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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사실주의 문학 단편소설 2집 (큰 글씨 특별판)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91137233065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21-01-18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전 한국소설
· ISBN : 9791137233065
· 쪽수 : 336쪽
· 출판일 : 2021-01-18
목차
사실주의 문학 단편소설 2집
[큰 글씨 특별판]
- 부제 :
한국 문학사조(文學思潮) 소설
목차
한국 자연주의 문학 단편소설
01. [현진건] 단편소설
새빨간 웃음
고향
02. [김유정] 단편소설
아내
03. [채만식] 단편소설
논 이야기
레디메이드 인생
04. [김남천] 단편소설
경영
05. [조명희] 단편소설
낙동강
06. [한설야] 단편소설
과도기
07. [최서해] 단편소설
홍염
저자소개
김남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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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평남 성천군에서 출생하여 1929년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도쿄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9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하였고, 1930년 카프 동경지부에 발행한 ≪무산자≫에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1년에 제적되었다. 1931년 귀국하여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을 주도하였으며, 김기진의 문학 대중화론을 비판하고, 볼셰비키적 대중화를 주장한 바 있다. 1931년에 제1차 카프 검거사건 때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가담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출옥 후에 감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 「물」(1933)을 발표하고 문학적 실천에서의 계급적 주체 문제를 놓고 임화와 논쟁을 벌였다. 1934년 제2차 카프 검거사건에도 체포되어 복역하였으며, 1935년 임화·김기진 등과 함께 카프 해소파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장편 ≪대하≫(1939), 연작인 ≪경영≫(1940)과 ≪맥≫(1941) 등을 발표했다.
8.15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하여 좌익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던 중, 1947년 말 경 월북하여 해주 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서 남조선로동당의 대남공작활동을 주도하였으며, 한국 전쟁에도 조선인민군 종군 작가로 참전했으나, 1953년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로동당에서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김남천도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1953년이나 1955년에 사형당했다는 설, 1977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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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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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월 11일, 우리나라 최초의 인명(人名) 기차역인 ‘김유정역’이 있는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그로서는 안타깝게 차남으로 태어난다. 1914년, 유정 일가는 서울 진골(현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저택으로 이사하는데, 셋째 누이 김유경은 이곳을 유정의 출생지로 증언한다. 1915년 어머니가, 2년 뒤인 191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된다. 9살, 유정은 아직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가장이 된 형 유근은 동생을 돌보는 대신 주색잡기에 빠져 산다. 유정은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 사진을 들여다보곤 하며, 친구들에게 어머니가 미인임을 자랑하기도 하며, 횟배를 자주 앓으며 소년기를 보낸다.
1929년, 한 번의 휴학을 거쳐 휘문보고를 졸업한다. 그동안 형의 금광 사업 실패와 방탕한 생활로 가세는 몰락한다. 193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지만 결석으로 인해 곧 제적당한다. 스스로는 더 배울 것이 없어 자퇴했다고 했지만. 이후 얼마간의 방랑 생활을 거친 후 귀향, 야학당을 여는 한편 농우회, 노인회, 부인회를 조직 농촌계몽 활동을 벌인다. 그 와중 늑막염이 폐결핵으로 악화한다.
1933년, 서울로 돌아온 유정은 누나들 집을 전전하며 폐결핵을 견뎌야 하는 삶을 산다. 그런 유정을 안타까워하던 친구 안회남이 소설 쓰기를 권유, <산골 나그네>와 <총각과 맹꽁이>를 연이어 발표한다. 그리고 1935년,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각각 1등과 입선으로 당선, 문단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정식으로 등단한다. 이후 1937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소설 30편, 수필 12편, 그리고 번역 소설 2편을 남긴다.
죽기 한 해 전인 1936년 가을, 이상으로부터 “유정! 유정만 싫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불우한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라는 동반자살 제의를 받지만, “명일의 희망이 이글이글 끓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한다. 하지만 이듬해 3월 29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살을 먼저 제의한 이상보다 19일 먼저. 사인은 둘 모두 폐결핵. 같은 해 5월 15일, 요절한 두 천재의 죽음을 기리는 합동 추도식이 치러진다. 발기인은 이광수, 주요한, 최재서, 정지용, 이태준, 박태원, 그리고 안회남 등 25명. 1938년, 김유정의 첫 책이 삼문사에서 출간된다. 제목은 《동백꽃》.
