마괴 검다 하고 - 이직
백설이 자자진 골에 - 이색
오백 년 도읍지를 - 길재
선인교 나린 물이 - 정도전
흥망이 유수하니 - 원천석
청강에 비 듯는 소리 - 봉림대군
청석령 디나거냐 - 봉림대군
내라 그리거니 - 인조
풍셜 석거 친 날에 - 이정환
이별하든 날애 - 홍서봉
가노라 삼각산아 - 김상헌

저자소개

윤선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시대에 활동했던 문인이자, 시조 작가다.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字)는 약이(約而)이며, 호(號)는 고산(孤山) 혹은 해옹(海翁)이다. 1612년 26세의 나이로 진사(進仕)에 급제했고,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1616년 당시의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병진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유배지에서 <견회요>와 <우후요> 등의 시조를 창작했다. 1618년 유배지가 경상도 기장으로 옮겨졌다가, 인조반정(1623) 직후 대사면령이 내려 유배에서 풀려 전라도 해남으로 돌아갔다. 남인(南人)에 속했던 윤선도는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부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유배를 떠나는 등 시련을 겪었던 것이다. 42세(1628)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장원 급제를 해, 당시 이조판서이던 장유(張維)의 천거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47세 때인 1633년에 다시 증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예조정랑에 임명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해남에서 생활하던 무렵, ‘병자호란’(1636)이 발발하자 향족(鄕族)과 집안의 노복(奴僕)들을 이끌고 배에 태워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도 인근에서 강화도와 남한산성이 이미 적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하던 중, 태풍을 피해 잠시 머물던 곳이 바로 보길도였다. 이후 윤선도는 자연 풍광이 수려한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다. 52세 때인 1638년에는 병자호란 당시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임금을 알현하지 않았다(不奔問)’는 혐의로 탄핵을 받고,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게 된다. 이후 해남에 돌아와 집안의 대소사를 차남에게 맡겼으며, 1640년부터 해남의 금쇄동에 거처를 마련해 은거했다. 이후 10여 년간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보길도와 금쇄동을 오가며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의 나이 56세 때인 1642년에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연작 18수의 시조 작품을 창작했으며, 2년 후에는 <산중속신곡> 2수와 <증반금> 등의 시조를 짓기도 했다. 윤선도가 63세 되던 1649년 인조(仁祖)가 승하하고, 세자로 있던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즉위했다. 윤선도는 효종의 대군 시절 사부를 지낸 바 있었기에, 이해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요체를 논한 <기축소(己丑疏)>를 올렸다. 1651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보길도의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다. 66세가 되던 1652년에는 왕의 특명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탄핵을 받고 사직했다. 이때 경기도 양주의 고산에 있는 별장에 머물면서 <몽천요> 3수를 창작했다. 하지만 이내 효종에 의해 다시 관직이 제수되어 조정에 나아갔고, 당시 권신인 원두표(元斗杓)의 비리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당해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7년(71세)에는 조정에 불려 갔다가 다시 관직에 제수되었고,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해 왕릉을 정하는 산릉의 간심(看審)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인을 대표한 논객으로 예송(禮訟)에 참여했다가 패배해, 당시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에 의해 1650년 함경도 삼수에 유배되었다. 1665년(79세)에는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가 옮겨져 백운산 아래의 옥룡동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2년 후인 1667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에 있는 거처 낙서재(樂書齋)에서 운명해, 해남의 금쇄동에 묻혔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충헌(忠憲)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윤선도의 삶은 한마디로 파란만장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사부로 있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효종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비교적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애의 절반 이상을 관직보다는 유배지 은거지에서 지내야만 했으며, 반대 당파의 비방에 결연하게 맞서며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사(經史)에 해박했으며, 의약과 복서 및 지리 등에도 널리 통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6권 6책)가 있다. <어부사시사>·<오우가> 등 75수의 시조를 남겼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작품들로 인해 ‘자연미의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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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지은이)    정보 더보기
