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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김장수 (지은이)
푸른사상
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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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유럽사 > 독일/오스트리아사
· ISBN : 9791130822105
· 쪽수 : 312쪽
· 출판일 : 2025-02-04

책 소개

김장수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의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가 푸른사상사 <서양근대사 총서6>으로 출간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계몽절대주의 체제의 근간을 도입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모로 추앙받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애와 3차에 걸친 왕위계승전쟁을 겪으며 행정, 재정, 외교 분야의 개혁을 추진한 정치적 업적을 살펴보았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카를 6세와 국사조칙
1.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2. 상호계승약관
3. 국사조칙

제2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장과 결혼
1. 마리아 테레지아의 탄생
2.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장
3.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4. 카를 6세와 프란츠 슈테판
5.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 출산과 양육
6.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 요제프

제3장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과 각국의 대응
2. 프리드리히 2세의 등극
3. 프리드리히 2세의 선제공격
4. 제1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5. 제2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6. 제3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조약
8. 상속전쟁 이후의 프로이센의 위상

제4장 계몽절대왕정체제 구축
1. 하우크비츠의 내정개혁
2. 다운 백작의 군제개혁
3. 스비텐의 교육개혁
4. 카우니츠-리트베르크의 외교정책
5. 쇤브룬 궁전의 증축

제5장 말년의 활동
1. 프란츠 1세의 서거
2. 프란츠 1세의 사생활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대응
3. 공동통치자 요제프 2세
4. 바이에른 상속전쟁과 모자간의 대립 심화
5. 의무교육제도의 도입
6. 생의 마지막 순간

■ 나가면서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저자소개

김장수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학부에서 석사 및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Die politische Tätigkeit F. Palackýs(팔라츠키의 정치활동)』 『Korea und der ‘Westen’ von 1860 bis 1900(1860년부터 1900년까지의 조선과 서방 세계)』 『Die Beziehungen Koreas zu den europäischen Großmächten, mit besonderer Berücksichtigung der Beziehungen zum Deutschen Reich(한국과 유럽 강대국들과의 관계, 특히 독일 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정치활동』 『독일의 대학생 활동 및 그 영향』 『서양의 제 혁명』 『비스마르크』 『중유럽 민족문제』(공저) 『유럽의 절대왕정시대』 『주제별로 들여다본 체코의 역사』 『주제별로 살펴본 서양 근대사』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슬라브 정치가들이 제시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 방안』 『후스로부터 시작된 종교적 격동기(1412~1648)』 『19세기 독일 통합과 제국의 탄생』 『메테르니히』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독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 2세』 『1848 독일혁명』 등이 있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와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를 다룬 많은 논문도 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이며 한국세계문화사학회(구한국서양문화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펼치기

책속에서

당시 독일권에서 오스트리아와 대립하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1726년과 1728년에 체결된 부스터하우젠 비밀조약과 베를린 조약에서 국사조칙을 인정했다. 이렇게 선왕이 두 번이나 인정한 국사조칙을 무시한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분쟁을 활용하여 풍요로운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려고 했고 1740년 11월 15일 오스트리아와 비밀협상을 통해 자신의 목적도 관철시키려고 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200년 전에 호엔촐레른 가문과 슐레지엔 지방을 통치했던 피아스텐(Piasten) 대공 사이에 체결된 결혼조약을 부각시키면서 슐레지엔 지방에 대한 프로이센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리고 1740년 11월 6일 프리드리히 2세는 카를 6세의 사망을 계기로 슐레지엔 지방을 차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자신의 행동이 매우 합당(billig)하다는 입장도 밝혔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국왕으로 등극한 이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즉 그는 남자 후계자 없이 카를6세가 사망할 경우 오스트리아 왕위계승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했고 실제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오스트리아 왕국의 일부 지방을 프로이센에 편입시키겠다는 구체적인 구상도 했다.


점차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책적 효율성을 갖춘 정부 및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정례적인 징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거기서 일반 조세제도의 도입도 강력히 추진했다. 귀족계층과 가톨릭교회의 교회령 및 성직자들은 더 이상 면제 대상이 아니었다. 일반 조세제도의 도입에 따라 귀족 및 성직자 계층은 그들 수입의 18.75%를 세금으로 납부해야만 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국가는 징집, 군대 무장 및 유지비를 부담하기로 했다. 이러한 세금 제도는 경제적으로 활성화된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시행되었다.
어릴 적부터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의 뜻을 따른다는 자세로 자신이 신으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보존하는 의무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신앙심이 돈독하던 여왕은 평소부터 로마 교황을 비롯해 빈의 대주교를 존중하며 미사나 성채배령 등의 가톨릭 의식에도 예를 다했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에는 수도원을 비롯하여 교회 관련 영지가 지나치게 많았다. 게다가 교회는 면세 대상이었기 때문에 국가권력인 징세권 행사는 불가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주도하던 국가개혁 역시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은 ‘교회의 면세특권’을 부각시키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안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톨릭 세력의 이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예수회의 활동을 제한하고 금전과 시간의 낭비에 불과한 성지순례도 중지시켰다. 아울러 교회 내부의 화려한 의식 역시 폐지시켰다. 이렇게 가톨릭교회의 면세특권이 폐지됨에 따라 당시 로마 교황청은 여왕의 개혁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던 계몽사상의 확대로 상황은 이미 그녀 편이었다.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운 백작이 무인으로서의 재능과 군사 부문에 대한 높은 식견도 가졌음을 인지했다. 따라서 그녀는 그에게 오스트리아군을 혁신하는 일체의 업무를 위임했다. 그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믿음은 그녀가 가장 신뢰하던 푹스-몰라드 백작부인의 딸을 그의 배우자로 주선하는 적극성을 보인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운 백작을 푹스-몰라드 백작부인의 딸과 결혼시켜 황제 부부 중심으로 구성된 소수 모임의 일원으로도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다운 백작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기대한 대로 군 전반에 대한 개혁 및 개편을 시행했다. 즉 그는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던 각 지방 단위의 징모와 군량 공출, 영주 자의에 따른 연대제를 폐지하고 각 영주의 병력을 통합하여 전국 규모의 오스트리아군을 발족시켰는데 그 수는 108,000명이었고 이 수는 하우크비츠가 제시한 것과도 일치했다. 여기서 다운 백작은 오스트리아군의 복무규정과 훈련세칙을 마련했고 그것에 따라 오스트리아군을 엄격히 통솔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참여하는 야영훈련도 매년 실시하여 강인한 군대를 구축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의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또한 다운 백작은 리히텐슈타인(Josef Wenzelv. Lichtenstein) 공작에게 포병대 운영을 맡겨 기존의 보조적 역할에서 벗어나 전투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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