죽기 열하루 전, 번역으로 “돈 100원을 만들어볼 작정”을 한 유정은 안회남에게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탐정소설 두어 권을 보내줄 것을 편지로 요청한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며. “책상 위에는 ‘겸허(謙虛)’라는 두 글자”를 커다랗게 써 붙여놓은 채. 스물아홉의 피 끓는 삶에의 몸부림과 죽음에 대한 겸허한 자세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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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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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백릉이며, 1902년 전라북도 옥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14년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18년 경성에 있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재학중에 집안 어른들의 권고로 결혼했으나 행복하지 못했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1년여 만에 그만둔다.
1924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한다. 그 뒤 〈산적〉을 비롯해 다수의 소설과 희곡 작품을 발표하지만 별반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32년 〈부촌〉, 〈농민의회계〉, 〈화물자동차〉 등 동반자적인 경향의 작품을, 1933년 〈인형의 집을 나와서〉, 1934년 〈레디메이드 인생〉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의 기반을 굳힌다. 1936년에는 〈명일〉과 〈쑥국새〉, 〈순공있는 일요일〉, 〈사호일단〉 등을, 1938년에는 〈탁류〉와 〈금의 열정〉 등의 일제강점기 세태를 풍자한 작품을 발표한다. 특히 장편 소설 〈태평천하〉와 〈탁류〉는 사회의식과 세태 풍자를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1940년에 〈치안속의 풍속〉, 〈냉동어〉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한 그는 1945년 고향으로 내려가 광복 후에 〈민족의 죄인〉 등을 발표하지만 1950년에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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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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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함북 성진군 임명면에서 빈농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어려서 부친 혹은 서당을 통해서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1918년 간도로 들어가 유랑 생활을 시작해서 부두노동자·음식점 심부름꾼 등 최말단 생활을 전전했다. 1923년 봄에 간도에서 귀국하여 회령역에서 노동일을 했으며 이때부터 ‘서해(曙海)’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춘원의 『무정』을 읽고 크게 감명받고 동경에 있는 춘원과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24년 「토혈」, 「고국」으로 등단했다. 1925년에 조선문단사에 입사하여 중견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기진의 권유로 카프에 가입했다. 1927년에는 조선문예가협회의 간사직을 맡았으며 전 해에 휴간한 조선문단을 남진우가 인수하여 1월에 다시 입사하지만 4월에 또 실직했다. 위문 협착증을 앓던 그는 대수술 중에 과다 출혈로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학은 ‘체험문학’, ‘빈궁문학’, ‘저항문학’으로 규정된다. 몇 명의 엘리트의 눈으로 바라본 일부의 삶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한 대다수의 극빈층의 생활상을 날카롭게 표현해 그들의 울분과 서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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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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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그릇된 동경」, 「인조폭포」, 「황혼」 등을 저술한 소설가. 평론가.
본명은 병도(秉道). 함경남도 함흥 출생. 1919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북청사립중학교(北靑私立中學校) 강사로 지내다, 1925년 단편소설 <그날 밤>(朝鮮文壇, 1925.1.)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7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가담하였으며, 1934년 극단 <신건설사>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 뒤 귀향하여 소설 창작에 전념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인연맹(國民總力朝鮮人聯盟) 등 단체 활동을 하였다. 1945년 광복 당시 이기영(李箕永)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조직하였다.
다음해인 1946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조직하여 북한공산당의 문화예술계의 주동적 구실을 담당하였다. 초기 김일성(金日成) 체제 아래에서는 문화선전상 등의 요직을 거쳤으나, 소련에서의 스탈린 격하 시기에 김일성 반대 세력에 동조하다가 1960년대 초기에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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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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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20년 조선일보사에 입사, 같은 해 11월 《개벽》에 첫 작품인 「야생화」를 발표하지만 혹평을 받으며 작가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1921년 1월 《개벽》에 「빈처」를 발표하면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발돋움했다. ‘백조 동인’을 거쳐 ‘파스큘라’와 ‘카프’로
이어지는 현진건의 문학 이력은 그의 사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숙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했으며 김동인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술 권하는 사회」 「할머니의 죽음」 「B사감과 러브레터」 「사립정신병원장」 등의 단편과 《적도》 《무영탑》등의 장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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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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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는 1894년 8월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선비이며 학자인 아버지 조병행과 연일 정씨 어머니 사이에서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자(字)는 경덕(景德), 호적명은 명희(明熙), 애칭은 칠석이었다.