고려 충혜왕 복위 3년에 3남 1녀 가운데 첫째로 태어났다. 상경한 뒤로 이색(李穡)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해 공민왕 11년(1362)에 급제해 하급 관리를 지내다가 공민왕 15년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공민왕 19년에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어 이색·정몽주·이숭인·이존오 등과 성리학을 강론했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한 이후 신진 학자들에게 시련이 닥쳐와 친원(親元) 정책에 반대했던 탓에 나주 근처로 유배되었다. 풀려나와 고향에서 4년간 지내고 삼각산 집으로 와서 살다가 권신들의 외압에 부평·김포 등지로 이사하는 등 굴욕과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그 뒤 우왕 9년에 함주로 가서 이성계를 만난 뒤로 왕조 건국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하게 되고,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밀직부사를 맡아 전제(田制) 개혁부터 단행했다. 그리고 1392년 조선왕조가 창건되면서 1등 공신으로 책봉되고 새로운 왕조의 요직을 장악했다. 새로운 도읍지 결정과 경복궁 창건, 군제(軍制) 개혁과 병법 개혁 등 새로운 왕조를 위해 수많은 업적과 공적을 쌓았다. ≪조선경국전≫, ≪감사요약≫,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 ≪불씨잡변≫ 등을 지었으며, 태조의 창업을 기리는 <문덕곡>, <몽금척> 등의 노래도 지었다.그리하여 당시 정도전의 권세는 왕이나 왕족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항상 이방원과 대립했다. 결국 태조 7년에 일어난 무인의 난에 역적의 누명을 쓰고 이방원의 칼날 아래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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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 (지은이)    정보 더보기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호는 약천(藥泉) · 미재(美齋), 자는 운로(雲路),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약천은 붕당정치의 전성기였던 효종, 현종, 숙종에 걸친 삼조의 대신으로 정치, 경제, 군사, 의례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친 경세가이자 문장가다. 약천은 인조 7년(1629) 12월 3일 충청도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약천은 어려서는 외증조모인 이씨 부인(李氏夫人)에게 글을 배우다가 부친에게 가학을 전수받고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우기도 했다. 약천은 18세에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온 후 내외종으로 근친이었던 김익희(金益熙)에게 의탁했는데, 김익희는 김장생(金長生)의 손자로 효종(孝宗)과 송시열(宋時烈)의 총애를 받아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1651년 7월 식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 때(1656) 별시 문과 을과에 합격해 가주서로 선발된 뒤 특지(特旨)로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이후 청요직(淸要職)으로 순조롭게 진출했다. 다음 해 사서, 정언, 문학 등에 제수되어 경연에 참가했다가 당시 유림의 종장(宗長)이었던 송준길(宋浚吉)의 인정을 받고 문인(門人)이 되었다. 30세에 춘당대(春塘臺)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고 병조 정랑, 비변사 낭청이 되었으며, 임금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상(喪)에 친림(親臨)하는 것을 간언해 막았다. 31세에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부수찬, 부교리가 되었으며, 7월 빈전(殯殿)에 서계(書啓)를 올렸다. 이해 12월 이조 정랑이 되었고, 이후 34세까지 헌납, 경상도 진휼어사, 교리, 응교, 집의 등을 역임했다. 36세에 동부승지, 예조 참의, 대사성, 대사간이 되었으며, 37세에 부친상을 당해 39세에 복을 마친 뒤 형조 참의, 공조 참의, 병조 참의에 제수되며, 40세에 전라 감사, 우승지가 되었다. 41세에 대사성으로서 학제(學制) 개편 등을 시도했으나 곧 체직되었다. 이에 광진(廣津) 아차산(峨嵯山) 근처 약수암(藥水巖)에 거처하며 ‘약천(藥泉)’이라 자호했다. 42세에 잠시 고향인 결성(結城)으로 내려갔다가 청주 목사가 되어 기민 구제 등에 힘썼는데, 후에 그 치적을 기려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43세부터 46세까지 4년 동안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북방 정책에 관여했는데, 특히 이 시기는 저자의 국방 사상과 역사관이 정립되는 시기로 이즈음의 저술을 주목할 만하다. 여연(閭延), 자성(慈城), 우예(虞芮), 무창(茂昌) 등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설치하고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의 도로를 개통해 서북 지방의 실질적인 방어책을 세우고 국경을 확정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주체적인 구토 회복(舊土回復) 의식과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46세에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 참판으로 동지경연, 비변사 진휼청 당상을 겸하고 이어서 형조 참판, 승문원 제조가 되었다. 3차 예송(禮訟)의 발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득세하자 결성으로 돌아온 뒤 고신(告身)을 빼앗기는 등 이후 몇 년간 시련을 겪었다. 50세(1678) 10월 형조 판서, 한성부 좌윤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다음 해 2월 남인의 영수인 윤휴(尹?)와 허견(許堅)을 탄핵하다가 거제(巨濟)로 유배되고 말았다. 52세 때(1680)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로 소명을 받고 이어서 부제학, 공조 참의, 동지의금부사, 양관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같은 해 모친상을 당해 복을 마치고 54세가 되던 해에 동지중추부사, 대사간, 병조 판서가 되고, 56세에 우의정, 57세에는 좌의정에 올랐다. 그즈음 서인들 사이에서는 훈척(勳戚)의 부정과 비리를 두고 젊은 사류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약천은 임술옥사(壬戌獄事)의 고변자인 김환(金煥)의 처벌 등에서 박세채(朴世采), 이상진(李尙眞)과 노선을 같이해 젊은 사류의 입장을 지지했는데, 특히 사림 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김환을 처벌하는 것만이 정국 수습의 방안이라고 주장해 김환을 옹호하는 송시열, 김익희 등의 노론과 대립했다. 또한 윤증(尹拯)의 유현(儒賢) 대우 및 복상(卜相)과 관련해서 김수항(金壽恒)과 대립하면서 46차례나 정사(呈辭)하는 등 갈등을 빚었으나 숙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59세(1687) 7월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1688년, 장희빈(張禧嬪)과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앞세운 남인들의 진출이 두드러지자, 약천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박세채를 두둔하며 동평군을 탄핵하다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되었다. 이후 삼사(三司)의 구원으로 방환되었다가 다음 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사사(賜死)되고 남인이 득세하자, 약천은 또다시 추궁을 받아 강릉(江陵)에 중도부처되고 생질이자 문인(門人)인 박태보(朴泰輔)가 장사(杖死)하는 비극을 맞았다. 62세(1690)에 방환되어 몇 년간 문생(門生)들과 유람과 강학으로 소일하는데, 당시 약천의 문인으로는 최석정(崔錫鼎), 최규서(崔奎瑞), 이상명(李尙命), 최석항(崔錫恒), 정제두(鄭齊斗) 등 당대의 명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이들은 후일 소론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해 학계와 정치계에서 활약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 왕후가 복위하면서 서인이 다시 득세하자 약천은 영의정으로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약천은 장희빈의 오라비인 장희재(張希載)의 주벌을 반대한 일로 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사직과 대명(待命), 영의정 제수가 반복되다가 결국 68세(1696) 이후 고향으로 내려가 다시는 관직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부역(賦役)의 균등을 꾀하고, 과거의 개혁책을 구상하고, 서북 지역의 방어를 위해 성경(盛京)의 지도를 올리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의 제시와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70세(1698)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치사를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장희재의 일로 다시 탄핵을 받아 74세(1702)에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가 방환되고, 79세(1707)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숙종 37년(1711) 약천이 83세의 나이로 졸하자 숙종은 애통의 교서를 내리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명했다. 소론 정권이 득세한 경종 2년(1722)에 약천은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고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다음 해인 1723년에 손자 남처관(南處寬)이 문집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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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337년(충숙왕 복위6)~1392년(공양왕4). 고려 말의 충신, 학자, 외교가로,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1360년(공민왕9)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보임된 뒤, 요직을 두루 거쳐 1390년 수상직인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명나라와 일본에 대한 외교 활동으로 큰 공을 세웠고, 내정으로는 유학을 진흥하고 시폐를 혁파하였다. 고려왕조가 끝날 때에 고려를 위하여 순국하였고,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만고의 충절과 이학의 조종으로 추앙받았다. 1401년(태종1) 영의정에 추증되고 1517년(중종12)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임고서원, 충렬서원 등에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 《포은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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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사상가, 성리학자.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29세의 나이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도왔다.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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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 전기의 문신.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반정이 일어나자 단종 복위를 꾀하며 대항하였으나 결국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의 대표적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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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관직은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된 여섯 신하, 즉 사육신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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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았고 벼슬이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조광조를 만나 학문을 전해주었다.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유배지에서 사형을 당했는데 죽는 순간까지 후학양성에 힘썼다. 향년 5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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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 (지은이)    정보 더보기
조선의 무신.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했고 학문도 뛰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이품에 달했으나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사육신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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