네 살 때 부친인 조병행이 죽고 난 후, 조명희는 둘째 형 조경희 집에 머물며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우고, 서당에서 한자를 배우기도 했다. 진천소학교에 다니며 열네 살에 충북 서산에 사는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인 민식(閔植)과 혼인을 하게 된다. 1914년 한여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조명희는 북경사관학교로 떠나려다가 평양에서 둘째형 경희에게 잡혀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신소설을 읽었고, <홍루몽>, <삼국지> 등 많은 중국 소설도 접하게 된다. 특히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민우보 역의 ≪희무정(噫無情, 레미제라블)≫에 빠져 지냈으며, 이광수의 ≪무정≫ 등 근대 소설과 ≪태서문예신보≫, ≪창조≫, ≪삼광(三光)≫ 등 근대 잡지를 접하게 되면서 ‘문예’에 눈뜨게 된다.
1919년 3월 초, 3·1 만세 운동을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난 후, 조명희는 5년간의 고향 생활에서 벗어나 일본 도쿄로 가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입학한다. 경제적 사정과 언어 소통, 문화 차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학비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괴테를 읽고 타고르와 하이네를 읊었다. 친하게 지내던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1920년 봄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근대극 연극 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창설한다. 1921년 여름에는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전국 순회 연극단의 공연 작품으로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사>가 채택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 연극 대본은 한국 근대 문학 최초의 창작 희곡으로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 삶을 그린 조명희 자신의 자전적 작품이다.
친구들과 연극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명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3년 반 만에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다음 해에 상경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노적(蘆笛)이라는 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게 된다. 일본에 가기 전 고향집에서 썼던 시들과 도쿄 유학 시절의 시들을 모은 이 시집은 근대 문학 사상 개인 창작 근대 시집으로서는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 이학인의 ≪무궁화≫에 이어 세 번째에 해당한다.
1925년 8월에 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조명희는 ≪개벽≫에 <땅속으로>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새로운 문인 생활을 시작하고 1927년 7월 ≪조선지광≫에 단편 <낙동강>을 발표하면서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선구적 작가가 된다. <낙동강>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이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성운(농업학교 졸업, 군청 농업 조수)이 3·1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히더니, 출옥한 이후에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로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조명희의 경성 생활은 일제 식민 통치 속의 숨 막히는 압박감과 불안감, 헤어날 길 없는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1928년 8월 조명희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이전의 서정시와는 다른 분위기의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조생’이란 필명으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이 시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담고 민족 해방과 계급 투쟁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후 조명희는 조선인 육성촌에서 조선어 교사로 있으면서 문예를 지도하며, 동화극 <봄 나라>, 동요 <눈싸움>, <샘물>과 같은 작품들을 쓰게 된다. 1930년 동료 교사인 황명희와 재혼하고, 우수리스크로 이사해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조선어문학을 강의하게 된다. 당시에 그가 쓴 시, 소설, 정론, 평론 등의 작품들은 소비에트 조선 문학의 방향성을 보여 주었다.
1934년에는 작가 파제예프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했으며, 연해주의 한국신문 ≪선봉≫의 문예면 편집을 자문하게 된다. 이듬해 하바롭스크로 이사한 후 조선사범대학의 교수로 재직한다. ≪선봉≫ 신문에 문예란을 만들고, 자신의 한글 및 문학 교육을 받아 창작된 한글 문학 작품들을 모은 ≪로력자의 조국≫을 출간하기도 했다. 당시 조명희는 블라디보스토크나 우수리스크 인근 연해주 또는 빨치산스크 등지에서 많은 제자들을 문학가로 길러 냈다.
1937년 장편소설 ≪만주 빨치산≫ 집필 도중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기관원에 연행되고, 가족은 스탈린의 ‘고려인 시베리아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만주 빨치산≫의 내용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조국(조선)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애국지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듬해에 소련 당국으로부터 일제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바롭스크 현지 주르사 감옥에서 처형당한다.
1956년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정권 때,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1938년 4월 15일의 결정을 파기, 무혐의로 처리하고 조명희를 복권시켰다. 1959년 12월 10일에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서 편찬한 ≪조명희 선집≫이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1988년 한국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을 해금 조치함으로써, 조명희에 대한 문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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